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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신간 도서 추천입니다.

하루에 이십 사계절이 있다는 속담은 이제 유럽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 봅ㄴ다.

꽃샘이라니...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에사롭지 않은 주말입니다.

서둘러 핀 꽃들... 쉬 떠나지 않길 바라며... 책과 창문을 번갈아 보게 되네요^^*


『투명사회Trarnzgesellschaft (2012년)』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3.

푸코가 강조한 ‘자기 배려 윤리’가 한동안 신자유주의 자기 계발의 의지로 오인되고 있다. 자기 의지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좀 더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타자의 가치와 윤리가 자연스럽게 강요된 것일 때가 많다. 마찬가지의 역설이 ‘투명 사회’와 ‘통제 사회’에도 나타난다. 정보화 사회에 들어서면서 세상은 좀 더 평등하고 투명했진 듯 보이지만, 곳곳에 설치된 CCTV와 정보 이용 흔적들은 개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효과적인 감시망에서 과연 참된 민주주의, 정보의 평등이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고민이 요구된다. 『투명사회』는 우리에게 『피로 사회』로 알려진 재독학자 한병철 교수님의 최근작으로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지침서가 될 것이다.

 

 

 『단속사회-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창비, 2014. 3. 10.  

엄기호의 책을 읽고 나면 저절로 리뷰가 쓰고 싶어진다. 실천하는 지식인 엄기호의 글에는 삶과 관념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상식으로 통용하는 현실 속에서 자동화되어버린 습관적 사고를 정지하게 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그의 글에 담겨 있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등을 통해서 알려진 엄기호의 신간은 앞으로도 계속 사서 읽고 리뷰를 쓸 예정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누구와 접속하고 소통해야 하는지, 주어진 아젠다에 어떻게 새롭게 접근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을 얻을 수 있다. 사회적 문제를 메타적으로 바라보는 놀라운 힘이 엄기호의 글에 있다.

 

 

『영화 읽어주는 인문학』 안용태 지음, 생각의길, 2014. 3.  

영화를 읽는 가장 답답한 태도는 시대를 지배하는 도덕 담론 안에 갇히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서 안전한 일상을 추구하는 생활인으로는 포섭할 수 없는 위험한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생각의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성찰을 길러내지 못한다면 영화는 무한반복을 거듭하는 같은 길을 반복하는 레일에 불과할 것이다.

팟캐스트 ‘영화와 함께 보는 인문학’의 저자 안용태는 스무 편의 영화를 통하여 낯선 자신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이터널 선샤인’, ‘라이프 오브 파이’, ‘어둠 속의 댄서’, ‘쇼생크 탈출’, ‘마이너리티 리포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타인의 살’, ‘아무르’, ‘눈먼 자들의 도시’, ‘설국열차’, ‘피에타’, ‘지구를 지켜라’, ‘사랑을 카피하다’, ‘공동경비구역’, ‘식스 센스’, ‘인셉션’, 뷰티풀 마인드‘, ’다크 나이트‘, ’바람이 분다‘, ’캐빈에 대하여‘ 총 스무 편의 영화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다른 ’자아‘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이 스무 편의 영화 중 한편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보았다. 이 영화들은 몇 편을 제외하면 대중적으로도 성공한 영화들이니 모두 무난하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나이를 속이는 나이』 패트리샤 코헨 지음, 권혁 옮김, 돋을새김, 2014. 3. 31.

나이에 대한 집착은 우리 사회 불평등의 일부다. 청춘에 대한 과도한 가치 부여는 노년에 대한 역차별을 불러일으킨다.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청담동 재벌녀로 분한 여배우 김정난의 말처럼 “세월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젊음은 그 어디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일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기세다. 아쉽게도 외모는 항상 내면에 앞서 평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소비의 규모를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저자는 ‘중년’을 하나의 발명품이라고 보고, 150년

  

『콜럼버스의 교환- 문명이 만든 질병, 질병이 만든 문명』 황상익 지음, 을유문화사, 2014. 3. 1.

책 제목을 보는 순간 오래전 읽었던 『총, 균, 쇠』가 떠올랐다. 유럽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면서, 유럽 가축사육에서 발생한 세균에 아메리카 원주민 절반 이상이 감염되었다. 아메리카 정복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야생동물을 사육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인류사와 질병의 역사는 이렇게 짝패를 이루며 하나의 역사를 써나갔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황상익 교수가 EBS에서 강연한 ‘역사 특강 : 질병과 인간, 의학과 문명’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질병의 역사이기도 하다. 질병과 과학, 세계사를 함께 살펴보는 의미 있는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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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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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하게 역사 읽기, 현재의 나침반 『시인을 체포하라』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12.

