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향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호마윤 에르사디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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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있다.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군대였다는 이 남자의 시선은 황량한 거리에서 누군가를 찾는다. 그는 자신의 사후(死後)를 마무리해줄 ‘인간적인 만남’을 위해서 길을 나섰다. 부탁을 들어줄 법도 한 앳된 얼굴의 군인,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것 같은 젊은 신학도는 죽음의 언급을 단호하게 외면한다. 그는 일몰까지 자신을 도와 줄 적임자를 물색하며 흙, 돌, 먼지로 뒤덮인 사막 이곳저곳을 누비며 돌아다닌다.

 

다행히 마지막에 만난 단 한사람, 자연사 박물관의 박제사로 일하는 노인만이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 때를 맞추어 당도한 신(神)의 메신저와 같은 노인은 한때 자살의 문턱을 넘을 뻔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노인은 에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여 바디와 긴 이야기를 나눈다. 신(神)과의 대화는 영성을 넘어 인간을 통하여 드러난다. 노인의 이야기는 세상을 주관하는 절대자가 삶에 지친 인간에게 건내는 나지막한 말씀처럼 공명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 펼쳐지는 삶의 작은 기쁨들은 사소하지만 포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밤이 오자 바디는 수면제를 먹고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 안에 눕는다. 조금은 긴장된 그의 얼굴 위로 푸른 달빛이 비추더니, 어느새 폭우가 쏟아진다. 어둠 사이 번갯불이 바디의 얼굴을 드러낸다.

 

페르시아 문화의 소산인 <체리향기>는 유럽 작가주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플롯을 파괴한다. 짜여진 플롯에 따르다 보면 현실세계나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데 제약을 받기 때문에, 문제의 발생에서 해결로 이어지는 네러티브를 단호히 거부한다. 감독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화려한 세트, 각종 특수 효과, 컴퓨터 그래픽 사용을 일체 배제하고, 삶에 내재한 본질을 능숙하게 꺼내 놓는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철저하게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다. 자동차에 고정된 두 대의 카메라로 사물과 풍경을 응시하는 이 영화의 프레임 구성은 대부분 클로즈업된 바디의 얼굴과 주변에 퍼지는 먼지가 다일뿐이다.

 

영화 종반부에서는 암전을 이용하여 프레임의 서사를 모두 허구로 만들어버린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선에서 영화 작업을 하고 있는 감독의 메타적 접근이다. 또한 카메라가 고정된 롱 테이크 촬영은 지루한 현실을 고스란히 영상에 담아 놓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촬영 내내 랜드로버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기를 바랬고, 바디가 보는 그대로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바디의 자살하려는 의도를 끝까지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관객은 바디가 되어 스스로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제공받는다. 그런 면에서 <체리향기>는 관객이 채워야 할 여백이 많은 영화다. 이것이 키아로스타미식 영화적 화법의 특징으로 해답과 결론을 드러내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감독이 해야 할 일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 뿐”이라고 언급하였듯이 관객이 각자의 답을 찾아서 헤매기를 원한다. 그는 프랑스와 트뤼포의 말을 인용해 “관객에게 메시지를 주고 싶으면 차라리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라”고 주장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을 북돋워주는 것으로 만족하다고 역설한다.

 

<체리향기>는 1994년 <올리브 나무 사이로> 이후 3년여의 공백기 만에 발표한 작품이며, 키아로스타미가 직접 제작까지 맡은 첫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이란 정부의 출국금지 조치 상태였다가 97년 깐느 영화제 폐막 삼일 전에야 출품되어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서구 평론가들의 말처럼, 서정이 불가능할 것 같은 지역에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시네마 베리떼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여전히 새로운 경지에서 ‘마음의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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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갈 때마다 가장 고역스러운 짐이 책이다.

버리고 버려도 줄지 않고 쌓여가는 서가를 보면서 이번에 또 어떻게 이삿짐을 싸야할지 고민이다.

모든 아날로그적 취향을 포기해도 책의 물성에 대한 집착은 버리지 못할 것 같다.

지적 허영의 표상이라 할지라도 풀 먹여 다린 듯 정갈한 책장을 넘길 때의 짜릿함을 포기할 수 없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축복받은 1월이다.

다음날 아침을 두려워하지 않고 늦은 밤까지 책장을 넘기면서... 행.복.하.다.

이래서 버트란트 러셀은 게으름을 찬양했나?

행복은 삶의 과정에서 가끔 만나는 순간의 축복.

신간을 살피면서 또 다시 책과 연애한다.

 

 

 

 

 

 

 

 

 

 

 

 

 

 

 

 

 

 

 

 

 

 

 

 

 

 

 

 

 

『시인을 체포하라-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12.

