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공주
카밀라 레크베리 지음, 임소연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비행기와 기차 혹은 배나 버스를 탈 수도 있고 자전거를 타고 오랜 시간을 들여 갈 수도 있다. 걸어서 도착하는 것도 한 방법일텐데, 이렇듯 다른 여러가지 방법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면, 나는 누군가에게 '이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 으로 보이겠지만, 실상 내가 누구인지 가장 잘 말해주는 건, 이 목적지에 '어떻게' 왔느냐 일것이다.

 

나는 이 책, <얼음공주>를 읽으면서 목적지와 목적지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자꾸만 생각해보게 됐다. 이 소설의 배경은 작은 어촌마을이고, 이곳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이 책속의 주인공 에리카는 희생자가 자신과 어린시절 각별했던 친구였던지라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형사와 함께 이 사건을 풀어나간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것, 이 이 책의 목적지라고 했을 때, 그러니까 이 책을 단순히 '추리' 라고 봤을 때 이 소설은 그다지 대단할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작가는 살인사건 하나를 풀어내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했으면서, 실상 더 많은 사소한 일상들을 곳곳에 심어놓았다. 부인에게 질려서 언제고 부인 곁을 떠나고 싶어하는 남자가 그 마을에 있고, 사랑이란 감정만 믿고 남편에게 맞고 사는 여자가 있다. 결국 그 살인사건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면서도, 한 여자에게 호감을 품고 설레임을 받아들이는 남자를 보여주고, 와인을 입안에 넣고 굴려 그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여자를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인물들과 이야기들 사이사이, 나는 이 작가를 점점 더 마음에 들어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든거다.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건, 내가 지금 여기 서있다는 자체가 아니라, 여기에 오기까지 어떤 길을 걸었느냐 하는 것이라는.

 

게다가 주인공 에리카는 너무나 나를 닮아서 정이 팍팍 든다.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즐기다가 몸무게를 재고 절망하는 게 그렇다. 와인을 입안에 넣고 굴리면서 행복해하는 것도 그렇고, 남자를 초대해놓고 어떤 속옷을 입을까 고민하는 것도 그렇다. 호감이 가는 남자와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모든 문제들에 직면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도 그렇다. 물론 그녀의 해결이 언제나 올바르고 타당한 건 아니다. 때로는 무례하고 때로는 좀 지나치다는 감이 들지만, 그녀는 문제들과 사건들 앞에서 당당하게 마주하고자 한다.

 

대단할 것 없는 추리소설이었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덮었는데, 덮고나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자꾸만 생각난다. 결국 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끝에 있었던 거겠지만, 이 작가가 어떤 사고를 하고 어떤 방향을 보고 있는지는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에 나와있었던거구나. 주인공 에리카가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서-물론 다른점도 많다. 이를테면 끼니를 잊을 때가 더러 있다는 것 따위- 정다운 소설이었는데, 마지막, 결국은 아내로부터 몰래 도망치는 데 성공하는 남자를 보는 것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어촌 마을의 한 사람인 조연이 지긋지긋한 아내로부터 도망가는 내용은, 이 소설의 사건과 끝에 이르기까지 연관이 없다. 쓰지 않았어도 내용 전달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적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이 작가를 조금 더 잘 알 수있게 된거다. 묵묵히 걸어서 혹은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서 우리 모두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어떤 일들을 마주치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 각자의 몫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한 작가에 대해 궁금해져서 다음 작품을 찾아 읽어보려는 것도 결국은, 결말에서 무엇을 말하는지가 아니라, 결말에 이르기까지 그 작가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달린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