 

미시사학자 로버트 단턴의 18세기, 파리로의 초대는 시종일관 흥미진지하다. 예측불허의 상황이라든지, 반전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다. ‘시인 체포’라는 사건이 이미 일어난 지점에서, ‘왜’ 혁명을 선동하지 않은 자들을 향하여 노골적인 공권력이 행사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촘촘하게 분석해나가기 때문이다.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 2011)처럼 낭만적인 시대의 예술적 만남도 아니고, 리처드 커티스의 <어바웃 타임> (About Time, 2013)처럼 가상현실도 아니지만, 시종일관 독자를 붙잡는 힘이 이 책에 있다. 하나의 지점을 향하여 올곧게 나아가는 집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잠시 나선형으로 후퇴하면서, 권력이 언론을 장악하여 의제 설정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진실은 보도되지 않았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왜곡된다. 사적인 삶으로 침잠하는 순간, 정치는 우리의 삶의 전혀 무관한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2014년 한국은 공중파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서 ‘뉴스에 관심 두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지식인의 양심처럼 떠돌기 시작한다. 잠시의 움츠림은 힐링일 수도 있고, 패배자들 간의 다독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포복으로 숨을 죽인 가운데에서도 바른 삶,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소극적인 저항이 필요하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독서나 교양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재가 침묵을 요구할 때, 역사는 현실을 읽는 나침반이 되어 준다. 연대기 순으로 기록하는 편년체나 군주 중심으로 기술하는 기전체는 역사적 사실의 인과 관계를 드러내주기는 하지만, 역사를 움직이는 파도를 만들었던 민중의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서 역사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사건과 사건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변인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단순히 과거의 아니라, 현재로 호출되어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해야 하고, 새롭게 읽고 해석하는 관점과 문장력을 겸비한 사학자가 절실하게 필요한 까닭이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우고,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구전(口傳)되는 이야기의 힘은 놀랍다. 전(前)세대는 후(後)세대에게 이야기 방식으로 축적된 자산을 전수했다. 전달의 과정에서 이야기는 풍부해지고, 약간의 간극 속에서 의미는 심도가 깊어졌다. 여기에 기억력의 한계를 이겨내는 장치가 바로 음악이다. 시(詩)처럼 만들어진 이야기가 음악과 만나면 암송은 더 쉬워져서 더 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시를 강력하게 단속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을 체포하라』는 프랑스 혁명 직전인 18세기 중엽, 14인 체포 사건을 문화사가 로버트 단턴이 연구한 결과물이다. 당시 “시인을 체포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경찰의 14명을 추출하여 바스티유 감옥에 감금한다. 물론 14명은 대부분 법률가와 성직자였으나, 시를 유통한 민중의 절반 미만의 사람만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문맹률이 50%가 넘었음에도 어떻게 민중들은 정보를 유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기록보다는 기억과 암송으로 인류의 유산을 지켜왔던 시대가 훨씬 더 길었다.

 

시인(詩人)은 단독자일 수 없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투박한 구어에 시적 형태와 운율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내용 또한 단순한 분노의 표출에서 정치적 신념으로 깊어졌을 것이다. 파리 정부가 14인을 체포해서 처형했다고 해서 지은이를 색출해서 제거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는 불리는 과정에서 계속 변주되고 있었다. 이 사건은 “집단 창작의 한 사례였다. 최초의 시는 다른 여러 시와 합쳐지거나 그 속 포함되고 한데 어우러져, 시적 자극의 장을 만들어냈다.(18쪽)” 다만 당시 사람들은 떠도는 시(詩)의 의미를 알고 있었고, 자신의 분노, 신념, 소망을 슬쩍 시에 섞어 넣었을 것이다. 대중에 관한 다음의 묘사가 시를 쓴 ‘글쓴이’에 대한 정확한 지명이 될 것이다.

 

【대중이라는 분】(153쪽)

 

그것은 규정할 수 없는 하나의 합성체다. 어던 화가가 그 진정한 특색을 모두 갖춘 모습으로 대중이라는 분을 그려내고자 한다면, 그는 아마도 이렇게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농부의〕 긴 머리칼, 〔신사의〕레이스로 장식된 코트, 〔성직자의〕모자를 머리에 쓰고, 〔귀족의〕검을 차고, 〔노동자의〕짧은 망토를 입고, 〔귀족의〕빨간 힐을 신고, 손에는 〔의사의〕문장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장교의〕견장을 차고, 왼편 단춧구멍에는 십자가를 꽂고, 오른팔에는 〔수도사의〕망토를 들고 있다. 당신은 이분이 차림새만큼이나 멋진 이성적 판단을 할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셸 푸코(M. Foucault)와 위르겐 하버마스(J. Habermas)의 접점에서

 

모든 권력자는 여론이 형성하는 담론을 규제하기 위해서 언론을 장악하여 적극 활용했다. 물자체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발화하는 순간 사건이 만들어진다. 푸코는 여론을 권력과의 관계로, 하버마스는 합리적 의사소통 과정으로 파악한다. 푸코는 미시 권력이 어떻게 개인을 통제하고 관리하게 되었는지의 역사적 과정을 탐색하였다는 점에서 담론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데 큰 통찰을 제공한다. 니체 『도덕의 계보학』의 연구 방법을 차용한 푸코의 『지식의 계보학』은 시대를 지배하는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고고학자의 탐사처럼 치밀하게 파헤친다. 다만 수동적으로 형성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의 능동성을 간과하였다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푸코는 죽기 직전까지 『성의 역사 3』에서 미학적으로 삶을 형성하는 자기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하버마스는 합리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다. 근대적 기획이었던 계몽주의가 실패했다는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토론할 수 있는 인간의 수용 능력을 토대로 공론장 개념으로 이론을 정립한다. 이성적이고 비평적인 의사소통 잠재력과 이성이 하버마스 이론 체계의 핵심이다. 로버트 단턴은 푸코와 하버마스의 중간 지점에서 자신의 연구 방법을 설정한다.