현재가 침묵을 요구할 때, 역사는 현실을 읽는 나침반이 되어 준다. 이 책은 - 프랑스 혁명 직전이었던 - 18세기 중엽, 14인 체포 사건을 문화사가 로버트 단턴이 연구한 결과물이다. 당시 “시인을 체포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경찰의 14명을 추출하여 바스티유 감옥에 감금한다. 시를 추적하는 일에 공권력을 동원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그 시대의 의사 소통망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단초를 제공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절반 넘는 시대의 소통방식을 알아볼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류신 지음, 민음사, 2013. 12.

‘수유 너머’에서 권용선 선생님의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해석 강론에 참여한 기억이 새롭다. 모자이크식 글쓰기,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며 산책하는 벤야민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여행을 다녀와 바라보는 서울이 낯설다. 정권과 패러다임이 바뀌자 풍경이 낯설어진다. 거대한 이야기 속에 숨겨진 사소한 이미지들이 망각되고 있다. 시야 밖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사 속에서 우리는 새롭게 변주되는 풍부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서울을 벤야민 식으로 읽어내는 류신 교수의 생각이 궁금하다. 언젠가 2013년 서울에 응답을 요청할 우리에게 ‘미리 온’ 책이 아닐까?

 

『지구를 구하는 창조의 현장에서- 세계 환경운동의 구루 레스터 브라운 자서전』레스터 브라운 지음, 이종욱 옮김, 도요새, 2013. 12.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확장하는 것이다. 한 세대의 생명을 벗어나고 우주적으로 공간을 확장하여 문제를 바라보면 좌우 경계 없는 공통의 화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지구를 구하는 창조의 현장에서』는 근면한 삶을 살았던 세계 환경 운동의 구루 레스터 브라운의 자전적인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책이다. 앎과 삶을 일치하는 온전한 삶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파트리시아 카스, 내 목소리의 그늘- 샹송의 디바, 파트리시아 카스의 자전적 에세이』파트리시아 카스 지음, 백선희 옮김, 뮤진트리, 2013. 12.

샹송을 취향으로 즐기지 않은 사람도 파트리시아 카스을 알고 그녀의 노래를 흘려 듣는다. 파트리시아 카스는 대중적이면서도 살아있는 전설의 디바다. 이 책은 “에디트 피아프의 탁월한 계승자”인 그녀가 자신의 육성으로 이야기하는 듯 자신의 삶을 기술한 에세이다. 예술이 예술가의 삶을 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 유용한 책이다. 고뇌하는 예술가의 떨림 가득한 삶을 들여다보고 나면 관능과 매혹을 동반한 그녀의 노래가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다이어트의 배신- 왜 뚱뚱한 사람이 더 오래 사는가』아힘 페터스 지음, 이덕임 옮김, 에코리브르, 2013. 12.

이 책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다이어트 담론에 대항한다. 다이어트는 한번 시작하면 영원히 해야 하는 정신적 압박을 가져온다.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불안이 비만을 만들고, 다이어트는 또 다른 스트레스로 정신과 몸을 망가지게 한다. 비만을 질병으로 바라보기 전에 메타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비만을 대하는 사회적 시선과 방식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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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일베 현상을 통한 2013년 한국 현실에 대한 재고(再考) 『일베의 사상』

 

박가분 지음, 오월의 봄, 2013. 11.

 

청춘이 꽃피고 시대적 아픔이 오롯이 내 아픔이 되었던 오래 전 어느 봄날, 공지영의 소설을 만났다. 이십대의 작가는 시대의 정서와 경험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소설로 옮겼다. 오랜 시간 그녀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했다. 신념을 다지는 쉬운 소설, 어렵지 않은 소설이 존중되지 못했던 날들, 그녀는 세월을 잉태한 채, 여전히 소설가로 남아 있다. 그 시절에는 잠시 핫하게 떠오르다 사라지는 작가 중 한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공지영은 여전히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며 꾸준히 작품을 써왔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작품보다 사적 삶이,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는 SNS가 주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접하기 쉽고 이해가 빠른 ‘한국’ ‘현대’ 소설에 누가, 얼마나 경의를 표하겠는가 싶지만, 그녀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면서도 저평가 되는 작가 중 한사람이다. “공지영은 그냥 싫다.”는 독자를 꽤 여럿 알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냥”이다. 오랫동안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고, ‘그녀’가 싫다고 한다. 이유 없이 그냥 싫다면, 싫어하는 자신의 무의식을 살펴볼 일이다.

