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고를 때 종종 난관에 부딪힌다. 자본은 한정적인데 소비해야 할 품목이 많을 때 어쩔 수 없이 책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일차적인 판단기준은 필요성의 유무이고 이차적으로는 선호도에 따라 선택이 갈음되겠지만, 문제는 이런 논리회로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여전히, 소비해야 할 상품의 가지수는 한정적인 자본력을 상회한다는 점이다.
바로 어제저녁의 내 상황이 그랬다. 알라딘 장바구니를 앞에두고 한숨만 쉬기를 수차례. 그도 그럴것이 20000원이라는 한정적인 자본에 비해 장바구니에는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와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헬레나 노리의 '오래된 미래'까지 무려 세권의 책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합계 24350원. 입으로는 중얼중얼 "질러버리자, 질러버리자, 질러버리자"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떨리는 마우스 커서는 거래승인버튼 근처에서 멈칫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께 잃어버린 지갑의 압빡이 큰 탓이다.
다행이 어제는 논리회로의 필터를 더 조밀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지만 간간히 그런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예컨대 물이 새는 배가 있다고 하자. 하지만 배 밖으로 무엇인가를 던져 70Kg정도의 무게를 감소시킨다면 배는 침몰의 위기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때, 더 이상 배 밖으로 던질 것이 박민규와 김영하 두 사람 밖에 없다고 한다면 과연 누구를 택하겠는가.
1. 박민규 2. 김영하 3. 둘 다 4. 차라리 내가 5. 함께 빠져 죽는다
쉬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나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박민규와 김영하를 옆에 묶어 두고 갑판에 머리를 짖찧으며 생각할 것이다. 과연 누구를 버릴 것인가. 우선 찬찬히 (시간이 허락한다면) 두 사람의 문학세계를 돌이켜 볼 것이다. (다행히 나는 그들이 쓴 대부분의 저작을 읽었다). 그러나 결론은 용호상박. 누가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인 그들의 문학에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겠는가. 나는 다시 머리를 짖찧으며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미모지상주의자답게 두 사람의 미모를 비교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 (개중에 특별히 '우'랄게 뭐 있겠나.) 결국 생각다 못한 탐미주의자는 아픈 머리를 감싸쥐고 두 사람의 패션을 비교할게다.
책에서 '패션'에 상응하는 것은 응당 표지디자인일 터. 그렇다. 도서구입에 있어서 나의 최종적인 판단기준은 바로 표지디자인이다. 옆구리에 끼고 다닐 때 나는 간지의 정도와 표지디자인의 점수는 비례한다. 책장에 꽃아놓았을 때 얼마만큼 포스를 발산하는가와 표지디자인의 점수는 역시 비례한다. 이 것을 수학식으로 나타냈을때... 으음.. 여하튼 표지디자인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표지디자인은 출판사마다 특색이 있는데 역시 압권은 '열린책들' 출판사의 디자인이다.



심히 아름답지 아니한가?
튼튼하고 깔끔한 양장본에, 껍질 안쪽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써 주시는 굿 디자인.
내 책장에서 열린책들 출판사의 도서 총수는 35권. 꽤 비중있는 위치에 있다. 이것은 어느정도는 표지디자인의 힘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숨쉬기가 귀찮아질 정도로 심심해지면 통계로 검증해 볼 예정이다.)
열린책들과 더불어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출판사로는 휴머니스트, 문학동네, 문학세계사의 표지디자인이 하이퀄리티를 자랑한다.


문학동네- 히라노 게이치로, 일식/ 김영하, 빛의 제국
역시 뷰리풀하다.
반면에 상당한 인지도를 쌓은 출판사임에도 표지디자인이 대략 누추한 출판사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동문선, 문학사상사, 그리고 까치글방을 꼽을 수 있겠다.



문학사상사의 누추한 디자인.



동문선의 빈곤한 디자인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개중에서도 특히 까치글방의 표지디자인은 매우 안타까운 수준이다. 까치글방은 어떻게 저렇게 훌륭한 책에 저따위 껍데기를 씌워놨을까 싶은 출판 리스트를 자랑한다. 그렇다고 타 출판사에 비해 값이 싼 것도 아니다. 오히려 비싸다! 이것은 심혈을 기울여 마빡이를 열연하는 장동건과 같은 것이다.



까치글방의 괴델, 에셔, 마빡이 ㅠ
내가 발과 그림판만으로 그려도 저것보단 낫겠다 싶다. 내가 이제껏 괴델, 에셔, 바흐를 완독하지 못한 이유는 모두가 저따위 표지디자인 때문이다.
그리고 주목할만한 출판사로는 민음사가 있다. 한국 연 매출액이 300억원이 넘는다는 한국 최대의 출판사. 고 퀄리티의 출판목록을 자랑하는 출판의 명가. 내 책장에서도 단일 출판사로써 최대 권수를 자랑하는 민음사는 디자인은 환쟁이들이나 하는 줄 알았던 출판계에서 혁신적인 디자인을 출판의 질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찬란한 과거가 있다. 아직도 가끔은 심심하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디자인을 채택, 중간 정도 점수를 줄만 하다. 그러나 문제는 가끔 삽질을 한다는 거.
정말 발과 그림판을 활용한 디자인을 해 버리는


것이다.

아.. 안습이다. 보르헤스 전집.
표지디자인 하신 박상순씨, 김황씨.
밥은 먹고 다니시나요?
이 두 사람 이 표지디자인 하고 일당 받았겠지?
설마 요따우 디자인에 돈을 받았다면 그건... 인간의 탈을 쓴 식충이다.
나는 탐미주의자이고 또 탐서주의자다. 읽지않은 책이라도 책장에 꽃혀있기만 하면 배가 부르다. 돈을 빌려줄땐 망설이지 않아도 책을 빌려줄 땐 망설인다. 이왕 더불어 살 책이면 오래 봐도 잘 망가지지 않는 장정이면 좋겠다. 그리고 예뻤음 좋겠다. 혹자는 열린책들의 양장본이 불편하며 문학동네의 책들이 디자인에 너무 많은 값을 할애한다고 한다. 하지만 해외 오래된 도서관의 고서들을 보며 나는 책이란 무조건 튼튼하고 예쁘기부터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 정이 가는것이 오래 남는 것이니까. 책은 오래 남을 것이니까. 또 오래 남아야 할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