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 -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
테리 이글턴 지음, 전대호 옮김 / 갈마바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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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함, 통찰력, 독창성, 글솜씨, 이 모든 것을 함께 갖춘 멋진 꼰대 마르크스주의자가 있다면 그가 테리 이글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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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4 : 육체의 고백 나남신서 201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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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코로나19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리뷰인지도 모르겠다. 지루했지만 꾸역꾸역 읽어서 어쨌든 끝까지 보았는데 역병이 창궐하지 않았다면 리뷰 쓰려고 이 책을 더 붙잡고 있었을지 의문스럽다. 읽는 동안은 과연 이 책 전체에서 푸코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또 지금 읽는 부분이 앞의 논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보게 되든 어떻든 일단 파편적 요약이나마 그냥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몇 자 적는다.


1. 육체 (la chair)

이 책의 제목에 들어있는 육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관성(주체성)의 형식이고, “주체화의 한 방식이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존재 방식이면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인식 방법인) 동시에 자기변화의 도식으로 이해되는 경험형식이다(84-85). 성생활 규범은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2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세례 이후 지은 죄에 대한 속죄의 규율 – ‘두 번째 속죄’(116-7; 13, 부록3) - 3세기 말부터 실시된 수도사의 고행(14) 같은 새로운 개인의 테크놀로지가 등장하면서 근본적 변화를 겪었다(83-84). 이는 단순히 느슨했던 성모럴이 빡세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변화를 통해 이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자기와 자기 사이의 어떤 관계 방식”, 새로운 경험양식이 출현했음을 뜻한다. 1장에서 살펴보는 것은 대략 4세기 경 확립된 수도원에서 등장한 새로운 경험 형식이다. (불어를 모르고, 영어 번역본은 아직 안 나와서 la chair육체로 번역한 것에 대해 논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다.)


2. 성찰-고백 (examination – confession)

고대 철학의 양심성찰과 책임지도의 관습은 수도원 제도가 만들어진 이후부터 기독교에 의해 수용되어 새롭게 발전했다(178). 5세기 초 카시아누스(360/65-430/35 CE.)의 저작들은 당시 수도생활의 모습을 짐작케 해주는데, 수도원에서 행해진 지도와 복종의 실천은 이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경험양식이 출현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도생활은 스승 혹은 고참의 지도를 필수적으로 수반하는데, “지도는 복종을 가르치는 엄격한 훈련이며, 이를 통해 수련 수도사는 타인의 의지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다. 이 지도를 통해 수련 수도사가 배우는 것은 순종, 인내심, 겸손함이다. 순종이란 타인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것이고, 인내심이란 원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 자신의 의지가 다른 사람의 의지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고, 겸손함이란 아예 원하기를 원하지 않기,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기이다(193). 이러한 수도원의 지도는 그리스 철학의 지도와 다르다. 그리스에서 지도의 목표가 지도받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적 의지 행사의 조건을 확립하는 것이었다면, 기독교적 지도의 목표는 개인의 의지 포기이다(195).


자기 의지의 포기와 그것을 타인의 의지로 대체하는 것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기성찰과 끊임없는 고백의 훈련이 필수적이다”(186). 곧 지도는 고해라고 불리는 성찰-고백의 영구적 실천을 중요한 도구로 삼는다”(204). 기독교적 성찰 또한 스토아주의적 성찰과 다르다. 스토아주의적 성찰이 정념의 변화에 대한 이성의 통제를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견해가 올바른 것이었는지를 검증하는 것이었음에 비하여, 기독교적 성찰은 내게 떠오르는 생각은 과연 누구의 생각인가, 혹시 나의 영혼을 공격하려는 악마의 소행 아닐까 하는 식이다. 곧 스토아주의적 성찰은 생각의 대상 과거의 행동 - 에 대한 것이지만, 기독교적 성찰은 (현재의) 생각의 주체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성찰은 그 성찰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성찰 주체가 확신할 수 없으므로 그 자체로서 불완전하며, 이로부터 고백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자기에 대한 자기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말하기와 끊임없이 연결되어야하는 것이다(218). 곧 기독교의 고해 장치에는 영혼의 내면에 무한히 몰두해야 할 의무가 타인에게 자신의 내면을 말로 표출해야 한다는 의무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 자기 자신의 진실 말하기란 근본적으로 자신의 포기라는 목적에 종속된 것에 불과하다(221). 이는 자기통제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적 의지 행사의 조건 확립을 목적으로 삼았던 스토아주의적 양심성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170, 195).