 

공지영의 신간『높고 푸른 사다리』를 오래 기다렸다. 한겨레에 연재되는 소설을 띄엄띄엄 읽으며, (2013년을 누구보다 처참한 심정으로 지냈을 것 같은) 공지영 작가를 살게 하는 힘이 이 소설일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다. 신문에서 보는 그녀의 글이 한권의 근사한 책으로 묶이자마자 사전 예약까지 해두었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의 중단 없이 읽혔다. 작가와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도대체, 왜?” 2012 대선을 거치면서 매 순간 자답하게 하는 자문이었다. 채널이 막힌 2013년 터널을 지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3년은 각자의 생각은 자유라는 방식으로, 세상의 부도덕과 몰상식을 보수화라는 용어로 정당화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317470

 

  

지난 5월 ‘최화정의 파워타임’에 출연한 아이돌 그룹 시크릿 전효성의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는 언급이 네티즌의 도마 위에 올랐다. 버스커버스커의 김형태는 “허니지 형들 차트 종범”이라고 트윗하면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그들에 대한 거센 비난은 불매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때까지는 왜 ‘민주화’나 ‘종범’이라는 단어가 네티즌의 집중 포화를 받아야 하는 까닭을 몰랐다. (민주화 : =ㅁㅈㅎ, 일베 게시글에 대한 반대, 비추천을 의미, 더 나아가 진보적인 주장에 공감하거나 보수파나 자신들의 정치적 농담을 용인하지 못하는 게시판의 분위기를 지칭하는 말. 모든 부정적인 뉘앙스를 함축하는 말(22쪽), 종범 : 야구선수 이종범의 이름. 존재감이 없다는 듯으로 사용한다(25쪽)). 모르기 때문에 분노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단지 세대 간의 차이이거나,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잠깐의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일베’가 공공연하게 유통되고, 일베 유저에 새롭게 자리하고 있는 우파의 논리, 젊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 넘길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때를 맞춰 출판된 책 『일베의 사상』은 이 현상이 우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믿었던 나와 같은 ‘기성’ 세대에게 충분히 읽을 가치가 필요한 책이다. 저자 박.가.분. 그가 보는 세계는 분명 나와 다르다. 이십대 청춘 박가분은 일베의 용법으로 그들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현상을 객관적으로 기술한다. 암중모색. 대안 없어 보이는 2013년 한국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희망을 품고 치열하게 진단과 분석을 제시한다. 서로 다른 생각이 하나의 단어를 다른 의미로 소비하고 있다면,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일베의 역사, 문화, 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 2013년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일베에서 가공되는 정치적 담론을 기성 논객 몇몇의 근엄한 꾸짖음으로 야단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는 끝낼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영향력이 막대할 뿐 아니라,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디시인사이드에서 출발한 일간베스트, 일베는 콘텐츠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포지션을 바꾸기 시작한다. 엘리트와 대중의 경계를 넘나든다. 진보 좌파와 짝을 이루던 민족주의는 이제 애국보수와 짝 지워진다. 인터넷의 민주화는 일베의 형제애가 된다. “일베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서로에게 말을 놓으며 툭툭 내뱉는 것이 원칙이다. 일베 유저들은 이런 문화에서 집에 온 것 같은 친근감을 느낀다. 일베는 서로에 대해 수고로운 감정노동을 하지 않아도, 인터넷의 진보주의자들처럼 서로에 대해 가식적인 가면을 쓰지 않아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편한 공간이다(125쪽).” 공격적이고 우상 파괴적인 스타일, 감성과 논리, 정치적. 학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을 뒤섞어가며, 상대의 허점을 명쾌하게 논파하는(77쪽) 강준만식 글쓰기와 인터넷 글쓰기는 형식에 공통점이 있다.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와 짤방은 같은 방식으로 유통된다.

 

일베의 용어는 낯설고 여성, 전라도, 게이에 대한 비하의 의미를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의외로 일베의 모태인 디시인사이드가 친노 성향의 진보적 색채가 강했던 사이트다. “효순/미선 추모 시위, 노무현 대통령 당선, 탄핵 반대시위에 이르기까지 주된 정치적 국면 때마다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의 여론을 표출하는 진앙지(97-98쪽)였지만, 이제 김대중 대통령의 입관식에서 오열하는 이희호 여사 사진을 홍어 택배 왔다는 짤방으로 유통하면서 특정 지역과 인물을 비하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한 사람의 신상을 털어서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은 희화화하고, 남성연대 성재기 대표의 죽음은 추모로 이어진다.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일베문화가 사회의 배설물이 되어 일베유저를 익명의 괴물로 만들어버린다.

 

이십대에게 희망이 있는가?

