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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세트 - 전3권 ㅣ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넘은 1996년 말과 1997년 초의 5개월여간, 나의 지하철 퇴근길을 루이스 캐롤 풍의 기묘한 지적 판타지로 가득 채워주었던 <괴델, 에셔, 바흐>.(내가 읽었던 책은 영문판 원서였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후에 출판된 국문판은 번역에 문제가 많다고 들었다.) 지금, 이 777페이지짜리 대저작의 10년 짜리 먼지를 닦아 내서는, 만지작 거리고 여기저기 펴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호프스태터가 친절하고 재치있는 문체로 세 번 쯤 꼬아서 철학과 수학과 컴퓨터 과학과 예술의 핵심을 꼬치처럼 관통시킨 '영원한 황금 실'의 뫼비우스적 트위스트를, 나는 충만한 경외감으로 바라보게 된다. 진중권씨 스스로도 고백했지만, <미학 오디세이>는 이 위대한 <괴델, 에셔, 바흐>의 대위법적 구성에 영향받은 바 크다. 괴델, 에셔, 바흐가 고스란히 등장하고, <괴델, 에셔, 바흐>에서는 그리 비중있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마그리트가 또 하나의 중요한 중심축인 것도 <괴델, 에셔, 바흐>의 영향으로 보인다. 아킬레스와 거북의 장난스럽지만 심오한 대화가 플라톤과 아리스의 교훈적인 만담으로 변용된 것은 물론이고.
그러니까 <미학 오디세이>는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일종의 '창조적 리바이벌'이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동명의 아서 클라크의 SF 소설을 가지고 그랬던 것처럼, <미학 오디세이>는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를 원료로 했지만 장르와 주제와 느낌이 현저히 색다른 진중권식 <괴델, 에셔, 바흐>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 중 하나인 <괴델, 에셔, 바흐>의 독창성을 뛰어 넘기에는 힘이 부친다고 하더라도, <미학 오디세이>는 나름 장점이 많다. 일단 컬러풀한 그림이 많고 문체도 쉬운 편이어서 빠르게 읽힌다. 미학 전공 유학파의 내공에 진중권 특유의 꽉 찬 논리가 더해져서 미학 역사의 얼개가 탄탄하게 엮여 드러난다. 곳곳에 진중권식 개그가 스케르초 악장처럼 독자의 긴장을 이완시켜서 사변적이고 지루해지기 쉬운 미학 이론들의 뇌피질 안착을 돕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아, 개인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의 만담은 70년대 고춘자-장소팔 필이 물씬 풍기는 것이 적잖이 썰렁하긴 했지만 말이다.
<미학 오디세이>가 <괴델, 에셔, 바흐>와 가장 밑바탕에서('후경 분열의 법칙'에 따르자면 '이념의 층위'에서)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은 '숭고'다. 숭고는, 저자를 인용하면, "인간은 알지 못하게 되어 있는 미"다. 그런데, 미를 인간이 알고 있던가?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미 그 자체도 인간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이 강하게 든다. "미란? 미적 지각의 대상. 미적 지각은? 미에 대한 지각! 예술이란? 예술계가 자격을 부여한 대상. 예술계는? 예술에 자격을 부여하는 세계" <괴델, 에셔, 바흐>에서 호프스태터가 강조한 것도 이런 '이상한 고리'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에셔의 판화 <폭포>, 바흐의 <무한 상승 카논> 등과 같이, 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느 새 출발지점으로 돌아오고 마는 기이한 고리. <괴델, 에셔, 바흐>에서는 이런 '이상한 고리'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의 불가해성을 은유하고 <미학 오디세이>에서는 미의 불가해성을 은유한다. 둘 모두 뫼비우스적 비틀림을 적용한 피드백이 궁극의 진리라고 소곤댄다. 컴퓨터 과학자 호프스태터는 정중하게, 미학-철학자 진중권은 다소 불온하게. 그런 측면에서 어찌보면 <미학 오디세이>의 숭고함이 <괴델, 에셔, 바흐>의 그것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매력적이다. 어차피 숭고할 바에는 번듯하고 깔끔하게 숭고한 것보다는 삐딱하고 기괴하게 숭고한 쪽이 더 멋지쟎은가? 그래서인지 저자는 <미학 오디세이> 3권을, 다소 말쑥한 에셔나 마그리트류의 초현실이 아닌, 피라네시의 깊고 음울한 초현실로 두텁게 회칠한다. 그리고는 숭고하고 영원한 황금실이 무참히 파괴해 버리고 남은 미의 원형의 폐허로 냉소적이며 얄궂은 미소를 머금고 회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