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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지역질서 - 제국을 넘어 공동체로
백영서 외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열 명의 필자에 의해 쓰여진 이 책은 동아시아 공간이 역사적으로 세 개의 제국적 질서에 의해 교체 지배되어 왔다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곧, 동아시아의 역사를 (1)중화제국의 華夷질서, (2)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 (3)냉전기 미제국의 아시아-태평양 질서가 교체되어 온 것으로 파악한다. 이 책의 기획의도는 일국사 서술을 넘어서 동아시아 전체를 그 대상으로 하되 그 제국중심의 시각이 아니라, 주변의 시각에서 동아시아의 제국질서의 역사적 전개를 파악함으로써, 탈중심화된 공동체로서 동아시아를 건설하겠다는 전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기획의도는 노무현 정권이 후기에 접어들면서 한미동맹강화론이 재등장함에 따라 동북아균형자론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이 시점에서 시의적절해 보인다.
각론으로 들어가서 좀 살펴보면, 정용화의 “주변에서 본 조공체제”와 김명섭의 “동아시아 냉전질서의 탄생”이 가장 주목할만하다. 정용화는 고려와 조선에게 조공관계는 ‘경제적’인 것이기 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는 시각을 취하면서, 동아시아국제관계에 사대교린정책을 통해 정권의 안보를 보장받는 동시에 스스로 小中華가 되고자 했던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조공관계를 “책봉을 전제로 맺어진 왕조간의 교류형식”이자, “동아시아 문명국가간의 소통양식”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말 조선은 이전까지의 조공체제에 잔존하는 동시에 ‘만국공법제’에 기반한 ‘조약체제’에도 편입된다. 그러나 조선은 조공체제와 조약체제의 충돌의 격류 속에 힘없이 몸을 맡기고 말았으며, (서구가 아닌) 일본의 주도로 조약체제가 조공체제를 대체하게 된다. 동아시아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동아시아 주변국의 눈으로 중심국을 보며, 그 주변국의 피지배층의 눈으로 지배질서를 바라본다는 “삼중의 주변의 눈”에 대한 강조는 특히 귀담아들을만 하다. 하지만 조선의 피지배층의 시각에서 본 서술이 이 글에서는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김명섭의 글은 미국의 설계 하에 어떻게 유럽의 식민지적 유제는 부정되었던 반면, (군사력이 아닌 자본으로 무장한) 일본 중심의 질서가 동아시아에서 온존하게 되었는 지를 다루고 있다. 정용화의 글에서만큼이나 여기서도 (공산주의 진영과의 냉전이라는) 정치적 요소가 강조된다. 그는 선진제국에 대한 열세의 만회라는 후진 제국들의 동기에 주목하는 동시에,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서양침략세력에 대한 동방의 방패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반인종주의적 정당화를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에 보았던 Geoffrey Barraclough의 An Introduction to Contemporary History에서도 지적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김명섭은 안중근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승리로 크게 기뻐했다는 (내게는 나름대로 충격적인) 사실로서 이 관점을 뒷받침한다 (271-72). 전쟁을 현상유지국가와 현상타파국가 간의 대결로 보는 코노에 후미마로의 주장 역시 인상적이었다. 태평양전쟁은 곧 脫亞入歐를 주창했으면서도 백인우월주의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던 일본이 아시아의 수장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현상타파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2차대전후,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지역중심으로 활용했고, 일본은 과거의 영일동맹 대신 미일동맹을 통한 국가발전을 도모했다. 미국이 동아시아지역에서 추구한 상호수혜적 교환체계는 일본을 ‘수장 기러기’로 하는, 이른바 ‘기러기 편대’[雁行] 모델로 발전했다” (294-5).
김경일의 글은 일본을 태평양 전쟁으로 이르게 한 과정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 세계체제 시각에 따르면, 현상유지국가와 현상타파국가 간의 갈등은 헤게모니 국가와 헤게모니 도전국 간의 갈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1930년대말까지 일본은 미국에 경제적으로는 의존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에 시달리던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1939년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일통상항해조약을 파기한다. 이에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를 ‘구질서’로 비난하고, 미국의 대일경제제재에 대항하여 원유를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노리게 된다. 유럽본토에서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들이 독일에게 밀리는 것을 목격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남방진출을 시도하게 된다. 김경일의 이러한 설명은 유럽과 동아시아 이 서로 다른 지역들에서 전개된 헤게모니 도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강진아, 박태균, 백지운의 글들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그 중 강진아의 글은, 기시모토 미오와 미야지마 히로시의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와의 연결 속에서, 그리고 이 책의 정용화의 글과의 긴장 속에서 읽으면 특히 재미있다. 강진아는 조선이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경제적으로는 조공무역체제로부터 별로 이익을 못 보았다고 주장한다. 또 “유럽과 일본이 각각 라틴아메리카의 은으로 연결된 세계경제체제, 일본 은으로 연결된 동아시아무역체제를 통해 중국의 선진상품에 중독되고 소비하면서 따라잡기형 발전을 준비해갔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47-8). 그녀에 따르면, “따라잡기형 발전이라는 면에서 조선과 일본은 모두 중국을 정점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 도자기, 면직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업에서도 일본이 시기적으로 한국에 뒤처져도 발전 폭이 훨씬 컸다” (61). 왜? 첫째, 일본은 은이라는 지불수단이 되는 고유상품을 1530-1750년대까지 2백여년간 동아시아 시장에 지속적으로 대량공급할 수 있었다. 조선은 이에 필적할만한 대표상품이 없었다. 인삼수출은 상대적으로 규모에 한계가 있었다 (57). 둘째, 일본은 자급화의 과정을 국가가 계획적이고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수입대체를 이룰 수 있었다 (62).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강진아가 조선의 국가는 왜 못 그랬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갑자기 일본의 비교대상을 유럽(62쪽)이나 라틴아메리카(58쪽)로 둔다는 점이다. 그러다 뜬금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공체제에 강하게 편입되어 있는 국가일수록 정치적 취약성 때문에 자립적인 따라잡기형 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의 역할은 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64).