 

푸코에 따르면 담론은 특정의 제도적이고 물질적인 실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재생산될 수 있다. 푸코의 담론이론은 담론이 순수한 언어 내적인 것도, 언어외적인 것도 아닌 의미생산체계로 보아 담론적인 것과 교육, 법제도, 감옥같은 비담론적인 것의 복합적인 관계에서 산출되는 효과를 사고할 수 있게 한다. 더 나아가 푸코의 관점은 담론을 자율적인 사회실천으로 보기 때문에 존재와 의식이라는 철학적 구분 속에서 사회적 의식을 사회적 존재의 반영 또는 표현으로 보는 관점과 대립된다. 푸코에 따르면 담론 실천은 일종의 독자적인 사회적 실천이기 때문에 비담론적 실천과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비담론적 실천은 담론구성체의 규칙성에 영향을 줌으로써 특정한 담론이 출현하게 되는 조건들에 관계하고 그것의 기능 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담론 형성과 대화를 통한 수용가능성은 의사소통 참여자의 참여적 태도로부터 규정된다. 객관주의적 의미의 관찰자의 시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버마스는 근대사회에서 공공영역의 발전을 화용론적 합의를 지향하는 탈억압적 의사소통 공간으로 규정하였다. 공공영역이란 "쟁점이 토론되고 의견이 형성되는 공공 토론의 장"이며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로버트 단턴은 그러한 공공영역의 출현이 18세기였다고 본다.

 

촘촘하게 역사 읽기

 

역사와 관련한 역설은 항상 존재한다. 국가가 역사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역사주의와 국가주의가 보수의 무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소치 올림픽에 출전한 김연아 선수를 겨냥해서 만들어진 “김연아 당신은 대한민국입니다.”는 개인의 삶을 국가로 환원하는 심각한 해프닝을 연출했다. 역사를 바로 읽는다는 것은 거대담론 속에 묻혀서 드러나지 않는 잔가지를 들추고 빈틈을 메워서 새로 쓰는 작업이다. 열린 해석과 가능한 상상을 통해서 역사는 이야기를 품고 무한대로 펼쳐질 수 있다. 푸코가 염려했듯이 의사소통과 관련한 역설도 존재한다. 올바르지 못한 정보가 사실처럼 유통되면서 ‘합리적인’ 의사소통 체계가 무너지는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다. 정보화, 세계화 속에서 우리가 지금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시인을 체포하라』 는 그 역설에 대한 고민을 제공한다.

 

우리는 정보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닌 ‘정보기술의 발전과 확산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결국 어떤 정보화 사회로 나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의 차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보사회가 가져오는 편익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동시에 더욱 민주적이고 더욱 인간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메커니즘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최근 정보사회에 따른 새로운 움직임들은 희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노동자 정보화 사업단이 발족하여, 정보통신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을 추진하고 있으며 통신이용자와 노동자의 연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정보사회에서 ‘기계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불평등의 구조에 대한 도전은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연대를 통해서 현재의 정보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시를 추적하는 일에 공권력을 동원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그 시대의 의사 소통망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단초를 제공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절반 넘는 시대의 소통방식을 알아볼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단선적이지 않았을 인과 관계를 그려내는 일, 사건의 원인과 영향, 우연과 필연 사이의 결정 인자일 수도 있는 사건을 밝혀내는 연구를 통해서 현대 사회 의사소통의 문제점과 대안을 탐색하는 계기를 마련한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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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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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탈주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류신, 민음사, 2014. 1.

 