 

[2020. 5. 20. 추기: 1974-75년 강의록 『비정상인들』의 2월 19일 강의(박정자 역, 206-208)에서 푸코는 고백은 9-11세기경 널리 퍼졌고, 서방 교회에서 고백이 의무화된 것은 대략 6세기경부터 아일랜드에서 고백성사를 통해 죄의 경중에 따라 보속을 주게 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강의가 이뤄지고 7-8년쯤 후에 쓰여졌을 이 『육체의 고백』에서 고백의 기원은 더 과거로 올라가 5세기 초 수도원에서 이미 행해지던 것이라고 쓰고 있다.]

 

여기까지가 제1장의 내용인데, 부록2를 먼저 읽고 2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부록2에서는 1 4절에서 다뤄진 성찰-고백(examination – confession), (‘고백고해라고 이상하게 번역된) exomologesis exagoruesis, “악행(wrong-doing)”진실 말하기(truth-telling) 등의 문제가 『안전, 영토, 인구』나 “Omnes et Singulatim” 등에서 다뤄진 사목권력과의 연결 속에서 논해지기 때문이다. 본문은 사목권력에 대해서 177쪽에서 살짝 언급만 한다. 양떼를 규합하고, 인도하고, 양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돌보고, 위험으로부터 구해주고, 양떼를 책임지는 목자의 형상(555-564)으로 표현되는 사목권력은 군주, 행정관, 가장, 귀족, 지배층, 교사가 행사하는 권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고, 인간을 지도하며, 인간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목권력은 기존권력과 달리, “개인의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통치한다(565-566). 양떼 전체를, 하지만 동시에 양 한마리 한마리를 돌보는 목자는 전체 공동체를 하나의 절대적 진실(↔오류; 이단)로 결합시켜야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마음 속 진실, 비밀,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이 숨기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죄를 알아야 한다. 이 권력관계에서 진실은 전체적으로 주입되면서도, 개인적으로 캐내진다. 이 진실에 대한 강요가 사제와 신자들의 관계를 구성한다(572). 진실에 대한 강요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이 사목권력은 고대 그리스에는 존재하지 않던 기독교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3. 동정의 기술: 자기에 관한 테크놀로지

이처럼 1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양심성찰과 책임지도가 4세기 이후 기독교 사목권력의 성찰-고백을 통해 변용된 것을 살펴봤다면, 2장에서 푸코는 기독교적 동정(virginity)이 고대 그리스의 금욕(continence)과는 어떻게 다르며, 그것이 어떠한 용도로 개발, 사용되어 왔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이제 문제는 쾌락을 추구하는 성적 행위의 금지, 절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동정이라는 실천이 갖고 있는 긍정적 성격의 부각이 중요해진 것이다. 3세기에 나온 키프리아누스, 테르툴리아누스, 메토디우스 등의 저작들에서 동정은 단지 악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태도로서, 자신의 영혼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악마에 대한 영적 투쟁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4세기에 들어오면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00: “자기와의 관계에 대한 반성적이고 열성적인 실천의 기술”],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02: 동정녀는 포위당한 도시국가처럼 사방에서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며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암브로시우스[277: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결혼과 달리 동정은 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안키라의 바실리우스[310-319: (영혼과 육체의) “접촉을 피하라”], 카시아누스[334-342: 악령(spirits)과의 영적 전투; 자기 자신에 대한 극기 훈련; 유혹은 타자의 의지의 결과, 승부가 결정되지 않은 투쟁, 분석이 필요한 주제] 등은 동정을 어떤 기술(art)로 정립하였다. 곧 동정을 세밀하게 조정된 생활방식, 독자적인 절차와 기술, 자기 자신과 맺는 일종의 관계유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266). 이 동정의 실천은 감각, 영상과 잔상의 효과, 사유의 활동과 같은 것을 아우르는 내적 인식과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타인의 권력과의 관계 속에존재하게 된다. 카시아누스는 이러한 자기에 관한 테크놀로지로서의 동정의 기술을 수도생활이 수반하는 (수음, 리비도, 육욕에 대한) 영적 투쟁과의 관련 속에서 정립하였다(360).  이 동정의 실천은 개인의 예속화(subjectivation / subjectification?)와 동시에 개인의 내면성의 객관화(objectification)를 표시하는 시선과의 관계 속에 들어가게되면서 육체와 영혼 모두를 관통하게 된다(320-1). 이제 주체화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절제가 아니라, 주체화가 자기의 무한한 객체화를 전제하고, 타자와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서 실행된다는 것이다(362-3). 이처럼 자기 자신의 진실을 찾고 말해야 하는 의무가 주체화를 핵심적으로 규정하게 된 것은 초기 기독교 수도생활을 통해서였다.