 

아쉽게도 『일베의 사상』은 극우에서 양산되는 일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에서 멈춘다. 기성세대와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 때문으로 극으로 돌아섰다고 보는 것은 기계적 해석처럼 보인다. 경쟁과 배제 속에서 성장한 아픈 청춘, 저성장 사회의 88만원 세대, 저출산 고령화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갈 이들의 무기가 인터넷 공간인지 모르겠다. 핸드폰, 골방, 일용할 양식만 주어지면 무노동 무임금도 좋고, 루저가 되는 것도 두렵지 않을 수 있다. 시대와 삶을 성찰하는 것이 고루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어려운 사태에 내몰려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무거운 책임감만 주어진 것이 기성세대들의 탓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젊음에는 젊음의 값어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꼰대의 방식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 박가분의 신간을 읽어야 하는 것은 - 일베에서 양산하는 깨알 같은 재미와 웃음에는 웃어넘길 수 없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경멸, 정치 성향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고 공감하며 힐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바르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은 위로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위로만으로 희망을 현실에 가져올 수는 없다.

 

『일베의 사상』이 다행스러운 것은 저자가 이십대 새파란 청춘이라는 점이다. 나에게 공지영이 있었듯이, 젊은 그대들에게는 박가분 같이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평론가가 있다. 누구보다 일베 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있고, 경멸이 아닌 이해로 싸움을 걸 줄 아는 유머를 잃지 않은 청춘의 평론가다. 서로를 비하하는 발언으로 정의를 세울 수는 없다. 냉소는 환멸을 양산할 뿐이다. 기성의 언어가 꼰대의 설교로 들리고, (언어는 사유의 집이라서) 소통할 수 없는 언어 세계가 존재한다면 우리가 기대할 것은 청춘 간의 소통과 싸움이 만들고 지켜가는 사회적 책무와 투쟁이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기대하지 않은 영화였다. 발칙한 젊은 잉여들의 1년간 유럽 여행기. 그 정도의 정보가 다였다. 파리, 로마, 이스탄불, 런던을 간접 여행하려는 가벼운 마음으로 객석 한자리를 차지했다. 러닝타임 초반 십분까지 잉여로 보였던 그들은 나머지 1시간 40분 여분 동안 잉여 개념을 확실하게 전복시켰다. 자칭 잉여인간 호재, 하비, 현학, 휘가 80만원과 카메라 한 대로 시작한 유럽의 히치하이킹은 이십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진정한 유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각자 특별했지만, 그 특별함을 생산적으로 만들어가는 상보적 관계와 호재의 리더십은 생산과 놀이를 분리하지 않는 니체적 삶을 제대로 보여준다. 미래는 막막하지만, 일상과 단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주사위 놀이를 시작하는 그들을 보면서 ‘일베’와 대척점에 있는 놀이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상이 관념적이라면 놀이는 삶이다. 이렇게 양극단의 삶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놀라운 잉여들은『일베의 사상』을 읽으며 막혔던 심장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5298

 

 

 앞으로의 국가는 당위와 명분으로 정보를 통제하고 사람을 억압하는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유지될 수 없다.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가 제각각일지라도 약자는 국가에 기대어 삶을 살아간다. 국가를 통해서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면 대안적 공간을 만들고 연결망을 구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혐오, 환멸로 억압된 욕망을 표출하는 것으로 우리가 살고 싶은 자유로운 삶을 만들어갈 수 없다. 국가가 약자의 삶을 위태롭게 할 때, 대항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존재기반이 위태로운 소수자들이다. 열등감을 열등감으로 대하는 한 사회적 약자는 벼랑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자기 연민을 덜어내고, 상처투성이의 유머를 거두고 냉혹한 현실을 차가운 이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베의 성장 과정을 충실히 분석해야 한다. 때가 되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거두어야 한다. 『일베의 사상』은 일베 현상의 원인을 알고 대응책을 만들기 위한 필독 입문서에 이름을 올릴만한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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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 크라트]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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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0.1% 슈퍼 클래스를 통해서 본 국가 없는 자본주의 현실과 전망

 

『플루토크라트-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열린책들, 2013. 10.

 

진정한 진보와 플루토크라트

 

『플루토크라트』는 전 세계 최상층에 속하는 0.1%의 신흥 갑부에 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세계 경제의 변화 양상을 파악한다. 언론인이자 산업전문가인 저자 크리스티아 프릴랜드는 시장 경제와 플르토크라트의 성장을 파악하기 위해서 정치적 · 경제적 접근 방식을 함께 차용한다. 글로벌 슈퍼 엘리트의 일상을 아는 것이 - 진보와 빈곤이 결합한 - “거대한 스핑크스”의 모습을 보는 일이라면 독자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진정한 진보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될 것이다.

