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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나무 아래
아이미 지음, 이원주 옮김 / 포레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아이 엠 러브>(I Am Love, 2009) 감독 : 루카 구아다니노, 주연 : 틸타 스윈튼
<산사나무 아래>(Hawthorne Tree Forever, 2010) 감독: 장이모우(張藝謀)
“나는 사랑이다, 나는 오로지 사랑으로 존재한다.”
- 순수한 사랑<산사나무 아래> VS 욕망하는 사랑 <아이 엠 러브>
햇빛이 창호지를 투과해 방안 깊숙이 들어오는 가을 오후, 빛을 따라 먼지가 춤을 추는 시간은 익숙한 사물이 다른 기호로 말을 건다. 손때 묻은 가구와 책장의 책들은 마치 벽에 걸린 정물화처럼 차원이 달라진다. 그때 느껴지는 시적(詩的) 슬픔, 그와 유사한 느낌을 담아낸 영화들이 있다. 영화는 사랑을 무한 변주하며 단조로운 일상을 낯선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영원한 노스텔지어, 순수의 사랑 <산사나무 아래>
<산사나무 아래>는 항일전쟁에서 학살당한 선열의 붉은 피 때문에 흰꽃이 붉게 핀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장이모우 감독은 혁명정신을 촉구하는 문화혁명 당시를 배경으로 거대담론에 묻혀 있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섬세하게 복원했다. 시대의 아픔을 상징하는 산사나무를 매개로 한 순수한 사랑은 한편의 동화와 같다. 다정하고 친절한 이 영화는 관객의 마음에 애잔함을 꽃피운다. 혁명의 의지가 붉은 꽃 전설의 기원이라면,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다시 인간 본연의 심성으로 돌아가서 흰꽃을 피운다. 사회적 제약 안에서 이별을 알고 가는 사랑은 헌신적일 수밖에 없다. 장이모우는 문화혁명을 밑그림으로 사용하면서도 정치적 논쟁을 비켜감으로써 온전히 사랑, 그 자체에 집중한다. 문화대혁명, 계급, 농촌, 빈부 갈등이 배경이지만, 영화는 느린 속도로 조용히 제 길만을 향하여 간다.
실화에 토대를 둔 <산사나무 아래>는 실제 인물인 여주인공 징치우가 썼던 회고록에서 이야기를 가져왔다. 장치우의 친구 아미(艾米)의 원작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문화대혁명 기, 교재편찬을 위해 항일 운동의 역사를 간직한 시골 마을로 내려간 징치우는 그곳에서 지질탐사대원 라오산을 만난다. 라오산은 당 간부의 아들이지만, 징치우는 사상이 더 무장되어야 할 학생 신분으로 자신의 당성(黨性)을 보여주어야 할 과업을 안고 살아간다. 징치우의 집은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투옥되고, 가세가 몰락한 상황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라오산의 사랑은 책임감으로 괴로워하는 징치우의 마음을 천천히 열어간다. 그들의 사랑은 세월의 무게나 변화된 환경 속에서도 굳건하게 본연의 모습을 지켜나간다. 그 '순수함'은 남성 감독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섬세하고 정감 어린 연출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이야기는 만남, 사랑 그리고 이별로 이어지는 단순한 플롯이다. 이 단조로운 이야기를 안받침하고 있는 토대는 ‘진정성’이다. 주동우(징치우 역), 두효(라오산 역) 두 신인 배우가 엮어내는 담백하고 자연스런 연기를 통해서 진정성을 형상화한다. 그간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가 주윤발, 유덕화, 장쯔이, 공리 등 이름난 스타들과 함께 빛이 났다면, 이 영화는 신예를 기용하여 순수함을 부각시킨다. 장이모우 감독은 초기에 <산사나무 아래>와 같이 역사 주변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드라마를 많이 다루기도 했다. 다시 보통 사람의 일상에 현미경을 들이댔다는 점에서 장이모우 감독에게 이 영화는 십년만의 귀향과도 같다.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랑 이야기는 <책상서랍 속의 동화>, <집으로 가는 길> 등과 같은 초기작을 돌아보게 한다. 대작에서 소박한 사랑 이야기로 돌아온 장이모우 감독의 행보는, 감독으로서의 자기 자신 역시 초창기의 순수한 작가정신을 잃지 않았음을 항변하는 듯하다.
온전히 순수한 사랑에 집중한다는 점은 이 영화의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단조로운 스토리는 제작 당시부터 감독의 염려를 낳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때문에 진부한 사랑 이야기로 읽혀질 수도 있고, 지나치게 상투적인 표현이 거슬리기도 한다.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배경의 아픔이 더해진 순수한 남녀의 사랑은 과장 없는 연출로 빛이 난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연출뿐 아니라 제작을 맡은 장이모우 감독의 자신감으로 재탄생했다. 장이모우는 <영웅>, <연인> 등 스케일이 큰 영화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정형화된 리얼리즘에 충실했던 중국 5세대 감독이기도 하다. 블록버스터에서 베이징 올림픽 공연까지 스펙터클한 연출로 정평이 나 있는 장이모우 감독은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으로 다시 한번 잔잔하면서도 소박한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존재를 뒤흔드는 욕망하는 사랑, <아이 엠 러브>
밀라노를 배경으로 한 <아이 엠 러브>는 이탈리아의 명문 레키가(家)의 일원인 엠마가 가식의 굴레를 벗어나서, 자신의 욕망과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엠마는 외적으로 재력가 시부모, 명망 있는 남편, 잘 성장해준 자녀를 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 평온한 일상의 파국은 아들의 친구, 안토니오와의 급격한 사랑과 딸의 레즈비언 선언으로 시작한다. 엠마는 안토니오가 요리한 음식을 먹고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딸의 레즈비언이라는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과 사랑을 성찰한다.