 

4. 성의 리비도화: 욕망하는 주체와 법적 주체의 동일화

마지막 3장에서 푸코는 시선을 세속 사회의 부부생활로 옮기면서, 리비도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론들을 중심으로 욕망하는 주체와 권리를 지닌 법적 주체가 어떻게 중첩하여 등장하였는지를 추적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결혼생활에 대해 제시된 규범들을 다루는 1, 2절 은 정말 지루하다. 요점은 동정만큼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결혼도 나름 가치를 갖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결혼이 (수도생활의 동정처럼) “육욕의 관리술로 다뤄진다는 것이다(402). 이제 결혼생활도 사목의 대상으로 편입된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부부 사이의 의무를 부채로 파악하면서 부부관계를 법적경제적 관계로 접근한다(405). 의무를 방기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고, 상대방이 육욕을 남용하는 죄를 짓게 하는 결과를 갖고 올지도 모른다. 이는 생식만을 결혼의 온당한 목적으로 생각했던 이전의 사고와는 다른 것이고(394-7), 제국의 행정과 교회의 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이뤄진 사목상의 변화가 반영된 것이다(370-373, 412).


마지막 절 3절에서 푸코는 리비도개념이 보여주는 것은 성행위의 통치가능성이라고 주장한다(495). ‘리비도개념은 펠라기우스파인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비판에서 등장하였다. 율리아누스에게는 죄(과도한 행위)가 악에 선행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악(리비도)이 죄(허용되지 않는 성행위)보다 선행한다(522). “한 덩어리의 경련현상”, “무의지적인 욕망의 형태”, “의지를 초월해서 우뚝 솟아오르는 것인 리비도는 명확한 육체적 결과를 야기하지만, 주체로 하여금 주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게 만드는 것이다(494-5, 501). 이제 육욕의 책임을 의지에게 돌릴 수 없다(504).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리비도 개념을 통해 (훗날 프로이트가 그랬듯) 주체 내부에 의지적인 것과 무의지적인 것 간의 분할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육욕을 주체의 실제적 구조 속으로 편입한다(501-3). 이 성적 욕망은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된 것의 결과이며, 성행위를 통해 원죄의 현재성이 끊임없이 전달된다(507). 따라서 리비도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담긴 죄의 현재성과 원죄를 연결하는 초역사적 굴레이다(508). 주체에 아로새겨진 육욕이라는 죄는 주체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으므로 이제 끊임없는 경계와 성찰-고백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푸코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작업을 이후 천 년 넘게 서구인의 성생활을 관장한 규범을 마련한 규범화 작업으로 보면서, 동시에 육욕을 법적 준거체계 속에 올려놓음으로써 욕망의 주체와 (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리의(법적) 주체를 하나로 생각하게 만든 일이라며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513-8). 이제 규범화된 결혼은 제도적신체적이면서, 법적성적인 것이 된다(519).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우리는 법적 주체에 중심을 둔 성윤리의 단계로 들어간다”(522). 부부 관계에서 두 가지 목적 생식과 상대편의 죄를 면하게 하는 방법이외의 모든 성행위는 허용할 수 없는 것이고, 그 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 것이다(523). 이에 따라 성행위의 이론적 위상이 변화한다. 고대의 성행위는 한 덩어리로 쾌락의 절정을 지향하는 행위혹은 몸의 경련이 수반되는 일체성으로 이해되었다. 반면, 기독교에서 이런 일체성은 욕망, 타락, 죄에 대한 일반 이론에 의해 분리된다. 생활규범, 자기 자신의 올바른 처신, 다른 삶에 대한 지도기술, 성찰의 테크닉, 고백의 방식들로 분리된 것이다. 그런데 이 분리된 요소들이 의무적 요소가 되어 새로운 일체성 - 욕망과 주체에 관한 문제 으로 재조합된다. 이로부터 성, 진실, 권리()가 더욱 팽팽하게 서로를 조이게 되는 일체적 관계가 오늘날 서구문화의 특징이라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5. 단상