 

자선 & 불평등, affluent(부유한) & rich(부자)

 

우리가 『플루토크라트』에 접근하면서 살펴보아야 할 몇 가지 용어가 있다. 플루토크라트(Plutocrat)는 부를 의미하는 희랍어 Pluto와 권력 kratos의 합성어로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자선이다. 유의해야 할 점은 그들이 자선을 베푼다고 해서 불평등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자산 보유 상위 0.1%는 “고귀하고 따뜻한 사람”을 전제할 수 있지만, 불평등에 대한 개선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계급 투쟁 없이 현 상태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affluent(부유한)’와 ‘rich(부자)’ 역시 이미지에서 큰 차이가 있다. 부자라는 말은 은연중에 물질적인 풍족함과 속물근성을 함의한다. 문화, 교육, 사회관계 자본을 함의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자는 부자라는 호칭을 싫어한다.

 

“해외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을 똑같이 할 수 있다.”

 

세계인의 삶이 평균 곡선의 정상 분포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중간에 높고 완만하게 분포한 사람들은 평등한 세계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을 전반적으로 공유한다. 스마트 월드는 누구나 원하는 음악과 영화를 다운 받아 보고, 정보에 손쉽게 접근하며, 저가의 질 좋은 상품을 손쉽고 값싸게 구매한다. 산업 혁명과 근대화 이후 다수의 사람들이 정치적, 법적, 형식적 평등을 누리게 되었고, 기술혁명과 근대화는 전 시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경제 성장을 이끌어 내면서 사회 계약 자체를 바꿔 놓았다.

 

국적 없는 슈퍼 클래스, 그들만의 리그

 

아무리 우리의 일상이 표준화되었다고 해도, 계급 진입 장벽을 간과할 수는 없다. 여전히 뛰어 넘을 수 없는 계급 특수성이 존재한다. 그들에게는 남보다 빠른 도전,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금 주어진다. 국가에 대한 생각을 기준으로 과거와 오늘날 부자의 성격이 확연히 달라진다. 과거의 부자와 오늘의 부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경계가 국가관이다. 신흥 갑부에게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 삼성 회장 이건희와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가지는 공통분모 보다 빌게이츠와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많은 유사성을 갖는다. 그들은 더 이상 과거의 부자가 아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토대로 유희를 즐기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슈퍼 엘리트는 노력과 성공을 기폭제로 자신이 누리는 지위의 부가가치를 높여간다. 발명을 통해서 부를 창출하고, 명문대학의 높은 장벽을 넘어 서며, 사회 각계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일을 한다. 부, 권력, 성공은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마라톤에서 땀으로 얻어진다. 성공한 이들에게 삶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이고, 시차 적응의 과정이다. 일주일에 나흘 밤을 집을 떠나 잠을 자는 신분을 상징하는 배지를 단 자본의 고아들(93쪽), 날아다니는 계급이며 아이디어 귀족(113쪽)이다.

 

플루토크라트의 또 하나의 공통된 특징은 비즈니스와 자선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세계주의적 관점에서 빈곤 문제와 가난한 나라를 염려하고, 자신들이 단지 이기적인 목표만을 쫒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97쪽). 해외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자국의 동포들을 위해 동시에 기부를 하고자 하는 이들의 이중 초점은 오늘날 플루토크라트들의 다양한 노력들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124쪽).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비즈니스와 자선 사업을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미국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도 삼성경제연구소의 자료가 국가에서 내놓은 자료 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는 중론이 형성되어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과거 국가가 해야 하는 일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재정과 정보를 가지고 국가의 정책 방향을 결정한다. 보건, 교육, 공공 기관 매수, 심지어 지배 이데올로기와 담론 형성까지 플루토크라트의 지배를 받는다. 세율을 높여야 한다는 워렌 버핏의 주장은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설정해주는 것이다.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전쟁을 도발한 쪽은 나의 계급, 즉 부자 계급이며, 우리는 승리를 거두고 있다.(131쪽에서 재인용)”는 버핏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복지와 자선을 통해서 그가 지키고 싶은 것은 부자 계급의 권력이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입법자”

 

물화된 권력을 갖지 못했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창조적 그룹이 있다. 공학자, 경제학자, 물리학자, 시인을 포함하는 지식인 계급이다. 슈퍼갑부는 슈퍼스타, 엘리트 변호사, 요리 슈퍼스타, 패션 디자이너 훌륭한 바리스타와 기수에게 지불해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다. 슈퍼스타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서 규모의 경제를 갖는 것과 슈퍼엘리트를 위하 고가 전략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은 프리미엄을 극대화하면서 가장 높이 올라간다. 슈퍼스타는 세계화와 기술 혁명으로 글로벌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슈퍼스타의 성공은 슈퍼갑부의 지갑을 늘려줬고, 동료들도 큰 파이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시네마토그라프와 함께 글로벌 슈퍼스타로 등극한 찰리 채플린, 컴퓨터 괴짜들의 성공, 최고의 승리자 자리를 금융가들이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슈퍼스타다. 모든 사람에게 슈퍼스타가 될 수 있는 자격은 허락되었으나, 실제로는 이미 정상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승자독식 구조를 취하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은 자는 샴페인을 맛볼 자격이 없다.”

