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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가마니 외 - 2005년 제6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구효서 외 지음 / 해토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 1 about 구효서
구효서는 특출한 작가가 아니다. 주지주의적 기품이 묻어나는 이문열의 글이나, 유장하고 지독한 김훈의 문장, 혹은 참신하고 창조적인 박민규의 필체처럼 어떤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의 문장은 평이하고 담담하며, 자극적인 소재를 찾아내는 후각도 예민한 편은 아니다. 문단에서 구효서의 위치도 늘 그러했다. 수많은 문학상에 번번이 거론되는 것도 그의 이름이지만, 19년의 작가활동을 통틀어 별반 특별한 수상실적을 거두지 못한 것도 또 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 또한 그의 이름이다. 수많은 "기대주"와 "총아"가 쉴 새 없이 명멸하는 문단에서 그는 은근한 빛을 오래 밝힌 수성의 작가다. 윤대녕의 말 대로 "어떤 소설의 국면에 처해서도 자기 나름의 색깔로 이야기 할 줄 아는 작가"인 것이다. 다른 말로 그의 글에는 꾸준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오래된 산삼의 약효처럼 응축되어 이제 비로소 제 향을 풍기고 알싸하고 끈적끈적한 진액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로 2005 이효석 문학상을 수상한 "소금가마니"가 그 결과물이다.
소설 ‘소금가마니’에서 이효석이 수성의 대상으로 삼은 이야기는 닳고 닳은 모성신화다. 수많은 고통과 싸워 삶의 현실을 초극하고 끝내는 자식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영원히 살아갈 그런 어머니의 이야기다.
#. 2. 소금가마니- 세 인물을 중심으로
소금가마니에서는 세 인물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감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키는 어머니와, 빼앗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유품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을 통해 수십 년의 세월을 넘어 어머니를 읽는 주인공 ‘인호’다.
어머니는 '지키는 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패악과 폭력 속에서 애틋한 과거의 사랑을 지켰고, 집안의 경제를 도맡아 지켰고, 나무에서 떨어져 죽어가는 딸을 지켰고, 처가의 어머니와 조카를 지켰고, 자신의 지성을 지켰다. 작가에게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부처'의 모습과 대비되어 나타난다.
“남편에게 얻어맞아 구시월의 늙은 호박처럼 붉게 부푼 몰골로도 아무 소리 없이 두부를 만들고, 그 두부 판돈을 남편에게 빼앗기고, 그 두부 판에 온몸이 처박히게 맞는 일이 되풀이 된다” 그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모든 것을 묵묵히 참으며 아이들을 끌어안는다. “마치 눈 안보이는 장님처럼, 안 들리는 귀머거리처럼 (중략)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울음소리 한 번 내 뱉지 않고 모든 것을 초연한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불당 안에 온화한 모습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미소 짓는 부처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가 두부를 만들어 팔아먹고 사는 형편이라 집에는 세 개의 소금 가마니가 있었다. 그런데 그 소금 가마니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덜어져나가면서 뱃구레가 꺼지는 모습이 영락없이 삼존불처럼 보이는 것이었는데 어쩌면 어머니는 소금가마니며 부처인지도 몰랐다.”
이런 어머니 상은 소설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어머니의 유품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에서 어머니가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구절(소설에서는 고딕체로 표기된다)과 맞닿아 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신에게 이르기 위해 무한히 체념하고 다시금 모든 것을 부조리의 힘으로 손에 넣었다. 어머니도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삶 속에서 온전한 자신과 자신을 이루게 하는 요소들을 지키기 위해 '무한 체념'이라는 고행을 실천하며 끊임없이 침묵했던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와 대비되며 소설의 긴장구도를 형성하는 것은 '빼앗는 자'로서의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눈에 불을 키고 어머니에게 '두부를 판 돈'으로 대표되는 그녀의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성을 착취했고 그러고서도 죽 한그릇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그는 가문의 맥 빠진 힘을 신봉하는 가부장이며, 어머니를 겁간해 임신시키는 마초이고, ‘해산한지 사흘’ 밖에 안 되는 어머니를 다시 생업전선에 밀어 넣어 착취하는 억압자이다. 결국 아버지는 다분히 인과응보적이고 권선징악적인 최후를 맞게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갈등은 아버지가 죽어가며 ‘어머니의 손을 움켜쥔 손’과 ‘한줄기 눈물’을 흘리면서 일단락된다.
주인공 인호는 이런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를 한 시대 건너에서 관찰하는 오이디푸스적 고민의 체현자이다. 그는 아버지를 멸시하며, 회상을 통해 어머니에게 다가가려 하고 키에르케고르의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려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두 책의 밑줄 친 부분을 대조하고 있는 지금,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내가 밑줄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었던 때문이라고.”
무슨 의미일까? 작가는 근대적 어머니, 아버지 상의 대립을 통해 아버지와 정서적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고 주인공 인호라는 매개체로 현대사회와 어머니와의 조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작가는 남성주체로서 품고있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어머니라는 한 인물에 집약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것은 명백한 모성신화의 연장이며 여성에게서 여성 본연의 여성성을 거세한(요상한 표현이지만) 남성용 판타지의 일종이니까.
하지만 문학이 반드시 현실을 초월하고 비전을 제시해야 할 의무는 없다. 소금가마니도 분명 해석상의 한계와 의미론적인 평론에 있어서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의 감동조차 한정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이유일까? 이효석의 단단한 문장과 고밀도의 문단을 곱씹고 있자면 어떤 근본적인 향수가 뿌리부터 젖어 올라오는 것이다. 결국 '소금가마니'에서 구효서가 지켜낸 것은 근대적 어머니 상과 '리얼리즘의 승리' 그 두 가지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