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성준 옮김 / 책세상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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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간선거가 끝났다. 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 총 열아홉 번 중 열여섯 번의 중간선거에서 대통령 소속 정당은 하원에서 최소 5석 이상의 감소를 보였다고 한다. 하원 의석이 감소하지 않았던 가장 최근의 예외가 2002년 조지 W.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라니, 벌써 20년 전이다. 이번 선거 역시 민주당이 하원에서 과반을 잃었으므로 예외는 아니었다(20221120일 현재 공화당은 과반인 218석을 확보하였고, 민주당은 212석으로 이전보다 9석 감소한 상태다). 그러나 상원에서는 과반을 유지하게 되었으므로 나름 선전했다’, “졌잘싸등의 평이 나온다. 여기에는 펜실베니아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민주당의 존 페터맨(John Fetterman)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그는 트럼프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러스트벨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펜실베니아의 색깔을 빨간 색에서 파란 색으로 바꿔놓았다. 그가 공화당의 붉은 물결(red wave)”, 트럼프 아들이 트위터로 바라마지 않았던 피목욕(bloodbath)”을 막아낸 것이다. 그의 상대는 트럼프의 후원을 받는 닥터 오즈(Dr. Oz)였는데, 그 역시 건강의학 토크쇼로 전국적 유명세를 누리는 셀럽 의사이다. 페터맨은 펜실베니아 부지사로 재임하면서 트럼프가 펜실베니아의 선거부정을 치졸하게 물고 늘어질 때도 물러서지 않고, 조사를 통해 발견한 부정투표 사례 네 건이 다 트럼프를 찍은 것임을 밝혀내어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시간당 15달러의 최저임금, 전국민건강보험 등을 공약으로 내세운 그는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이면서 샌더스가 자신의 지지자이기도 하다. 어쨌든 트럼프의 기세를 한풀꺾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공헌이 매우 크다. 공화당에서도 트럼프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듯한데, 과연 다음 미국 대선에서 또 그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현실이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는 미지수이지만, 작금의 미국 정치의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문을 접고 이 책을 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1. 진보적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블록의 성장과 몰락, 그리고 그 이후

헤게모니란 지배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사회 전체의 상식으로 상정함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과정을 가리키는 그람시의 개념이다. ... 헤게모니 블록이란 지배계급이 모은 이질적인 사회 세력들의 연합이며, 지배계급은 이 연합을 통해 자신의 리더십을 확고히 한다.”(16)

 

이 얇은 책에서 프레이저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분배와 인정에 관한 자신의 이론과 접속시켜 현재 미국의 정치 현실을 진단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자본주의 헤게모니는 사회 경제구조(분배)와 사회적 지위 질서(인정)의 두 측면에서 옳음(right)과 정의(justice)를 결합하였는데, 이 분배와 인정의 연계(nexus)가 그 헤게모니의 규범적 토대를 구성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이러한 일반적 이론화는 현재적 비판대상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전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는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전체적 세계관이 아니라, 여러 인정 프로젝트들과 조응할 수 있는 하나의 정치-경제 프로젝트라는 점을 깨달았으며, 최소한 미국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진보주의와 견고하게 연결되어왔다는 사실이 비로소 보였다고 한다(56-57). 진보적 신자유주의약탈적이고 금권정치적인 경제 프로그램을 자유주의적·능력주의적 인정 정치와 결합했다”(18).

 

프레이저는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등이 고안하고 레이건이 실행한 신자유주의 우파 근본주의버전은 뉴딜적 사고방식과 신좌파를 계승한 사회운동이 상식에 영향을 미치는 미국에서는 헤게모니가 될 수 없었지만, 클린턴을 비롯한 신민주당(New Democrats)은 미국 경제의 골드만삭스화와 진보적인 인정 정치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을 구성해냈다고 주장한다. 성소수자 인권, 탈인종주의,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환경주의 등에 동원되는 능력주의’, ‘다양성’, ‘역량강화등의 담론이 바로 진보적 인정의 핵심적 정서를 이루는데, 이제 이 해방을 향한 비경제적 열망들이 경제적 양극화를 초래하는 신자유주의를 쌔끈하게 포장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진보적 신자유주의라는 위험한 동맹에 카리스마와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을 제공하였다(20-22). 


이들은 자신의 선배격인 뉴딜 연합의 기존 헤게모니 블록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을 구성한다. 곧 오랫동안 민주당을 지지하였던 조직 노동자, 이민자, 흑인, 거대 산업자본 일부를 대신해서 기업가, 은행주, 교외 거주자, ‘상징 노동자’, 신사회운동, 라틴계 미국인, 청년 세대들을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빌 클린턴은 다양성, 다문화주의, 여성인권을 외치면서 금융화(골드만삭스화)의 길을 성공적으로 개척하였다(22-23).