<응답하라 1994>는 hot하고 cool한 1994년 서울을 현재 시점으로 호명하였고, 케이블 방영이었음에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서울에 출처를 두지 않고, 이방인으로 서울에 진입한 이들의 시점과 카메라 뷰포인트를 일치시켜 낯선 서울의 일상을 추억에서 현재로 불러오는데 성공했다. 정주민에게 포착되지 않던 사물과 사건은 이방인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서울과 드라마 상황을 중첩하면서 각각의 서울을 구성했다. 시청자 각자의 체험과 동떨어져 있는 시공간을 재구성한 것에 불과했다면, 그러한 반응을 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신간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으면서 서울과의 개인적인 접점을 생각했다. 섬세하지 못했지만, 풍부한 느낌으로 기억되는 시절이었다. 지방 출신인 나의 사소한 어투와 취향이 서울 친구들 사이에서 얘깃거리가 될 만큼 그 시절 나는 서울의 타자였다. 호남선 열차를 타고 처음 가보았던 영등포의 밤과 새벽, 잠실 주공 아파트의 산책로였던 석촌 호수에 롯데월드가 들어서면서 주변의 변화되는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서울 역사의 일부다. 늘어선 쇼 윈도우 속에서 서울은 반짝 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삼설 코엑스 쇼핑몰은 그 자체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이해할 수 있는 범례였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저자 류신은 소설가 박태원에 의해 탄생한 ‘구보’와 벤야민의 산책자적 시선을 차용하여 2013년 서울을 산책한다. 객관적인 사실에 의존하기 보다는 저자가 경험한 서울 속에서 여전히 차고 넘치는 자본주의 속성을 섬세하게 호출한다. 구보와 벤야민을 향한 헌정과도 같은 이 책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벤야민, 구보, 류신 세 사람이 함께 산책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동 속도와 시선을 낮추면서 서울은 맨얼굴의 실체를 드러낸다. 도시 거주자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도시 산책자의 눈에 게스탈트적으로 한꺼번에 속살을 드러낸다.

 

입체적 공간은 삶의 토대이고 결정자이기 때문에, 존재 방식을 읽어내는 확실한 단서를 제공한다. 미신 대신 과학이, 신(神)이 사라진 자리에 물신(物神)이 서울을 주관한다. 경제적 축적과 행복을 동일시하는 21세기 서울에서 소비 욕망은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다. 소비를 위해서 일하고, 쉬고, 축적한다. 소비를 위해서 개발하고 부수고 교체하다. 소비는 무사무욕적일수록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시스템에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는 것은 소비 능력이다. 서울은 자본주의 환등으로 넘쳐 난다.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감싸고 있는 사물들이다. 함성호의 시 “패션은 육체다”처럼 패션은 사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개인의 자아다. “모든 패션은 살아 있는 육체를 무기체의 세계와 결합시킨다. 무기체의 성적 매력에 빠져드는 행위인 페티시즘은 패션을 위한 실수적 신경계다(발터 벤야민) (117쪽).

 

얼마 전 80년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인사동 카페에서 주인 언니의 하소연을 들었던 적이 있다. 대학생이었던 손님이 어느덧 중년의 사회인이 되는 세월 동안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켰던 주인 언니는 - 이름만 대면 알만한 - 수많은 문화 예술들의 누나이자 언니였다. 그날 밤도 처음 만난 방송국에서 일하는 한 팀과 내 일행은 오래된 지인처럼 서울의 역사를 논했고, 함께 연주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연배를 달리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가 기억하는 한 시대의 서울을 퍼즐처럼 맞추어갔다. 모든 잠든 시간에 서울의 한 카페는 영화 같은 시간들이 추억의 유적을 만들고 있다. 세월이 지나도 잊지 않고 찾아오는 그들의 사랑이 돈 없는 언니의 소중한 자산이다. 조만간 언니는 삶을 일궈낸 터전인 인사동을 떠나야 할 판이다. 치솟는 땅값도 감당하기 어렵지만, 대기업 따님들이 야금야금 인사동 가게를 하나둘 사들이기 시작한지 오래되어 월세, 전세로 운영하는 가게 주인은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자본의 환등 성으로 정신적 자산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월세를 못 내는 언니를 위해서 많게는 몇 십년, 짧게는 수년의 인연을 가진 손님들이 공연을 준비중이라고 했다. 한때 스무살이었던 학생이 중년의 신사가 되어 카페의 명맥을 잊는 실날 같은 생명을 불어 넣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인사동 카페를 생각했다. 류신이 걸으며 만난 서울의 문학과 예술 탓이리라. 벤야민의 수집가적 정신이 구보를 거쳐 류신으로 이어진다. 이 책을 쓰는 내내 행복했을 저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히는 책이다. 저자의 스타일리쉬한 글쓰기 또한 한몫하는 책이다. 연구자와 대중작가 사이에서 접점을 찾고자 하는 수고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설처럼 읽히는 재미있는 문학 평론(문화 비평)”을 쓰고 싶었다.”는 저자는“창작과 비평을 합체”하는데 일정 정도의 성과를 만들었다. 단순한 소회에 젖지 않기 위해서 문학 작품들을 재인용하는 장치를 사용한다. 문화 비평가로서 둘 사이의 경계에서 시도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곽재구, 김소연, 남진우, 무라카미 하루키, 김영하, 심보선, 함민복, 파묵, 배수아 등 이름을 열거하기도 벅찬 수많은 작품들이 류신에 의해서 재해석된다. 문학 작품은 서울을 해석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서울을 통해서 의미 있는 비평작업의 주체이기도 하다. 류신의 해석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읽히지 않는다. 각자의 눈을 통해서 간주관성을 획득한다. 의미는 작자의 경험에서 접점을 찾아간다.