강진아는 이 주장을 더 자신있게 할 수는 없었을까? 결국 조선이 일본에 따라잡히게 된 것은 일본에게는 있었고, 조선에는 없었던 것 (<1>‘은’이라는 천혜의 조건과 <2> 중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국가’)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를 따져보기 전에 이 주장이 좀더 설득력이 있으려면, 일본이 조선을 추월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곧 언제까지는 조선이 잘 살았는데, 언제부터는 일본이 앞섰다 하는 식으로… 이것이 증명이 되어야지, 그 이후에 그 사실에 대한 설명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증명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강진아의 그 사실에 대한 설명은 과연 옳은가도 의문이다. 또 일단 그 설명이 옳다 쳐도, 그것 외에 다른 설명요소들도 있을 수 있다. 강진아는 일본의 수입대체산업화를 마찬가지로 귀금속이 풍부했던 라틴아메리카와 비교하면서, 독립된 정치권력을 가졌던 일본이 그렇지 못했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수입대체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강진아는 16-19세기를 하나의 역사적 시간대로 다루지만, 그것이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메이지유신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더라도 19세기 초반 독립을 달성한 라틴아메리카에게는 단절적인 두 개의 시간대에 걸쳐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 시기 전체에 걸쳐 라틴아메리카는 독립적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만약 외세로부터의 독립이 중요했다면, 정치적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는 왜 일본과 같은 수입대체발전을 이루지 못했는가도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는 다른 답들이 존재할 수 있다. 스기하라 카오루는 라틴아메리카와 달리 아시아 나라들이 연쇄적으로 안행적 발전 (flying geese development)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을 역내 무역네트웍의 발달에서 찾고 있다. 또 내 생각에는 일본이 조선을 어느 시점에서 경제적으로 추월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일본이 두 세계체제의 접경지대, 곧 중국중심의 세계체제와 유럽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 사이의 interstitial location의 이점 때문인 것 같다. 은광 개발 기술이나, 도자기 기술은 조선에서 전해졌다. 또 의류 뿐만 아니라 화약, 무기류를 만드는 데에 필수적이었던 면포도 조선에서 수입되었다. 다른 한편 포르투갈로부터 전해받은 조총이 있었기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 세력은 일본을 통일할 수 있었고,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침략할 수 있었다. 일본의 통일은 국민경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명간 hybrid가 “은”과 결합해서 일본의 조선경제 추월을 가능하게 했고,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편입된 이후, 곧 핵심부의 지위에 올라설 수 있게 했던 것 아닐까?
괜찮은 책이긴 했는데, 여러명의 필자의 글이 실려 있는 편집서라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는 것 같다. 필자들 간의 의견조율과정을 거쳤다 해도, 통일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특히 이들이 얼마나 주변의 시각에 충실하였는 지는 미심쩍다. 그래도 이러한 연구성과들이 차곡차곡 쌓여, 역사학계 안팎에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면, FTA에, 독도에, 신사참배에, 일본군 성노예에, 탈북자문제에, 북미관계에, 동북3성에 바람잘날 없는 동아시아 공간에서 3중의 주변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되는 순간도 올 것이다. 그리고 이 3중적 주변의 목소리가 추구해야 할 바는 민족간 경쟁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의 평화공존일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책의 끝에서 이남주가 제시하고 있듯이, 국민국가 간 협력과 더불어, 국민국가 틀 자체의 극복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3중적 주변 중 세번째 주변, 곧 주변국의 피지배층도, 그러니까 남한의 좌파도,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건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덧붙임: 그러나 또 중심의 매개 없이 주변끼리 직접 소통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돌베개, 2006)이나, 이즈츠 카즈유키(井筒和幸) 감독의 영화 [박치기(パッチギ!)]를 보고 공감했던 주변부적 삶의 아우라(aura)들은 또 얼마나 섞이기 힘든 것인가? 또 남한은, 나는, 당신은,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미명 아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이웃을 이미 주변부화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