" ‥‥‥다이스케 씨가 옆에 없었으면 이런 일은 안 했어요."
"네?"
"만일 혼자였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안 받았다고요."
시오리코 씨는 뾰로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서둘러 안경을 썼다. 눈가가 살짝 발그레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나는 그 말이 일전에 했던 질문의 답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없었어도 이런 의뢰를 받았을 거냐는 질문.
왜 지금 여기서 대답한 걸까. 타이밍을 영 알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확실히 알게 된 것도 하나 있었다.
시오리코 씨는 무슨 일이든 어영부영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다. 시간이 걸려도, 묻는 말에는 꼭 대답해주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 고백에도 반드시 대답을 줄 것이다.
벌써 5월도 반이나 지났다. 약속한 날까지 앞으로 2주 남았다. (p.193-194)
5권의 처음을 열면 당연히 고백에 대한 답이 나올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훗, 책은 책인가, 그녀는 대답을 미뤘다. 그러나 다이스케 는 알고 있다. 그녀는 '묻는 말에는 꼭 대답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 부분이 좀 멋졌는데, 나는 밍기적거리고 대답을 회피하는 것 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분명히 대답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흐리멍텅하고 우유부단한 것보다는 명확하고 분명한 것이 모든 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묻는 말에는 꼭 대답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가슴 벅찬 일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확신을 받으며 살아가고 싶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짚고 넘어가는 사람,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해주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면 사실 애매하게 내 가슴을 찢어놓는 일은 없지 않을까. 뭐, 엉뚱한 데서 찢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인용문이 있었는데, 그건 어마어마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인용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런 생각을 했다. '연애란 둘이 하는 것' 이라고. 나 혼자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이런 경우가 찾아오면 나는 어쩌지, 하는 고민을 머리 싸매고 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답을 내리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리고 내가 내린 답이 반드시 옳다거나 행복한 답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 고민을 입밖으로 내어 말하고나면,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감히 그런 일을 상상도 해볼 수 없었던 답을 얻어낼 수도 있다. 그를 사랑하는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이런 답을 내리며 전전긍긍하고 있다면, 나를 사랑하는 그는 그의 시점에서 답을 내릴 수 있다는 것. 바로 그런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갈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답 열 개가 불행에 가까운 것이라면, 그가 생각해낸 단 하나의 답이 행복에 이르는 길일 수도 있다. 그것도 둘이 함께.
일전에 '엘리자베스 게이지'의 《스타킹 훔쳐보기》시리즈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의 문제는 내 문제' 라고. 전적으로 그 말에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렇게 말한 마음을 이제는 뭔지 좀 알 것 같아졌다. 시오리코의 망설임과 고민에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말해준 다이스케 가 아주 단단한 의지가 되었다, 내게는.
넌 내게 안정감을 줬어.

아우. 이 영화 보기 전에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친구와 분식이나 먹어야겠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보고나니 마음이 확 바뀌어서 친구와 나는 스맛폰으로 우리가 있는 곳의 근처 레스토랑을 급검색했고, 결국 대낮에 와인과 스테이크와 수제버거와 샐러드를 시켜놓고 깔깔대고 웃으며 먹었다. 하아- 나같은 여자는 정말이지, 이런 영화 보면 안되는데, 하아- 그런데 나같은 여자는 정말이지, 이런 영화를 좋아해?? 그러나 나는 지금 먹는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고.