푸코는 이 책을 포함한 말년의 작업에서 욕망하는 주체의 계보학을 구성하기 위하여 (내게는 넘사벽이었던) 고대 그리스, 로마와 초기 기독교 문헌들을 치밀하게 독해하였다. 15세기 이전의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쾌락의 활용』 이후 푸코의 작업들의 가치를 잘 몰랐었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대략 서로마 몰락(476 CE.)부터 동로마 몰락(1453 CE.)까지의 중세 역사도 모르는데, 그 전의 역사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먼 옛날 이야기일 뿐, 지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역사도 모르는데, 교부들의 기독교 문헌이라니카시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 등이 도대체 어떤 이들인지 몰라서 계속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읽다 보니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갈 듯도 싶었다. (이들에 관한 간단한 소개: http://m.cpbc.co.kr/paper/view.php?cid=678880&path=201704)


이 책을 왜 읽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몇십년만에 빛을 보았다는 푸코의 유작이라는 말에 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끝을 맺지 못하였으므로, 제대로 된 결론과 서론이 존재하지 않는 미완성 유고의 특성상 푸코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알지 않는 한, 이 책을 읽고 큰 의미를 깨닫거나 하는 일은 없을 듯 싶다. 다만 여기에서 푸코가 하는 이야기들은 그의 다른 작업의 여기저기에 파편처럼 흩어져 존재하고 있고, 그 파편들을 모아 푸코가 하는 이야기를 『성의 역사』라는 푸코의 연작 시리즈의 맥락 안에서 재구성하는 것은 의미가 큰 일일 것 같다. [관련 문헌: 1) “윤리학의 계보학에 대하여: 진행 중인 연구에 대한 개관드레퓌스라비노우,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서우석 역, 나남); 2) On the Government of the Living: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9-1980; 3) Wrong-Doing, Truth-Telling ] 이것이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해보고 싶은 푸코 공부 중 한 가지이다. 다른 하나는 니체와 푸코 말년의 작업들 간의 연관 및 차이에 관한 것이다. 죄와 부채, 이것이 『도덕의 계보』 제2논문의 주제인데, 니체의 글은 영감으로 가득차 있지만, 경험적 고증이나 사회제도 분석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면, 푸코의 이 책 『육체의 고백』은 같은 주제들이 역사적 맥락과 함께 등장한다. 또한 수도생활에서의 자기 의지 포기나, 무의지적인 리비도와 의지의 대립 같은 것은 니힐리즘에 대한 니체의 논의를 푸코가 자신의 방식으로 전유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당장은 할 여유도 능력도 없지만 나중을 위해 이렇게 글로 남겨둔다.


6. 번역에 관한 불만

불어를 모르는 나는 오역을 지적할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진 번역 때문에 책읽기가 힘들었던 부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오역 지적은 푸코 전공자의 몫이고, 내게는 주제 넘는 일이지만, 이 책의 구매자이자 상당히 정성을 들여 읽은 독자로서 넋두리는 좀 해야 하겠다.


(1) exomologesis exagoreusis (17, 22, 114, 140, 531, 536, 543, 550, 615)

내 생각에 이 책 번역의 가장 큰 문제는 exomologèse고해, exagorèse고백으로 옮긴 것이다. 일상적인 한국어 용법상 고백은 고해를 포함하는 단어이다. 죄는 고백하고 고해하지만, 마음, 사랑, 비밀은 고백하지, 고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해고백의 부분집합이다. 그런데 역자는 전혀 다른 지시 대상을 갖고 있는 exomologèse exagorèse고해고백으로 옮겨놨다. 150-151쪽에 나오는 "말로 표현된 것", "구두 진술", 곧 고백이 exagorèse이고, "태도로 표현된 것", "속죄를 나타내는 일련의 몸짓, 태도, 눈물, 겉옷, 외침의 소리"가 exomologèse이다.