 

내게는 “하루 걸어서 하루를 산다.”는 걷기의 달인 이모, 이모부가 있다. “속된 도시” 서울을 탈주할 수 없는 벗들이 너무도 많다.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해법을 찾아볼 수 있는 작은 저항을 류신에게서 발견한다. 이 책 하나로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에 함께 걷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물신 지배의 서울 비판만을 위해서 이 책을 쓰지 않았다. 21세기 서울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탐색에 목적을 둔다. 사랑의 가치는 성패로 결정되지 않는다. 사랑이 없다면 이 도시는 삭막할 것이다.(258쪽) 사랑으로 은유된 이 가치를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몫일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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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2014-03-06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삼설 코렉스 쇼핑몰은 삼성 코엑스의 오타인가요?

더불어숲 2014-03-06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타입니다.ㅠㅠ; 꼼꼼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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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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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서 작품과 만나다.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유홍준 지음, 눌와, 2013. 11.

 


 

십대 시절, 용돈의 십 할을 책 구입에 사용했다. 밥벌이를 시작한 이후에도 책을 사서 모으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권의 책을 다시 읽을 여유 없이 새 책이 쌓여갔다. 책을 살 때는 분명 다시 이 책을 펼쳐들 날이 여러 번 있으리라는 기대했지만, 언제나 눈은 신간에 꽂혔다. 책을 끌어 모으는 것은 지적 허영의 한 측면이기도 했지만, 작가의 지적 생산에 대한 독자로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단돈 만원에 일기장을 공개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다보면 책값이란 세속적인 계산에 의해서 합리적일 뿐, 그 가치는 누구도 매길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책’이라는 물화(物化)된 지성에 대한 경도되었던 한 시절의 소회다.

 

책에 대한 사랑이 유난했던 그 시절 ‘유홍준’ 선생님은 인기 없던 우리의 관공서 ‘문화재’를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와 친근한 해설을 곁들여 주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학술적인 저술을 대중을 위한 글쓰기로 형식을 바뀌면서 천상(!!)의 미학에 머물던 한국의 미술품이 지상에 발을 디뎠고 답사여행이 순식간에 파급되었다. 나 또한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끼고 남도를 여행하는 학생 중 한명이었다. 정약용의 유배지를 서성였고, 해남, 강진 남도 답사 일번지에서 나와 비슷한 여행자들을 여럿 만나기도 하면서 선생님의 글쓰기 속도를 터덕거리며 따라갔다. 점점 발이 움직이지 않고, 눈으로 읽고 보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선생님의 저서를 읽다 보면 생각이 멈추고 망연해지는 순간만큼은 여전하다.

 

유홍준 선생님은 작품과 나 사이의 거대한 창문이다. 유일하게 언어의 힘에 기대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나와 같은 고전 작품 문외한들에게 유홍준 선생님은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망원경이자 현미경이다. 이번 저서에게 선생님은 - 작품의 기본 정보를 제공하여 -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지만, 이미 작품 선택 자체가 개입인지라,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다. 늘 그의 작품 보는 법을 모방하였듯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의 작품 보는 안목에 기대어 감상할 수밖에 없다.

 

그가 취사선택한 옛 그림과 글씨 49점, 그에 곁들여지는 100여점의 도판은 사람과 작품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명작순례』는 작품보다 작가의 삶에 더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에 작가의 삶과 작품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풍죽도>를 통해서 대나무처럼 꼿꼿한 자신을 표현한 것 같은 탄은 이정의, “능숙한 필치와 간일한 묘사로 재료상의 제약을 모두 극복(68쪽)”한 겸재 정선, 함께 어울릴 벗이 없이 고독했기 때문에 그림이 관념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현재 심사정, 그중에서도 능호관 이인상이 <수하한담도>에 그림을 그린 연유를 써 넣은 것에서 작품 너머의 것을 이해하게 된다. “내 친구 임매는 내 그림을 애써 받고도 그의 너그러운 성품 때문에 다른 이가 가져가도 상관하지 않아 내 그림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이 그림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임매가 내 소심함을 비웃을 것을 무릅쓰고 이를 (임매에게 주는 그림이라고) 쓴다.(79쪽)” 진심을 전하면서 유머를 잃지 않는 능호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표암 강세황이 자화상에 쓴 찬문의 유머 감각은 요즘 대세인 드라마 <별에서 온 남자>의 천송이에 버금간다. “가슴에는 만 권의 책을 간직하였고 / 필력은 오악(五嶽)을 흔들만하지만 / 세상 사람들이야 어찌 알리오, 나 혼자 즐기는 것임을”이라는 글 속에서 유머가 차고 넘쳤을 강세황이 현현하는 느낌이다. 그런 성품을 지녔기에 제자 단원과의 망년지우(忘年之友)가 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단원과 사귄 것은 전후하여 모두 세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단원이 어려서 내 문하에 다닐 때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했고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치지도 했다. 중간에는 관청에 같이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거쳐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예술계에 있으면서 지기(知己)다운 느낌을 가졌다.(101쪽)”고 한다.