 

진보적 신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분배)와 진보적 인정을 결합했다면, 옆집에서는 반동적 신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분배)와 반동적 인정 정치를 결합하면서, 종족민족주의, 반이민, 친기독교적인 지위질서의 수호를 내세웠다. 따라서 양자의 차이는 분배가 아니라 인정의 차원에 있었다”(24). 클린턴이 NAFTA, 중국의 WTO 가입, 글래스스티걸법의 폐지로 본격화된 은행의 탈규제 등으로 세계화와 금융화를 선도하는 동안 미국의 오랜 산업도시들은 역풍을 제대로 맞게 되었고, 이들은 지지정당을 상실한 채 방치되었다.

 

트럼프의 등장 이전까지 겉보기에만 치열한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립은 사실 두 버전의 신자유주의의 대립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다문화주의와 종족 민족주의(ethnonationalism) 사이에서는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을 고르든 금융화와 탈산업화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었다. ... 노동자계급과 중산계급의 생활수준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세력은 없었다”(26).

 

기성정치 세력은 세계화로 일자리를 잃고 금융화로 빚에 시달리다 집을 압류당한 이 노동자 가족들을 외면하였다. 2015~16년의 대통령선거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상실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오른쪽에서는 트럼프가, 왼쪽에서는 샌더스가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상식의 개요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샌더스와 트럼프 모두 신자유주의적 분배 정치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둘의 인정 정치는 선명하게 달랐다. 샌더스가 보편주의와 평등주의에 방점을 찍어 조작된 경제(rigged economy)’를 고발했다면, 트럼프는 똑같은 문구를 채택하면서도 거기에 민족주의적이고 보호주의적인 색채를 입혔다”(30). 

배제의 언어와 포용의 언어가 부딪혔다. 프레이저는 이들이 대변하고자 한 집단, 또는 상상적 헤게모니 블록을 각각 반동적 포퓰리즘진보적 표퓰리즘으로 명명한다(32). 이제 프레이저답게 깔끔한 인정(포용/배제)과 분배(신자유주의/포퓰리즘)의 양축을 가진 2X2 테이블이 완성된다.

 

분배

인정

신자유주의

포퓰리즘

포용

진보적 신자유주의

(클린턴, 오바마, 펠로시?)

진보적 포퓰리즘

(샌더스, 페터맨?)

배제

반동적 신자유주의

(레이건, 부시 부자)

초반동적 신자유주의

(대통령 트럼프)                    

 

 

반동적 포퓰리즘

(후보 트럼프)


샌더스의 도전은 민주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함으로써 좌절되었지만,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을 가뿐히 제압함으로써,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명확히 했다. 당선 후 트럼프는 후보 시절 공약했던 포퓰리즘적 분배 정치를 폐기하면서 한층 더 강력해지고 사악해진 반동적 인정 정치에 몰두하기 시작했다”(33). 반동적 포퓰리즘이 초반동적 신자유주의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어디 트럼프뿐이겠는가? 그의 뒤를 따랐던 브라질의 보우소나루도, 또 나름의 개성(?)을 지닌 채 지정학적 특수성을 활용하면서 위기 심화와 국격 저하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의 굥도 마찬가지임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프레이저는 그람시를 인용하며 트럼프의 반동적 포퓰리즘은 진보적 신자유주의헤게모니의 붕괴 후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시대의 병적 증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39).

 