 

“Exomologesis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manifestation)이다. 그것은 죄인이 죄인으로서 진실을 잊지 않고 드러내는 것(alethurgy)이다. 반면 exagoreusis는 진실을 잊지 않고 자신을 담론으로 드러내는 다른 방식이다”(On the Government of the Living, 12, p. 307). Exomologesis가 눈물, 제스쳐, 복장, 행위 등으로 참회와 속죄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exagoreusis는 자신의 죄를 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이것을 어떻게 고해고백으로 옮길 수 있나? 더군다나 confessioris (143)고백으로 옮겨놓아서, exagoreusis와 같이 쓰일 때는 문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On the Government of the Living  영어판처럼 원어를 그대로 놔두든가, 굳이 번역하려면 속죄(참회)행위고백으로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2020. 5. 20. 추기: 1974-75년 강의록 『비정상인들』의 2월 19일 강의는 참회(penance)와 고백(confession)을 구분하는데, 이 구분에 따르면, exomologesis가 "참회"이고, exagoreusis는 "고백"이다. 여기에다 쓸 말은 아니지만 박정자 번역도 웃기는 것이 앞에서는 penance를 "참회"(205)로 번역했다가 뒤에서는 "회개"(209), "고행"(212), "고백"(212), "처벌"(277)로 번역한다.]


(2) “서평의뢰서”(10, 11, 23)

서평의뢰서라는 황당한 번역어도 웃긴다. 같은 나남출판사에서 나온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역자서문(p. 11)은 이것을 당시 책 속에 끼워진 안내란으로 옮겨놓았다. 그저 책이 출판된 뒤 책장 사이에 끼어넣은 안내문인데, “서평의뢰서라니이 책의 옮긴이나 출판사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몰랐으니까 황당한 번역을 했겠지... 무책임하다.


(3) “우유” (80-81)

사람의 젖이 어떻게 우유? “이 이상하다면 모유라고 했어야지


(4) 동의(consensus)와 사용법(usus) (513-523)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욕망의 주체와 법적 주체의 중첩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논의인 것 같다. 이 개념들을 이해하려고 애써도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이것이 번역 문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옮긴이가 이전에 번역한 『감시와 처벌』은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오역이 더 늘어나는 웃기는 경우인데, 아마도 『육체의 고백』은 『감시와 처벌』만큼 잘 팔릴 책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번역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 확률은 낮다는 것에 안도해야 하는가? 출판사도 옮긴이도 반성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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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Coldplay - Everyday Life
콜드플레이 (Coldplay) 노래 / Parlophone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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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에 비해 영성이 좀더 도드라짐. 침잠과 상승이 적절하게 교대되어 듣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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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여름가을겨울 - 미니앨범 Reunion
봄여름가을겨울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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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구입한 CD... 다섯 곡밖에 없지만, 모두 주옥 같음. 전태관씨도 생각나고, 내 친구들도 생각난다. 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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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 이토록 곡해된 사상가가 일찍이 있었던가?
테리 이글턴 지음, 황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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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1세기 첫 1/5 시기의 끝자락, 201912월에 읽은 책이다. 처음 이 책을 펼 때에는 맑스의 이론에 관한 기초 점검 정도의 의도로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읽는 내내 저자의 논리 전개에 대한 경탄을 금치 못했다. 책을 덮으면서 이 경이로운 독서 경험을 조금이라도 글로 잡아두지 않으면 아까울 것 같아서 급히 서평을 남긴다.

 

어떤 책을 읽고 대단한 재미를 느끼는 데에는 몇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에 대한 나의 경탄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이번 독서가 아마도 다음의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1) 저자의 논리 전개에 동조되어 저자가 인용하는 문헌들까지 찾아가며 읽는 과정을 통해 기존의 지식을 교정, 확장, 충실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독서;

(2) 비교적 잘 안다고 생각하는 주제나 분야를 읽었을 때 이전에는 몰랐던 것, 생각하지 못 했던 것, 잘못 생각했던 것을 알게 해줌으로써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의 내가 더 이상 책을 처음 폈을 때의 내가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독서;

(3) 상이한 문제 설정에 기반하고 있는 이질적 이론틀 간의 교류와 접목 지점을 알려주고, 새로운 대립과 종합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하는 독서.