 

모든 작품의 사연도 각별하고 훌륭하지만, 평소 좋아했던 화가에 더 오래 머물고 집중했다. 이때부터는 저자를 벗어난 읽는 자들 각자의 독법이 가능해진다. 아는 만큼 보이니 어쩔 수 없다. 대책 없이 돌출한 <취화선>의 오원 장승업이 매력적이고, 고국과 고향을 떠나 실향민의 심정으로 점을 찍는 김환기의 삶에서는 목울대가 뻐근해져서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기를 여러 번 했다. 예술의 용법과 용도는 다양하지만, 예술은 유한한 삶속에서 무한한 꿈을 꾸는 자들의 사유에 물질성이 부여된 것이기도 하다. 김환기의 삶과 작품이 그러하다. 오래전 내가 가르쳤던 제자의 이름이 ‘김환기’였다. 화가였던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자식에게 준 이름이었는데,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화가의 이름을 자식에게 붙여준 (뵌 적도 없는) 아버지의 마음이 충분히 느껴져서 그 아이 이름을 부를 때는 남다른 감흥에 젖기도 했다. 모더니스트 김환기의 우수에 찬 작품이 선연하다. 다산 정약용의 삶에 대해서도 새삼 다시 곱씹어 생각한다. “다산에게 유배란 강요된 안식년”이라는 의견에 대한 유홍준 선생님의 재해석에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의 18년 귀양살이에는 비록 ‘강요된’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해도 감히 ‘안식년’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237쪽)”는 말씀에서 어떤 표현은 누군가를 향한 폭력이라는 생각에 한참 머물러야 했다.

 

“세상엔 한석봉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추사를 아는 사람도 없다.(221쪽)” 여전히 우리는 아는 만큼 볼 것이며 사랑할 것이다. 남과 다르게 보고 해석하며 관계 맺을 것이다. 앞서 깨달은 분들에 기대어 앎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낮은 지평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드라마 <별에서 온 남자>의 도민수처럼 오백년을 사는 외계인이 아니고, 영화 <어바웃 타임>처럼 타임슬립할 수 없다면, 우리가 온전히 기댈 곳은 책을 통한 시간 여행이다.

 

다음 주에 이사를 해야 하는 내가 포기한 물건은 결국 책이다. 서재를 지금 사는 집에 그대로 두고 가기로 결정하면서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책꽂이를 잘 찍어서 새집 벽에 걸어야겠다는 것이다. 서가 사진이라도 있어야만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여가가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그림 ‘책가도’를 보면서 옛사람들도 나와 같았다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나 보다. “정조는 화공에게 명하여 책가도를 그리게 하여 자리 뒤에 붙여두시고 업무가 복잡하여 여가가 없을 때는 이 그림을 보며 마음을 책과 노닐게 했다.(266쪽)”고 한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사랑한다. 나쁜 책도 도움이 되었다는 막심 고리끼처럼 한시절은 호불호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작순례』를 읽으면서 일상이 고고해지는 느낌이다. 예술작품을 보고 읽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번 생의 시간 여행은 이것으로 대신해야한다. 내 삶을 예술로 가꾸는 과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세네카, 푸코처럼 주체의 윤리로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어야 한다.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me)>(2013)은 시간이 되돌릴 수 있는 부자(父子)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는다. 타임 슬립 없이도 충분한 행복을 누렸을 것 같은 현명한 아버지에게 아들이 묻는다. “그 능력으로 얻는 남보다 많은 시간 동안 아버지는 무엇을 했느냐?”고. 영문학 교수인 아버지는 남들이 세익스피어를 한번 읽을 때 나는 여러 번 읽을 수 있었다는 것으로 답한다. 재산을 탐하지도 않았고, 세상의 이치를 깨트리지도 않으면서 시간이 줄 수 있는 최고를 누렸던 것이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2075

 

고교 동창 P는 “음악을 귀에 걸고 사는” 아이였다.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면서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고, 우여곡절 끝에 S대학교에 입학했다. 대기업 직원이 된 그 아이가 여자 친구에게 했던 말, “한 달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영화 보고, 책 읽고, 음악 듣고, 여행하고 싶다.”였다.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자의 - 투정처럼 느껴졌다. 그 친구 지금 뇌졸중으로 쓰러져 뇌수술을 세 번 받고 투병중이다. 새털 같은 많은 날들이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참 많다. 오늘의 행복은 오늘의 몫이다. 그 친구가 꿈꾸었던 시간을 이번 생에서 반드시, 여러 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는 아이니까, 체리 향기 같은 시간이 그에게 허락될 것을 믿는다. 나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기 바라는 마음으로 『명작순례』를 다시 펼쳐 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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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나무 아래
아이미 지음, 이원주 옮김 / 포레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아이 엠 러브>(I Am Love, 2009) 감독 : 루카 구아다니노, 주연 : 틸타 스윈튼

<산사나무 아래>(Hawthorne Tree Forever, 2010) 감독: 장이모우(張藝謀)

 

 

“나는 사랑이다, 나는 오로지 사랑으로 존재한다.”