 

신흥 시장에서 일어나는 혁명에 잘 적응한 사람은 경제적 프리미엄을 얻는다. “적절한 기술과 인맥,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충분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혁명의 파도타기가 쉽고 흥미롭다(244쪽). 기술 혁신을 둘러싼 비즈니스 경쟁의 승자들은 성공을 자신의 능력으로 귀인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감은 성공의 필요충분이 될 수 없다. 자신감은 “적절한 능력, 올바른 태도, 적절한 사회적 지위”와 결합되었을 때 최상의 결과를 선취할 수 있다. 누구에게 부가 돌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역할은 정부의 몫이고,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플루토크라트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에 대하여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비참함에 무관심하고,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에 유감과 분노를 느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보다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더욱 극심하고, 죽음의 슬픔이 더욱 클 것이라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애덤 스미스, 『도덕론』

 

18세기 애덤 스미스의 글은 현대인의 삶을 설명하는데 인용되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수십억을 버는 연예인, 수백억 자산가, 스포츠 스타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낼 때가 더러 있다. 드라마 한편으로 수십억을 버는 젊은 연예인이 사적 삶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강한 동정, 수백억 자산가가 집보다 호텔에서 더 많은 밤을 보내거나 형제의 난을 일으키면 평범한 사람만 못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며 위로 받기도 한다. 명문대학에 들어가도 연구실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염려하는 것에 대하여 남다른 혜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우리는 여전히 경제적인 윤택한 삶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진보의 의미를 재고하며

 

『플루토크라트』는 산업혁명 이후 미국, 유럽, 중국, 개발 도상국가를 넘나들며 시간과 공간을 종회무진 확장해가지만, 방대한 자료를 통해서 하나의 주제로 관통하는 힘은 약하다. 저자가 그동안 경제 전문지에 기고했던 글이 하나의 책으로 엮이면서 나타나는 필연적 핸디캡으로 추측된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부자들에 관한 이야기’나 부자들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가 아니라, 플루토크라트의 삶을 통한 자본주의의 현실과 전망이라면, 현상에 대한 문화 기술을 넘어 서서 고민을 공유하고 키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플루토크라트들이 공존을 통해서 함께 생존을 모색할 수 있게 만들고 싶다면 베네치아 귀족의 사례를 짧게 언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책을 읽는 내내 ‘강도 귀족들’의 삶이 그다지 새롭지 않다. 다만 새롭지 않다는 것을 당연하게 인정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서 고민할 뿐이다. 이 사태를 당연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수용하고 용인한 실체가 바로 세계와 내 지역의 양극화를 허용하는 전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고민하게 된다. (진보를 발전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오인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연을 첨가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진보의 의미를 재고(再考)하는 일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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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니체적 관점에서 프로이트를 바로 보기 『우상의 추락』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 지음, 전혜영 옮김, 2013. 10. 글항아리

 

자신의 젊은 날을 추억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잊혀지지 않는 열등감의 화인(火印)일수도 있고, 가장 아름다운 한 시절의 유적(遺蹟)일 수도 있다. 스무 살, 내게 주어진 시공간은 낯선 설레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기들과 함께 읽기 시작했던 철세(『철학에세이』), 껍데기(『껍데기를 벗고서』)로 시작했던 학습 모임은 세 계절을 보내고 겨울방학이 되자 마르크스, 포이에르 바흐 원전으로 넘어 가기 시작했다. 동기들은 어느새 사회과학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데도 나는 여전히 문학의 세계에 머물면서 공지영의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강석경의 『숲속의 방』,『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김남주 시인의 시에 빠져 있었다. 학습 모임에 들고 갈 발제문을 작성해야 하는데, 낱낱의 글자만 읽고 있을 쁜 텍스트가 함의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소모임에서 발제문을 읽고 발표했을 때 모임에 나를 추천한 선배 얼굴에 맺히는 당혹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추운 겨울에도 얼굴이 후끈거렸다. 지적 허영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수치심은 낮은 자존감으로 나타났다. 한학기 내내 먼지 가득한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서 사회과학만을 읽었던 것 같다. 대학에 다니는 오빠의 책을 훔쳐보는 초등학생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시간들이다.