 

1.

어떤 책이든 기대보다 재미있으면 열심히 읽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글턴이 인용하는 문장들이 실려 있는 저작들을 다시 보았다. 오랫동안 먼지 쌓인 채 나의 책장 한 줄을 길게 차지하고 있던 맑스엥겔스 저작선들에 다시 손이 갔다. 그 중에는 이전에 읽었던 「헤겔법철학비판」, 『독일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수고』, 「공산당선언」, 「프랑스내전」, 『자본』, 『요강』, 「고타강령비판」 등도 있고, 알고 있지만 읽지 못한 「신성가족」, 『잉여가치학설사』 등도 있고, 이번에야 그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바그너에 관한 방주」나 인도, 중국에 관한 글, 또 다른 서한들도 있었다. 전에 읽었다고 다 기억나는 것도, 다 아는 것도 아니어서 이번의 독서는 복습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저자 이글턴의 의도는 맑스의 이론에 대한 통상적표준적 왜곡 비판에 정면대응하는 것이다. 책을 처음 잡았을 때 내 의도는 오랜만에 맑스에 대해 잘 정리한 글을 읽으면서 얼토당토 않은 왜곡에 대한 명확하고 쉬운 대응방법을 얻고자 하는 것쯤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의도는 독서를 통해 아주 잘 실현되었다. 이글턴은 국가간 갈등도 인종적성적 불평등과 더불어 계급착취와 동일한 중요성을 지닌다는 사회학자 기든스(43), “생산력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를 낳는다는 맑스주의 역사학자 코헨(55), “역사가 단지 혼돈과 요행과 우발과 우연의 혼잡한 무더기라고 보는니체와 푸코(108)의 주장을 비판하고,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맑스주의적 핵심을 무시, 과소평가, 왜곡하는 페미니즘, 식민지 민족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평화운동의 일부 조류들에 대해 가열찬 반비판을 전개한다(10). 맑스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지금 그가 맑스주의자든 아니든 상관 없이 쾌재를 부르게 하는 명확한 지적 전투성을 이글턴은 보여주고 있다.

 

2.

그런데 맑스에 대한 나의 이해에도 이글턴이 보기에는 왜곡인 요소들이 상당히 존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러면 얘기가 좀 달라지는데, 비로소 생각의 변화를 야기하는 독서가 된 것이다. 그의 맑스 해석에 나는 대체로 설득되고 말았다. 그 중 세 가지만 살펴보자.

 

(1) 공산주의 사회는 평등한 사회이다? (4, 특히 101-103)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맑스는 오히려 평등을 부르주아적 가치로, “문화와 문명 세계 전체에 대한 추상적인 부정으로 비판했다(101, 『경제학-철학수고』). 「공산당선언」에서 이야기한 바대로, “시민적 소유”, 곧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철폐된 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만인의 발전이 각자의 발전의 조건이 되고 각자의 발전이 만인의 발전의 조건이 된다.” 나의 이해의 방점은 시민적 소유의 철폐에 찍혀 있지만, 이글턴의 해석의 방점은 뒤에 찍혀 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철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양극화를 야기하는 근본적 요소의 철폐라는 의미에서 불평등을 줄일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완벽한 사회는 아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교통사고, 끔찍하게 못 쓴 소설, 치명적인 질투, 자만에 찬 야심, 감각 떨어지는 바지, 달랠 수 없는 슬픔이 있을 것이다. 화장실 청소 같은 일도 해야 할 것이다”(100). 이글턴의 맑스 해석이 재미있는데, “사람들을 평준화하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이다”(102). 이 말을 「고타강령비판」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뒷받침하는데, 출처를 밝혀놓지 않았다면, 그것은 평등이라는 주장을 역겨워하던 니체의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진정한 평등은 모두를 똑같이 대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두의 서로 다른 필요를 고르게 돌본다는 의미이며, 인간과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같은 잣대로 측정할 수는 없다”. 맑스가 평등을 주장했다면, 그것은 자기실현의 평등한 권리이며, “사회적 삶을 형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평등한 권리이다. “결국 맑스에게 평등은 차이를 위해 존재한다”(103)