- 순수한 사랑<산사나무 아래> VS 욕망하는 사랑 <아이 엠 러브>

 

햇빛이 창호지를 투과해 방안 깊숙이 들어오는 가을 오후, 빛을 따라 먼지가 춤을 추는 시간은 익숙한 사물이 다른 기호로 말을 건다. 손때 묻은 가구와 책장의 책들은 마치 벽에 걸린 정물화처럼 차원이 달라진다. 그때 느껴지는 시적(詩的) 슬픔, 그와 유사한 느낌을 담아낸 영화들이 있다. 영화는 사랑을 무한 변주하며 단조로운 일상을 낯선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영원한 노스텔지어, 순수의 사랑 <산사나무 아래>

 

<산사나무 아래>는 항일전쟁에서 학살당한 선열의 붉은 피 때문에 흰꽃이 붉게 핀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장이모우 감독은 혁명정신을 촉구하는 문화혁명 당시를 배경으로 거대담론에 묻혀 있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섬세하게 복원했다. 시대의 아픔을 상징하는 산사나무를 매개로 한 순수한 사랑은 한편의 동화와 같다. 다정하고 친절한 이 영화는 관객의 마음에 애잔함을 꽃피운다. 혁명의 의지가 붉은 꽃 전설의 기원이라면,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다시 인간 본연의 심성으로 돌아가서 흰꽃을 피운다. 사회적 제약 안에서 이별을 알고 가는 사랑은 헌신적일 수밖에 없다. 장이모우는 문화혁명을 밑그림으로 사용하면서도 정치적 논쟁을 비켜감으로써 온전히 사랑, 그 자체에 집중한다. 문화대혁명, 계급, 농촌, 빈부 갈등이 배경이지만, 영화는 느린 속도로 조용히 제 길만을 향하여 간다.

 

실화에 토대를 둔 <산사나무 아래>는 실제 인물인 여주인공 징치우가 썼던 회고록에서 이야기를 가져왔다. 장치우의 친구 아미(艾米)의 원작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문화대혁명 기, 교재편찬을 위해 항일 운동의 역사를 간직한 시골 마을로 내려간 징치우는 그곳에서 지질탐사대원 라오산을 만난다. 라오산은 당 간부의 아들이지만, 징치우는 사상이 더 무장되어야 할 학생 신분으로 자신의 당성(黨性)을 보여주어야 할 과업을 안고 살아간다. 징치우의 집은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투옥되고, 가세가 몰락한 상황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라오산의 사랑은 책임감으로 괴로워하는 징치우의 마음을 천천히 열어간다. 그들의 사랑은 세월의 무게나 변화된 환경 속에서도 굳건하게 본연의 모습을 지켜나간다. 그 '순수함'은 남성 감독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섬세하고 정감 어린 연출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이야기는 만남, 사랑 그리고 이별로 이어지는 단순한 플롯이다. 이 단조로운 이야기를 안받침하고 있는 토대는 ‘진정성’이다. 주동우(징치우 역), 두효(라오산 역) 두 신인 배우가 엮어내는 담백하고 자연스런 연기를 통해서 진정성을 형상화한다. 그간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가 주윤발, 유덕화, 장쯔이, 공리 등 이름난 스타들과 함께 빛이 났다면, 이 영화는 신예를 기용하여 순수함을 부각시킨다. 장이모우 감독은 초기에 <산사나무 아래>와 같이 역사 주변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드라마를 많이 다루기도 했다. 다시 보통 사람의 일상에 현미경을 들이댔다는 점에서 장이모우 감독에게 이 영화는 십년만의 귀향과도 같다.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랑 이야기는 <책상서랍 속의 동화>, <집으로 가는 길> 등과 같은 초기작을 돌아보게 한다. 대작에서 소박한 사랑 이야기로 돌아온 장이모우 감독의 행보는, 감독으로서의 자기 자신 역시 초창기의 순수한 작가정신을 잃지 않았음을 항변하는 듯하다.

 

온전히 순수한 사랑에 집중한다는 점은 이 영화의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단조로운 스토리는 제작 당시부터 감독의 염려를 낳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때문에 진부한 사랑 이야기로 읽혀질 수도 있고, 지나치게 상투적인 표현이 거슬리기도 한다.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배경의 아픔이 더해진 순수한 남녀의 사랑은 과장 없는 연출로 빛이 난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연출뿐 아니라 제작을 맡은 장이모우 감독의 자신감으로 재탄생했다. 장이모우는 <영웅>, <연인> 등 스케일이 큰 영화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정형화된 리얼리즘에 충실했던 중국 5세대 감독이기도 하다. 블록버스터에서 베이징 올림픽 공연까지 스펙터클한 연출로 정평이 나 있는 장이모우 감독은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으로 다시 한번 잔잔하면서도 소박한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존재를 뒤흔드는 욕망하는 사랑, <아이 엠 러브>

 

밀라노를 배경으로 한 <아이 엠 러브>는 이탈리아의 명문 레키가(家)의 일원인 엠마가 가식의 굴레를 벗어나서, 자신의 욕망과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엠마는 외적으로 재력가 시부모, 명망 있는 남편, 잘 성장해준 자녀를 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 평온한 일상의 파국은 아들의 친구, 안토니오와의 급격한 사랑과 딸의 레즈비언 선언으로 시작한다. 엠마는 안토니오가 요리한 음식을 먹고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딸의 레즈비언이라는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과 사랑을 성찰한다.

