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그들이 김선일을 참수했을때, 그날 아침 나는 여섯 번 손을 씻었다. 일어나서, 밥 먹고, 볼일 보고, 더 이상 아무런 구실이 없을 때 까지 손을 씻고 그제야 내가 비정상적으로 손을 씻어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빌라도가 죄 없음을 스스로 표현했던 행위도 손 씻기. 그건 너무도 치졸하고 조악한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일 따름이었다.
울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를 추도하는 의미었을까. 어쩌면 그 끔찍한 폭력의 사태로부터 내 감수성을 지켜주지 못한 국가에 대한 분노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날 이후 '국가에 의한', 또는 '국가를 대하는' 내 휴머니티의 기준은 꽤 달라졌다. 김선일이 죽은 날은 2004년 6월, 공교롭게도 노무현의 재임기간(2003.02~2008.02)과 겹친다.
#. 2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을 목도하며 노무현이 말 했던 개혁과 진보가 내 상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에 분노했고 또,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말한 그 개혁과 진보마저도 무참하게 현실에서 사그라지는 형편이 슬펐다. ‘이매진’을 BGM으로 깔아놓고 눈물 흘리던 그 이미지가 진정 ‘노무현’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현실의 그는 공무원 임면권 정도를 행사하고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하나의 국가기관에 불과했다. 국가기관, 그것은 '이해'하고 '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외부의 조건에 의해 '작동'하고 '동작'하는 개체였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정치 시스템은 의원 내각제와 대통령제가 적당히 짬뽕된 형태로 여느 대통령제에 비해서 대통령의 파워가 강한 편이 아니다. 더구나 열린우리당은 노무현에게 충분한 지원사격을 해 줄 정도로 지지율이 높았던 적이 없었다. 굳이 그 총체적 크기의 파워를 말하자면 언제나 내가 지지하는 쪽 보다는 노무현이 강했고, 노무현 보다는 한나라당이 강했다. 노무현의 기반은 늘 외로워서 그는 물길을 거슬러 가기 보다는 버티고 있기에 급급했다.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서 지금의 ‘한나라당’이 대표하는 그것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거시적 상관 관계를 간과한 노무현과 노무현을 둘러싼 모든 현상이 '인간 노무현'에 대한 애도와, 대 이명박이라는 키워드로 단순하게 도식되고 있다. 낭만적이고, 순진하다. 문제는 그런 집단적인 낭만과 순진함 배면에는 반드시 파시즘의 지류가 흐른다는 것이다. 김동길을 비롯한 여러 삐딱이들에게 여론의 십자포화가 터진다. 조금 달랐을 뿐 김동길과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한 이웃 서재의 마태우스님 같은 경우도 정신없이 물어뜯기고 있는 모양이다. 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대한 대중들의 무차별적 폭력은 마치 디워 사태를 연상시킨다.
지금 우리의 이성은 물찬 비커에 떨어진 잉크방울처럼 각양의 감정들로 번져나가는 슬픔을 단속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무슨 일이 있어도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고무줄처럼 돌아왔다. 이제 알아야 한다. 그런 감정들은 단지 소모될 뿐이라는 것을.
#. 3
노무현에게 자살은 어떤 의미었을까. 그는 단순히 자신의 정신적 사고와 육체적 감각이 이 세계를 벗어나기 원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살이 생산하고 연쇄하고 의미하는 정치적인 사태를 고려한 것일까. 아마 그는 단순히 이 세계를 벗어나기 원했겠지만 그 죽음이 몰고 올 정치적 후폭풍을 모르지 않았을 거다.
약자들에게 의미 없는 자살은 없다. 모든 약자들의 자살은 사회적 함수관계에 의한 자살이다. 그 어두운 함수관계를 이끌어 내는 기제를 편의상 ‘시스템’이라고 하자. 시스템에 의해 자살 당했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 두산 중공업 노조원 배달호의 분신, 어느 KT 노조원의 투신, 스스로 목을 맨 화물연대 노조원 박종태. 그리고 노무현. 이러한 흐름에서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야 말로 오히려 노무현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노무현의 자살은 ‘시스템’에 좌절한 사회적 약자의 죽음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런 맥락에서 ‘정치 보복’이라는 말이 은닉하는 바를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노무현이 정치적 숙적에 의해 숙청된 느낌을 갖게 만든다. 노무현이 독재자였다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무현이 한나라당이었다면 역시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좌절하는 사회적 약자였기에 자살했다.
누가 그를 약자로 만들었는가. 이 지점에서 접근하자. 이 빌어먹을 시스템은 왜, 이토록, 자주, 약자들의 자살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수 많은 자살에 흔들리지 않고 그 뻔뻔한 권력의 옹벽을 사수하는지.
이제 당신이 해야 할 바를 묻는다. 좌절에 이성을 맡길 것인가, 현상의 단편에 쉽게 분노하고 쉽게 사그라들 것인가. 생각해보자, 노무현이 우리에게 준 유산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몽둥이질 하고(改=己+攵), 살 가죽을 벗기는(革) 개혁의 정신이 아니던가. 그리고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참여’하는 것.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내 몬 시스템에 대한 유일한 저항의 방법이며 “우리 아이들에게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꼭 성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