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게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오랜 숙제같은 소설이었습니다. 1960년대라는 소설을 둘러싼 시대적 의미와는 별개로 말이지요. 결국 읽었습니다. - 서정적인 기행문에 대한 순진한 기대의 반대급부일까요. '무진'을 비롯한 배경과 등장인물의 상징성, '미친 여자'와 '술집 여자의 죽음', 사건의 은폐와 같은 다수의 소설적 장치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에 제법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 소설은 참 쉽고도 어렵습니다. 올 겨울 소설 한편을 쓸 수 있을런지요. 아래는 그저 눈길 가는대로 담아놓은 원문입니다. ---------- "미친 여자가 기억들을 홱 잡아 끌어당게 내 앞에 던져주었다." (노골적이어서 별로인 표현) "바로 그 때부터 나는 그 여자가 내 생애 속에 끼어든 것을 느꼈다." (노골적이지만 좋은 표현) "손바닥과 손바닥의 틈으로 희미한 바람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행동을 통해서 등장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 극치) "내가 쓴 모든 편지들 속에서 사람들은 '쓸쓸하다'라는 단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제 3의 주체를 통한 표현, 한국어 어순에 맞지 않아 이질적인 멋)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 (섹스신을 단 한줄에 담은, 단연 최고의 표현)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제 3의 주체를 통한 표현, 의인화) "쓰고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반복을 통한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