 

(2) 맑스가 그린 공산주의 사회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9)

나는 맑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사회의 역사인 계급투쟁의 역사가 진정한 인류역사의 前史로 되어버린 공산주의 사회에는 계급도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글턴은 『자본』 제3권 제23장에서 맑스가 국가의 기능을 특정 계급을 위한 기능과 계급중립적 기능 – “모든 공동체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공동의 활동들을 관할하는 기능 을 구분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따라서 맑스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소멸하리라 희망했던 것은 부르주아의 공동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의 기능였을 뿐, 중앙 행정부라는 의미의 국가 기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맑스가 자본주의 국가를 시민사회로부터 떨어져나간, 곧 소외된 국가로서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 기제로 보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고하였던 것은 시민들의 자기지배”(185)였고, 이는 아나키즘적 이상과는 다른 중앙 행정부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토대-상부구조 모델은 맑스주의가 포기해야 할 낡은 도식이다? (6 141쪽 이후)

(20세기말 나름 알튀세르를 열심히 읽었고 좋아했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든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에 대한 논의를 도입한다고 해도 맑스주의는 경제결정론이라는 단순도식이 뒤집어 씌우는 혐의는 너무 치명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토대나 상부구조 이 둘 중 하나에 꼭 속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기관이 변함없이 그 둘 중 하나인 것도 아니다. “어떤 제도는 수요일에는 상부구조적이지만 금요일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144). 이글턴은 기본을 강조하면서도 본인만의 독특한 해석을 가미하여 맑스주의의 약점으로 치부되는 이 오래된 모델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에 따르면, 모델이란 원래 정태적이며 단순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맑스는 이 둘 간에 많은 소통의 흐름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141). 이것은 기본이다

 

이글턴의 독특한 해석이란 무엇인가? 1) “상부구조는 하나의 장소라기보다는 실천”(144)이며, 2) “토대는 정치적 가능성의 외부적 한계”(147)이다. 먼저, 상부구조의 존재이유는 토대가 착취를 내포하고 있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들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곧 상부구조가 필수적인 것은 착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상부구조를 말 그대로 건축적 구조의 윗부분이라는 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착취로 인한 갈등을 조절-억압-은폐-선별-봉합하는 실천적 기제로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조절이론에서 상정한 조절양식과 매우 유사한 이해이다. 그 다음으로, 이글턴은 토대도 건축물의 아랫부분이 아니라, 다른 모든 개혁들은 다 양보해도 해당 자본주의 체제에서 결코 바꿀 수 없는 것, 곧 사회주의적 압박에 대한 최종적 장애로 이해한다. 토대-상부구조의 기존 모델(에 대한 나 자신을 포함한 통상적 이해)이 구조적 개념화였다면, 이 재개념화는 행위중심적 이해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곧 토대와 상부구조를 모두 지배계급의 계급적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럼직하다.

 

3.

지금까지는 이글턴의 이 책이 어떻게 맑스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가다듬게 했는지와 관련된 부분을 썼다면, 이제부터는 이전까지 무관하거나 갈등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상이한 문제틀 간의 교류 지점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

 