극중 셰프인 남자는 이러저러한 일로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에게는 이혼한 전(前)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만 실직한 마당에 여러가지로 쉽지가 않다. 이런 그에게는 좋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바로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일하던 '스칼렛 요한슨'이다. 사실 나는 이 영화에 스칼렛 요한슨이 나오는지 모르고 봤는데, 여튼 이들은 직장동료로 일하면서 서로에게 많이 의지했고 그러면서 이성간의 끌림같은 것도 서로 느낀 사이. 그러나 그들은 '이러지 않기로 했'으므로 선을 넘지는 않는다. 이 스칼렛 요한슨의 역할이 내게는 꽤 인상적이었는데, 그녀는 그에게 정말이지 특별한 사람이다. 직장 내의 고민을 얘기하는 것도 가능하고, 이 끌림에도 불구하고 선을 넘지 않는 것까지 지켜가는 것도 그러한데, 그녀는 그를 '알아봐준다'. 그가 만드는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어주고, 그가 간식을 만들어준다고 하면 눈을 빛내며 기다린다. 게다가 그가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는 동안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그녀는 알고 있다. 너 행복하지 않았잖아, 라고 하면서.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주는 사람을 과연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보다 더 잘 봐주는데, 그러면서 성적인 끌림까지 가질 수 있다니. 이건 정말 특별한 게 아닌가. 그러므로 내가 그 둘 사이의 로맨스를 기대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둘의 관계는 로맨스로 연결되지 않는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존재는 희미해지는데, 그때 생각했다. 어떤 '특별한' 사람도 어느 순간 '그저 좋았던 사람'으로 남게될 수 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꽤 중요하게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데, 중요하다는 데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스쳐가는 데 방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 사람을 지키는 것, 계속 내 옆에 두는 것은 물론 바라는 바겠지만, 다른 사람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어쩌면 앞으로 삶을 살면서 그와 그녀는 서로 다른 사람과 사랑하고 결혼하면서, 간혹, 아주 가끔 서로를 그리워하다 연락하고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일 년에 한 번, 혹은 이삼년에 한 번쯤. 혹은 남자가 레스토랑을 개업했으니 여자가 어느 순간 불쑥 찾아오게 될지도 모르고. 그런식으로 관계가 유지될 수는 있겠지만, 때로는
좋은 사람은 그저 '좋았던 사람으로만' 남는 수도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맛있는 음식들과 풍경들을 보면서 흥분해가지고는 옆에 앉은 친구에게 우리 마이애미 가자고 속삭이고는, 참지 못해 이것저것 음식들을 마구 퍼먹고서는, 그런데 좋은 사람은 그저 좋았던 사람으로만 남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오래 남았다. 이성간이라도, 그저 '좋은 사람' 으로만 남아있고 혹은 스쳐 지나가고. 그런 것이기도 해, 인생은. 가만 떠올려보려고 노력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이성이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러나 그저 그렇게 특별한 채로 스쳐 지나갔던 사람일 수 있었을텐데, 과연 누구에게 그랬을까? 일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웃고, 성적인 끌림도 있으되,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지나간 그런 사람. 나는 누구에게 그랬을까? 그리고 누가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지?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5》권을 출근하는 길에 다 읽을 것 같아, 다음 책은 뭘 읽을까, 어제부터 고민했는데, 오늘 아침 퍼뜩, 헤마와 코쉭의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모든 걸 바로잡아줄 것 같아서 결혼을 결심했다는 그 문장이 생각나, 헤마와 코쉭을 다시 만나야지, 싶어 '줌파 라히리'의 《그저 좋은 사람》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 문장이 나오기 전에, 사랑에 빠진 문장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문장도 찾아봐야지. 내 책장에서 빼낸 《그저 좋은 사람》에는 포스트잇이 여기저기 붙어있고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헤마와 코쉭을 만날 생각에 설레었다. 어쩌면 이 설레임은 점심시간이 가까워져서인 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이런 건 때로 헷갈리는 게 아닌가.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말은 쉽지만, 실상 한번 실패한 뒤에 다시 시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면 몰라. 그렇게 한번 도망쳐버리면 대부분의 일들은 돌이킬 수 없게 되지‥‥‥." (p.99)
저번에도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젊은 놈들하고는 달리 우리 같은 늙은이들에게 시간은 충분치 않다. 좋아했다, 헤어졌다, 울고 웃을 시간이. 무거운 걸음을 떼어 느릿느릿 경사를 올라갔다. 전화를 걸지, 걸지 않을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편의점까지 가면서 생각해야겠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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