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Book]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싫다. 정말 오지게 싫다. 뭐가? 서점가를 배회하는 수천 수만의 유령들. '나는 이렇게 성공했네' 류의 자뻑충만 도서, '이렇게 하면 돈 잘버네' 류의 사이비 컨설팅 도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 류의 새디스틱 훈계도서. 아주 그냥 제목만 들어도 닭살이 오소소.

 

'집 팔아서 땅을 사라' '애들은 대치동 엄마들처럼 키워라' '웰빙해라' '몸 만들어라' '느리게 살아라' '7가지 습관을 익혀서 성공해라' '밥은 굶어도 돈은 모아라' oh my god! 그렇다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너는 가서 '집 팔아 대치동에 땅을 산 다음에 애를 낳고 매일같이 요가를 수행해 몸을 만든 후 매우 느린 속도로 7가지 습관을 익히는 동시에 밥을 굶으면 돈이 생길 것'이다. 아멘.

 

교회에서 전도사 형제님과 교회 안에서 동성애가 허용이 되느니 마느니 하는 문제로 모처럼 한 따까리 하고 씨근덕거리는 내게 이 책을 빌려준 K누이의 의도 때문이다. 솔직히 뻔한 거 아닌가. 필시 그녀는 논쟁에서 나와 반대 방향에 앉아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훈계'가 하고 싶었으나 대 놓고 하기에는 화목한 교회의 평화가 저해된다고 판단 했을 터.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점잖은 책을 통한 감화정책. 정치색을 띠고 내 손에 들어온 이 책이 내게 이쁘게 보이리 만무하다. 보나마나 '순종' 이 어떻고 하는 '조신하게 믿어라' 류의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의 저자 '필립얀시'.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복음주의 진영의 컬럼리스트 아니던가.

 

그래서 마지 못해 펴들었는데, 이럴수가. 놀랍게도 제법 읽어볼만한 내용이다. 생각했던 것 보다 촌스런 예수쟁이 냄새가 안 나는, 마치 눈이 그물그물한 할아버지가 화롯가에서 조근조근 풀어놓는 옛날 이야기 같았달까? 그러니까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은혜'라는 신학적 개념을 학문이 아니라 이야기로 풀어내는 힘이다. 그 한 주제에 관한 한 그의 성찰은 분명 깊고 넓은 것이었다.

 

사실 '감사'라는 교회 사투리를 문자로 찍 써 놓고 나면 얼마나 감이 안 잡히는가. 왜 감사를 해야 하냐고 물어보면 그것 또한 얼마나 감이 안 잡히는 것인가. 하지만 이야기가 갖는 힘을 이용하면 낮은 수준에서도 어려운 개념들을 이해 시킬 수 있다. 마치 셰헤라쟈드의 천일야화처럼 살의를 품은 임금도 순한 양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야기의 힘이다. 예수도 학적 개념이 아닌 비유적 이야기로 진리를 설파했다. 2000년을 이어 내려오고 있는 성경의 힘은 이야기의 힘이다.

 

하지만 K가 내게 이 책을 준 목적은 안타깝게 달성되지 못했다. 복음주의적 시각으로 동성애를 해석하는 얀시의 수준은 겨우 성경이라는 틀 안에서 기존 권력이 장악하는 헤게모니를 방어하는 수준이지 그것을 신학과 세상 안에서 정당화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쓸 정도가 되기에는 함량미달이다.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컨텐츠가 "육체에 흠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무릇 흠이 있는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곱사등이나 난쟁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상한 자나... (레위기 21:17~20)" 라는 말씀을 그대로 신봉하던 중세 수준에서 오랫동안 업데이트가 안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단적으로 들어나는 예가 현대 영화를 은혜롭게 해석하는 대목에서다. 얀시 曰 "포레스트 검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다. 불러일으킨 반응도 비슷했다. 그 영화를 단순하고 황당하고 교묘히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본 사람들도 있지만, 그 속에서 "펄프픽션"이나 "내츄럴 본 킬러"의 잔혹한 비은혜를 깨끗이 상쇄해준 은혜의 루머를 본 사람들도 있다. 그 결과 "포레스트 검프"는 당대 최고의 성공작이 되었다. 세상은 은혜에 굶주려 있다."

 

아니, '은혜'롭기 때문에 '펄프픽션'과 '본 킬러'의 '비은혜'를 마구 '상쇄'해 주며 '당대 최고의 성공작'이 된 '포레스트 검프'.라.. 영화 팬 입장에서 가슴을 치며 한탄할 얘기다. 타란티노의 '펄프픽션'을 '내츄럴 본 킬러'와 단지 '잔혹하'다는 이유로 묶어 '포레스트 검프'와 대조하다니. 이건 운동선수라는 이유로 펠레와 마이클조던을 묶어 미셸 콴이랑 권투로 2:1 맞짱을 뜨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닌가. 사실 영상이 주는 잔혹함을 충격량으로 계산한다면 언뜻 봐도 포레스트 검프의 베트남 전쟁 장면은 어디 내어놔도 빠지지 않을 장면일게다.