 

그날 이후 Marx는 이십대의 내 시간 안에 머물며 영혼을 건드렸고, 삼십대 초반 수년 동안 공부한 정신분석 모임은 Freud를 통해 내 안에 빙산을 이루고 있는 무의식을 성찰하게 했다. Freud에서 Jung으로 넘어가고, 다시 Adler나 Erikson으로 이어지는 상담심리를 통해서 남의 상처가 아닌 내 상처를 먼저 들여다보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한다. 성찰하고 언어화하는 순간 반은 치유받는다는 믿음이 내게 있다. 언어화된 상처는 이미 상처가 아니다. 그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내 시공간의 지평을 넓혀주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늙지 않고 성장하는 것, “소유하는 소비가 아니라 경험하는 소비”(선대인 선생님의 말씀)를 했던 지난 시간이 만들어준 선물이다. 지금 나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자 위로를 주는 친구는 Nietzsche다. 니체는 내 삶을 긍정하고 긍정하게 무한 변주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 주었다. 이들의 어깨에서 올라타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다.

 

미셸 옹프레의 『우상의 추락』은 내가 보낸 젊은 날들을 회상하게 하는 서사에서 비롯되었다. 방대한 자료에서 주장의 근거를 찾아내는 성실함도 놀랍지만, Freud와의 인연을 자신의 성장에서 끌어내는 문학적 필력 또한 대단하다. 그 또한 프로이트처럼 사적 경험에서 출발한 운명적 만남이 프로이트를 우상에서 추락하는 과정으로 나아갔음을 독자에게 고백한다. 저술을 하게 된 이유를 밝힘으로써 방대한 분량의 저서임에도 부담스럽지 않게 시작할 수 있는 시작점을 만들어 준다. “그 당시 헌책방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책이 세 권 있었는데, 바로 니체의 『적그리스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프로이트의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7쪽)”라는 저자는 무지를 자각하고 지식에 열정을 쏟아야 하는 자신의 숙명을 자각한다. 기독교가 더 이상 숙명이 아니고, 자본주의는 인류가 넘어야 할 지평이며, 도덕성과 무관한 성욕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은 우상을 전설로 기억하지 않고, 친구로 만든다. 그에게 “니체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고, 그 마음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변함이 없다.” 친구는 친구를 비판할 수 있고, 친구를 따라가고, 때론 뛰어 넘으면서 우정을 나눈다. 우상을 박제된 영웅으로 가슴에 새기기를 거부하는 사람만이 가장 완전한 형태의 사랑과 존경, ‘우정’을 나눌 수 있다. 그런 관계일 때 비판은 설득력을 갖는다. 프로이트를 비판하기 위해서 미셸 옹프레는 정신분석학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엽서 열장을 제시한다.

 

1.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혼자서 발견했다.

2. 말실수, 갑자기 떠오른 단어, 망각된 고유명사, 어떤 대상을 왜곡하는 것은 자신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정신병리학적 현상이다.

3. 꿈은 해석이 가능하다.

4. 정신분석학은 임상 징후를 관찰하여 객관적으로 분석한 과학이다.

5. 실질적인 치료와 환자의 정신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환자를 치료하고 정신병리학이 진단한 병을 낫게 해주는 방법을 발견했다.

6. 정신분석을 통해 억압된 기제를 의식화함으로써 병적 징후를 없앨 수 있다.

7.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난다.

8. 정신분석의 거부는 그 주체에게 신경증이 있다는 단서이다.

9.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해방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10. 계몽주의 철학의 난해한 비평적 이성이 지속되는 상황을 구체화하였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프로이트 이론은 철저히 그 개인의 사적 경험에 바탕을 둔, 개인적인 삶이 반영된 것임을 증명하려고 한다. 프로이트의 삶, 사상, 치료에 의문을 제기하며 출발한 책이다. 처음부터 주장을 직구로 던져서 독자로 하여금 길잡이의 수고로움을 덜어준다.. 프로이트 자신이 경험한 개별 사례들을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사료 속에서 찾아내고, “선악의 경지를 넘어 니체의 관점에서” 프로이트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가 제시하는 반론의 엽서는 다음과 같다.

 

1. 프로이트는 수많은 책 - 특히 쇼펜하우어와 니체 철학 - 을 정독하여 무의식에 대한 가설을 제기하였다.

2. 정신병리학의 증상을 리비도에 의한 욕망의 억제로만 분석할 수 없다.

3. 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꿈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리비도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적용하여 구체적인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4. 정신분석학은 문학에 적용된 심리학과 관계가 깊다.

5. 분석에 의지한 테라피 효과는 마법에 가까운 효과에 의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 욕망의 의식화로 병을 치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7.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8. 마법에 대한 생각을 거부한다고 해서 자신의 운명을 마법사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9. 해방이라는 이름 아래 정신분석학은 심리주의가 말하는 금기 사항들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10. 역사적으로 계몽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에 이성주의에 입각한 철학을 부정한 새로운 형태의 철학, 이른바 반(反)철학을 내세웠다.