<아이 엠 러브>는 한 여성의 선택을 통해서 여성의 자유와 상류층의 몰락을 한꺼번에 폭로한다. 남편과 안토니오 모두 그녀에게 문제적 상황에 직면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완벽한 타자이다. 남편은 떠나는 엠마에게 “넌 존재하지도 않았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남편과 엠마 사이에는 ‘사랑'이 부재하였고, 엠마는 오직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외적 스토리 내부에서 자본주의 상류층의 붕괴를 포착한다. 외적 삶과 내부 갈등을 중첩함으로써, 두 공간이 비틀려 균열하는 과정을 탁월하게 영상화한다. 가면을 쓴 얼굴로 피상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재벌들의 파티에서 엠마는 - 같은 공간에 있어도 - 항상 고립되어 있다.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지만, 귀족의 몸에 밴 습성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있어서 늘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식사 시간조차 팽팽한 긴장이 이어져 누구도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다.
감각적이고 퇴폐적인 이야기는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를 통해서 고전적이고 우아한 예술로 창조되었다. 진부하고 도식적인 서사를 끌어안고 가면서도, 다양한 영화적 방식을 동원하여 강렬하고 뜨거운 에너지를 생산한다. 영화가 제 7의 종합영화임을 확인시켜주는 <아이 엠 러브>는 관객이 오감을 느낄 수 있도록 모든 영화 장치를 활용한다. 엠마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면서 극단으로 치솟을 때, 음악과 미장센이 전환을 일으키며 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룬다. 또한 시청각을 공감각적으로 교차 편집하여 자연스럽게 감각의 전이가 일어난다. 안토니오니가 만들었던 요리는 시각에서 출발하여 미각을 자극하고, 미각은 다시 청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공간을 활용한 감정의 영상화 또한 탁월하다. 엠마와 남편의 정사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내연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안토니오와의 정사는 창문이 활짝 열려 빛이 들어오는 공간에서 시작되어, 외부 공간인 숲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직 잔설이 쌓인 밀라노의 거리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닫힌 창문을 비춤으로써, 엠마의 내면 상태를 포착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엠마가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문들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다가 결국 활짝 열리는 현관으로 빛이 쏟아진다. 또한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레키가(家)의 닫힌 문과 안토니오의 오두막집의 열린 문들은 엠마의 심적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두 공간의 대비는 물리적으로만 존재할 뿐 철저한 부재인 엠마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녀는 평탄한 저지대의 대저택에 살고 있고, 안토니오는 좁고 굽은 길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고지대에 살고 있다. 엠마의 감정은 그대로 공간적 높낮이로 드러난다.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대신 활용한 부감 샷은 더 많은 감정을 이끌어내는데 성공적이다.
진부한 캐릭터일 수 있는 엠마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배우 틸타 스윈튼이다. <아이 앰 러브>는 틸다 스윈튼의 영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감정을 그대로 실어 나르는 드라마틱한 얼굴의 표상을 완벽하게 완성한다. 그녀는 이지적인 상류여성의 모습과 사랑으로 불타는 관능미까지 상반된 모습을 동시에 소화했다.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러시아인으로 이태리어를 써야하는 엠마 역이 영국 출신 틸타 스윈튼에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불어 존 아담스가 담당한 음악 또한 놓치면 안된다. 엠마가 처음 안토니오가 요리한 음식을 먹는 장면, 엠마가 집을 뛰쳐나가는 장면에서 음악은 그 자체로 엠마와 동일시된다. <아이 엠 러브>는 음악이고, 공간이며, 사랑이다.
순수와 욕망의 대척점에 있는 이 두 편의 영화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껴안는다. 도처에 널려 있으나,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하여 성찰하게 한다. 안개 속을 유영하는 듯한 낮은 톤의 색감과 음악으로 가득한 <산사나무 아래>는 희미한 첫사랑의 기억과 접속하게 한다. 과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인 그리움과 만날 수 있는 한편의 서정시와 같은 영화다. 반면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엠마의 극단적인 사랑은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일상의 평화를 파괴한다. 상류사회 일원으로 소비되는 사물에서 주체적 결단을 내리는 엠마는 불안하게 흔들리지만 넘실대는 생(生)의 의지로 불탄다. 색깔 다른 두 편의 영화는 우리 내면의 채워진 잠금 쇠를 열고, 순수와 욕망의 사랑을 들여다보게 하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