2. 반트럼프 진영에 대한 우려와 대항 헤게모니의 형성

프레이저는 친클린턴 진영이 바라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복원은 결코 대안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는 인정에 의한 분배의 잠식 the eclipse of redistribution by recognition”(55)에 지나지 않는다. 반트럼프 진영에서는 인종과 계급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사고하는 좌파의 낡은 경향이 등장하고 있는데, 프레이저는 이에 대해 크게 우려한다. 실용적으로 생각하면 먼저 하나에 집중하려는 경향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전에 해온 방식대로 분배를 포기하고 인정을 택할 경우, 이는 다시 트럼프를 만들어냈던 조건들을 다시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더 위험한 새로운 트럼프들의 등장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곧 반인종주의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LGBTQ+, 환경운동 등도 다양성, 능력주의, 역량강화(empowerment) 등 신자유주의와 선택적 친화성을 가진 수사들을 동원하면서 분배 문제를 뒷전으로 미루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는 해방적 외양을 부여하고, 트럼프 진영에는 저 라떼나 홀짝거리면서 잘난 척하는 것들에 대한 적대심만을 높이는 역할을 할 뿐이다(20-22, 41-42, 64).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프레이저는 우선 두 가지 분리 전략을 제시한다. 첫째, 취약한 여성, 이민자, 유색인종을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 다양성, 역량강화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시켜야 하고, 둘째, 경제적으로 버림받은 러스트 벨트, 남부, 농촌 노동계급의 트럼프 지지자들을 인종주의와 종족민족주의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경원시하는 이 두 지지자 그룹이 함께 지지할 수 있는 대항 헤게모니 블록을 건설해야 한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조작된 경제(rigged economy)’의 다른 곳에 위치한 희생자들이고, 이들이 함께 해야만 이 근원적 현실, 곧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금융화의 자본주의의 현재 형태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40, 46-48).

 

프레이저는 이 새로운 대항 헤게모니 블록의 유력한 후보로 진보적 포퓰리즘을 꼽고 있는데, 진보적 포퓰리즘이 새로운 상식을 구성하는 대항 헤게모니가 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에서의 계급과 지위 문제가 공유하는 공통의 뿌리를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적 포퓰리즘 블록은 금융 자본주의 체제를 하나의 통합된 사회 전체로 이해하면서 여성과 이민자, 유색인, 성소수자가 경험하고 있는 피해를 우익 포퓰리즘에 가까운 노동계급이 경험하고 있는 피해와 연결해야만 한다(46)”.

 

3. 자본주의의 새로운 지도 그리기

이 힘든 작업을 해내는 것이 정치인들이나 현장 활동가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올해 75세인 프레이저는 맑스와 폴라니를 결합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밑그림을 제시한다. 그녀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단지 경제체제가 아니라 그보다 큰 제도화된 사회질서(48)

 

제도화된 사회질서로서 현행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에 불가결한 비경제적 배경 조건의 집합까지도 포괄한다. 이를테면 경제적 생산에 필요한 임금 노동의 공급을 보장해주는 무임금의 사회적 재생산노동도 그러한 조건의 집합에 포함된다. 축적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질서와 예측 가능성, 인프라를 공급하는 공적 권력의 조직된 장치들(, 치안, 규제기관, 운영 역량)도 그 예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삶을 시탱할 수 있는 거주 가능한 지구를 비롯해 재화 생산에 필요한 필수적인 에너지와 원재료를 제공하는 자연과 우리의 신진대사 간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상대적으로 지속 가능한 조직들도 마찬가지다”(48).

 

여기에서 간략히 요약된 그녀의 아이디어는 올해(2022) 출판된 카니발 자본주의로 결실을 맺은 것 같다.

 

4. 이론적 전유

프레이저는 논쟁과 대화를 즐기는 올해 75(1947년생)의 철학자이다. 푸코, 하버마스, 버틀러, 호네트 등 쟁쟁한 철학자들을 비판하고, 그 대상이 살아 있는 경우는 함께 논쟁하면서, 그 비판과 논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이론적 자양분을 자기화하면서 새로운 작업들의 내실을 다져나간다. 이 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책은 단지 오늘날의 미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정치평론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한 99%를 위한 페미니즘: 선언(2019), 멀리는 호네트와의 논쟁, 분배냐, 인정이냐(2003)와 후속 논쟁을 정리한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서(2008)의 현재적 귀결이자, 카니발 자본주의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책이다. 카니발 자본주의의 내용이 자못 궁금하다.

 

5. 다시 미국 정치 얘기...

며칠 전 뉴스는 미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였던 낸시 펠로시가 의장직에서 내려오면서 차기 지도부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한 연설을 보도하였다. “이제 새로운 세대를 위한 시간이 왔다.”




2007년 하원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여성의 유리천장 깨기신화의 주인공이면서 트럼프 탄핵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그녀가 기꺼이 자리를 비켜준 새로운 세대는 누가 될까? 미국 대통령 개인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낮은 반면, 페터맨 같은 민주당 내 좌익 또는 민주당을 선거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의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 같다. 이들이 프레이저가 바라는 진보적 포퓰리즘의 흐름에 기여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하겠다.

 

그러다가 한국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한숨만 나온다. 21세기 들어서 미국의 좌파가 부러웠던 적은 처음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전에도 미국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이들의 헌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도 유의미한 저항의 흐름을 꿈꾸고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불평등 감소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미력하나마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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