 

<아이 엠 러브>는 한 여성의 선택을 통해서 여성의 자유와 상류층의 몰락을 한꺼번에 폭로한다. 남편과 안토니오 모두 그녀에게 문제적 상황에 직면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완벽한 타자이다. 남편은 떠나는 엠마에게 “넌 존재하지도 않았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남편과 엠마 사이에는 ‘사랑'이 부재하였고, 엠마는 오직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외적 스토리 내부에서 자본주의 상류층의 붕괴를 포착한다. 외적 삶과 내부 갈등을 중첩함으로써, 두 공간이 비틀려 균열하는 과정을 탁월하게 영상화한다. 가면을 쓴 얼굴로 피상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재벌들의 파티에서 엠마는 - 같은 공간에 있어도 - 항상 고립되어 있다.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지만, 귀족의 몸에 밴 습성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있어서 늘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식사 시간조차 팽팽한 긴장이 이어져 누구도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다.

 

감각적이고 퇴폐적인 이야기는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를 통해서 고전적이고 우아한 예술로 창조되었다. 진부하고 도식적인 서사를 끌어안고 가면서도, 다양한 영화적 방식을 동원하여 강렬하고 뜨거운 에너지를 생산한다. 영화가 제 7의 종합영화임을 확인시켜주는 <아이 엠 러브>는 관객이 오감을 느낄 수 있도록 모든 영화 장치를 활용한다. 엠마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면서 극단으로 치솟을 때, 음악과 미장센이 전환을 일으키며 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룬다. 또한 시청각을 공감각적으로 교차 편집하여 자연스럽게 감각의 전이가 일어난다. 안토니오니가 만들었던 요리는 시각에서 출발하여 미각을 자극하고, 미각은 다시 청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공간을 활용한 감정의 영상화 또한 탁월하다. 엠마와 남편의 정사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내연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안토니오와의 정사는 창문이 활짝 열려 빛이 들어오는 공간에서 시작되어, 외부 공간인 숲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직 잔설이 쌓인 밀라노의 거리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닫힌 창문을 비춤으로써, 엠마의 내면 상태를 포착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엠마가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문들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다가 결국 활짝 열리는 현관으로 빛이 쏟아진다. 또한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레키가(家)의 닫힌 문과 안토니오의 오두막집의 열린 문들은 엠마의 심적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두 공간의 대비는 물리적으로만 존재할 뿐 철저한 부재인 엠마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녀는 평탄한 저지대의 대저택에 살고 있고, 안토니오는 좁고 굽은 길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고지대에 살고 있다. 엠마의 감정은 그대로 공간적 높낮이로 드러난다.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대신 활용한 부감 샷은 더 많은 감정을 이끌어내는데 성공적이다.

 

진부한 캐릭터일 수 있는 엠마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배우 틸타 스윈튼이다. <아이 앰 러브>는 틸다 스윈튼의 영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감정을 그대로 실어 나르는 드라마틱한 얼굴의 표상을 완벽하게 완성한다. 그녀는 이지적인 상류여성의 모습과 사랑으로 불타는 관능미까지 상반된 모습을 동시에 소화했다.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러시아인으로 이태리어를 써야하는 엠마 역이 영국 출신 틸타 스윈튼에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불어 존 아담스가 담당한 음악 또한 놓치면 안된다. 엠마가 처음 안토니오가 요리한 음식을 먹는 장면, 엠마가 집을 뛰쳐나가는 장면에서 음악은 그 자체로 엠마와 동일시된다. <아이 엠 러브>는 음악이고, 공간이며, 사랑이다.

 

순수와 욕망의 대척점에 있는 이 두 편의 영화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껴안는다. 도처에 널려 있으나,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하여 성찰하게 한다. 안개 속을 유영하는 듯한 낮은 톤의 색감과 음악으로 가득한 <산사나무 아래>는 희미한 첫사랑의 기억과 접속하게 한다. 과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인 그리움과 만날 수 있는 한편의 서정시와 같은 영화다. 반면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엠마의 극단적인 사랑은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일상의 평화를 파괴한다. 상류사회 일원으로 소비되는 사물에서 주체적 결단을 내리는 엠마는 불안하게 흔들리지만 넘실대는 생(生)의 의지로 불탄다. 색깔 다른 두 편의 영화는 우리 내면의 채워진 잠금 쇠를 열고, 순수와 욕망의 사랑을 들여다보게 하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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