이글턴은 맑스주의를 세계에 대한 비극적인 비전”(65, 80)으로 이해한다. 세계, 역사, 실천, 자신의 운명까지도두려움에 떨면서, 공포로 얼룩진 표정으로 긍정하는 것”, “최악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최악을 넘어설 수 있는 것”, 이것이 이글턴이 말하는 비극적 비전이다. 맑스주의를 비극적 비전으로 이해하는 것이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비극적 비전이란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곧 삶의 필수적 부분으로 고통마저 긍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사랑하는 것. 위에서 보았듯, 이글턴은 니체의 역사관을 부정하는 듯 싶지만, 이 책은 맑스의 저작에 대한 니체적 독해로 가득 차있다. 비극뿐만 아니라, 니체의 주요 주제들 - (109, 126, 129-138, 210-211), /권력(139, 192), 지식-권력(139), 도덕주의 비판(149), 기원의 트라우마(169), 생명(195), 원한/죄의식(204) 이 이글턴의 맑스 이해의 독창성을 구성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아주 짧지만, 권력(power)에 대한 맑스와 니체에 대한 비교가 나오는데 무척 인상적이다. 맑스는 권력을 사회적 환경에서 떼어내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다루는 물화를 거부하였지만, 이러한 접근은 니체와 프로이트가 취했던 접근 방식과는 반대이다. 맑스의 접근에도 분명 어떤 장점이 있겠지만, 그것은 권력의 어떤 주요한 특징을 간과하게 하였다. “권력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그저 지배 자체를 위한 지배에 탐닉하는 요소, 아무런 특정 목적도 없이 그저 힘이 있음을 과시하기를 즐기며 애초에 그것이 종사하기로 되어 있는 실질적 목표를 항상 초과하는 요소가 있다”(192).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맑스주의를 세계에 대한 비극적 비전으로 바라보는 이글턴은 맑스에게 바람직한 삶의 모델은 예술적 자기표현이라는 생각에 토대를 둔 것으로 본다(216). 이러한 파악 역시 니체적 렌즈를 통한 맑스 독해의 결과일 것이다.

 

이글턴은 내게 맑스와 니체에 대해 큰 화두를 던졌다. 니체를 읽을 때마다 1)평등, 민주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 2)변증법 기각, 3)사회제도 분석의 부재/불가능성, 4)집합적 실천 전망의 결여 등이 참 불편/불쾌했다. 그리고 이러한 불편함의 근저에는 내가 오랫동안 상대적 준거로 삼았던 맑스(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글턴의 이 책을 읽으면서, 맑스 역시 평등을 마냥 긍정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의 관심 대상였던 니체와 오래된 준거였던 맑스를 둘 다 모두 다시 보게 되었다. 주요 모순을 상정하지 않고 화해/해방이라는 전망 없이 실천하는 것, 이런 것이 변증법과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비극적 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정적으로나마 하게 한 것은 내가 이 책에 진 큰 빚이다. 화두란 충격이지만 당장에는 말로 잘 정리되지 않는 것이다. 무언가 성찰하게 하여 생산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면 좋겠다. 이번 달이 지나고 짬이 좀 나면 그의 최근작인 『유물론: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부터 좀 봐야할 것 같다. 기대된다. 

 

4.

분량이 얼마 되지 않지만, 매우 충실한 내용의 책이라 할 말들이 더 많다. 특히 맑스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연결시키는 부분들(96, 134, 150, 152)이 나오는데, 니체가 철천지 원수로 여겼던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가 맑스 안에서 모두 발견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여기서 이 주제에 대해 지금 더 다루기에는 버겁다.

 

역도 상당히 훌륭한 편이다. 이 좋은 책은 꼭 다시 출판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때에는 아래에 적어놓은 오역들도 수정된다면 더 좋겠다.

 

26: 마지막 행: “뿐이다. 아무것도사이 한 문장(All you will get is socialized scarcity.) 누락: “그 사회주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사회화된 결핍(희소성)밖에 없을 것이다.”  

30: 9: 집중된 국내 노동 분업 집약적 국제분업 (intensive international division of labor)

33: 17: 지령경제에 명령경제(command economy)

60: 8: 하지만 또한

64: 22: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가

72: 17: 잘 익은 고급 (fine)

76: 15: 더욱 많은 현재라고 현재가 더 이어진 것이라고

82: 11: 사실에 이 사실에

96: 14: 선이다! 좋은 것이다!

211: 23: 영원한 외재적(exte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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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31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 10월에 산 책인데 여적도 안
읽고 버티고 있네요...

솔직히 말해서 어디에 있는지도...

리뷰를 보고 나서 도전정신이 불
끈불끈합니다.

에로이카 2019-12-31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 저도 그리큰 기대를 갖고 읽지 않았는데 아주 좋았습니다. 올해 가기 전에 서평 다 쓰고 싶었는데 약속 시간 맞추느라 아직 미완입니다. 곧 완성할게요. 저도 이 책에 대한 레삭메냐님 서평을 보면 더 할 얘기가 생각날지 모르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