 

누구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자유롭게 연구하고 성과를 만들 수는 없다. 각자 고민하는 문제가 씨앗이 되어 발아할 수 있는 토양을 만나서 싹을 틔운다. 프로이트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 배다른 형 필립과 어머니의 관계에 대한 의심, 형에 대한 강한 질투심, 처제와의 오랜 세월 한집에서의 거주, ‘일요일의 아이’라고 부르며 아꼈던 딸 소피의 죽음, 세 딸과의 관계가 정신분석학을 집대성하는 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세대를 잇는 이성 간이 성교만을 정상적으로 바라보고 그 외 모든 것들을 변태성욕으로 보았던 프로이트는 좋은 아내, 엄마가 여성의 역할이는 믿음 또한 도처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신의 잠정적인 주장,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욕망이 하는 말, 소원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 완성”에 프로이트가 집착했다는 것을 수용할 만하다. 미셸 옹프레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 독자라 할지라도 거의 칠백 쪽에 달하는 분량의 논증은 사료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과학 보다는 문학에 가까웠다는 점,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심리를 이해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워낙 자료를 치밀하게 추적하기 때문에 덤으로 얻을 수 있는 호기심 어린 에피소드들도 수록되어 있다. 존 휴스턴 감독이 <프로이트 : 그의 은밀한 열정>이라는 영화를 찍기로 계획하고 사르트르가 시나리오 작업에 동참했던 것, 안나 프로이트가 마리린 먼로와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 만났고, 먼로가 보유한 재산의 1/4와 죽고 난 후 지불될 저작권료가 안나 프로이트 재단 설립에 쓰였고, 지금까지도 런던에 있는 프로이트 재단의 계좌로 들어가 있다.(304쪽) 프로이트와 기독교를 병치하여 분석하는 것 또한 흥미롭다. “샤르코와 프로이트의 만남을 예수와 세례 요한의 만남(671쪽)”으로 비유하고, 프로이트 전기 작가를 “예수의 삶을 신화처럼 우상화시킨 기독교인들이 썼던 방법을 적용해 프로이트를 역사적인 모델로 만드는 데 일조”한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치료하는 의식은 말로 죄인들의 죄를 씻어주는 방식과 비슷하다. 말이라는 것은 일종의 내면을 드러내는 고백, 고해와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673쪽).” 기독교의 고해 성사와 프로이트 카우치에서의 내담자가 쏟아내는 고백을 같은 것으로 분석한다.

 

다만 “프로이트의 픽션”이라는 극단으로 밀어가기에는 정신분석학의 임상적 효과와 인류 역사에 끼친 공헌이 지대하다. 프로이트를 인정하거나 부정하거나 그를 통하지 않고 21세기 철학, 심리학, 정신병리학을 논할 수 없다. 적어도 중세 이후 금기였던 성(性)을 응시하고, 담론화하여 해방시키는데 프로이트가 획기적인 이론으로 정신분석학을 확립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담배가 몸의 일부나 다름없었던” 프로이트가 구강기에 머물러 있는 인격이었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개인적 서사에 대한 변명을 위해서 정신분석학이 필요했다고 추정할 근거도 없다. 미셸 옹프레 역시 프로이트를 사형대로 보내기 위해서 이 책을 저술하지 않았다. 그는 구시대의 철학 체계를 반박하는 일이 철학자를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 『우상의 추락』은 니체적 관점에서 저자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프로이트를 딛고 올라서려는 결연한 의지가 만들어낸 수작으로써, 인간 프로이트에 접근하고 싶은 독자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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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판적 책 읽기를 위한 훌륭한 텍스트
    from 二乙과 無生의 마음풍경 2013-12-15 00:13 
    이 책은 정신분석을 제대로 파고 들어갔다. <꿈의 해석>을 읽었던 삼십 몇 년 전으로 돌아가본다. 프로이트가 쓴 책이 워낙 유명세라서 읽어두면 살이 되고 피가 되리라는 충동적 읽기였다. 그러다가 2/3를 읽다 말았다. 어째서 이 책이 그토록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점점 자라나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어서였다. 우리에게 있던 <꿈의 해몽>보다 못하다는 판단이 들었는데, 해석이 동양의 풀이와는 너무 달라서였다.
 
 
비로그인 2013-11-18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고 강렬한 느낌을 주는 글입니다..
제가 쓴 우상의 추락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더불어숲 2013-11-1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고 감사합니다.
자극이 별로 없는 서재에 '흔적'이 남았으니, 더 분발해야겠어요.
흔적님 리뷰는 제게 늘 채찍입니다. 오늘은 당근??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