 

사실 이것 말고도 율법주의를 자신의 복음주의에서 의식적으로 배제하려고 애는 쓰지만 결국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논리적으로 전전긍긍하는 필립 아저씨의 귀여운 모습은 이 책의 백미중 하나다. 231~232p 등등등. 이런 은혜로운 얀시 아저씨의 삑사리를 발달 심리학적으로 해석해 보려는 나의 시도는 안타깝게도 길게 쓴 글을 날려먹는 바람에 게시하지는 못하게 됐다. 아무래도 착한 아저씨 너무 놀려먹지 말라는 주님의 뜻이리라. 이런 것이 바로 은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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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7-18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잖은 책을 -- 점잖은 책들
눈에 띈 오타 신고!


로드무비 2006-07-18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혜의 루머라고요?
재미있는 말이네요.
그래도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 쪽으로 리뷰를 쓰셨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06-07-18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그런 오타가 있었군요. 이 쓸모없는 손가락 확 잘라버릴까. ㅠ_ㅠ
예, 신앙인이시라거나 그쪽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쯤 읽어볼만한 책이지요. 어려운 개념 몇개 잡고 낑낑거리는 신학 입문서가 아니라 페이지도 쉽게 너머가구요.. 물론 얀시와 저는 견해가 다른 부분이 있어서 중간 중간 조금 껄끄럽기도 했지만 특별히 성격 모나지 않은 분들이야 문제없이 넘어가실 수 있겠죠. ^^ 편안한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하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마음이 마구 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근데요 로드무비님.
'젊잖은 책을 -- 점잖은 책들' 이 부분에서 (--) 요 건 인상 찌푸린 이모티콘으로 봐야 하나요 하이푼으로 봐야 하나요? 저.. A형이에요..

치니 2006-07-19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사무실 내 예배 시간에 놀라운 은혜를 찬송하는 소리가 엄청 크게 들립니다.
동성애까지는 바라지 않고, 흑, 그냥 소리만 조금 줄여주심 고마울텐데, 저같은 비신앙자에게는...아무래도 어렵겠죠?

그나저나 안 읽어봐도 정말 잘 쓰신 리뷰 같아서, 추천!

rainy 2006-07-19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이 하늘만큼이나 가라앉을려던 참인데.. 리뷰를 읽고 나니 슬몃 웃음이 나요.
저를 볼 때 가끔 심사가 뒤틀려 있을 때 글이 잘 써지는 것 같다 싶을 때가 있어요.
너무 다 그런게야 싶을 땐.. 쓰고 앉아 있는 글도 참 재미가 없더라구요 ^^
쓰는 사람의 호흡이 읽는 사람과 맞을 때, 잘 읽히고 좋죠. 그래서 추천이요.
그리고 너무 오랜만 아니셔요? ^^

뷰리풀말미잘 2006-07-19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 거 참 이기적으로 은혜로운 사무실이군요. ^^ 치니님이 고생이 많으시네요. 엄니 뱃속에서 부터 교회를 다닌 저도 가끔 적응이 안 될 때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듣자하니 우리나라 기독교가 그토록 요란뻑적지근 한 이유가 왈가닥스럽기로 어디 안 빠지는 캐나다 북장로파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더 그렇다는 얘기도 있고, 특유의 샤머니즘적 오버라는 얘기도 있고, 심지어 유독 영성이 강한 민족이라 그렇다는 얘기도 있더라구요. 싹수부터 촌스러웠단 얘기죠 뭐.. ^^ 기독교 문화도 좀 바뀔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은 낌새가 보이질 않네요.. 여하튼 추천 감사합니다. 히히

뷰리풀말미잘 2006-07-19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니/ 맞아요! 저도 그렇더라구요. 그 뭔가 짜증나고 울컥하는 그 감정이 글이 될때 '오, 내가 이런 걸 썼단 말이야?" 할 때가 종종 있죠. ^^ 감정이 글로 승화 된 걸까요? 그런데 그런 글은 가끔 날카로와서 읽는 사람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게 될 때도 있더구만요.

정말 오랫만이에요 레이니 님. 그 동안 팔자에도 없는 주독야경을 하게 되어서 말이죠. 이제 방학이라 자주 오게 될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랫만에 '방학'이란걸 해 보는데 주책맞게스리 너무 신나는 거 있죠?

로드무비 2006-07-19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하이푼이지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