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언 에듀케이션
론 셰르픽 감독, 캐리 멀리건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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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Education>은 비틀스가 나오기 직전인 1961년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옥스퍼드 대학 입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는 십대 소녀 제니의 질풍노도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 보수적인 중산층 부모는 명문대학 입학을 위해서 딸의 사생활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상승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부모의 압력을 수용하던 모범생 제니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데이비드와 우연히 만난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마치고 비에 젖은 채 첼로를 메고 가던 제니의 옆에 값 비싼 자동차 브리스톨이 멈춘다. “비싼 첼로를 비에 젖게 할 수 없다.”는 남자의 호의에 잠깐 망설이지만, 제니는 그가 가지고 있는 묘한 매력에 이끌려 브리스톨을 탄다. 경제력, 유머, 배려심을 갖춘 데이비드는 제니와 상당한 나이 차이가 나지만, 그 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혼란스러운 세계로 제니를 끌어들이다. 데이비드의 물질적 풍요, 자유로운 기질과 미적 감각 때문에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온 제니와 그녀의 부모는 데이비드에게 사로잡힌다. 십대 소녀가 결코 알 수 없는 데이비드의 세계에서, 제니는 학교에서 경험할 수 없는 화려한 유혹을 경험한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 세계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제니의 옥스퍼드 진학의 꿈과 학교생활은 엉망이 되어간다.

 

<An Education>은 영국의 유명 저널리스트 린 바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2009년 독립영화계의 화제작이었던 이 영화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의 호평을 받았던 작품으로, 베를린영화제 슈팅스타상,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아카데미상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이미 어른이 한 남자와 이제 어른이 되려는 한 소녀의 로맨스에서 출발한 영화는 소녀의 혹독한 성장 과정을 거쳐서 성숙으로 마무리된다. 여성 감독 쉐르픽(Lone Scherfig)은 사건의 진행을 제니의 관점에서 접근해 나간다. 쉐르픽은 규격화된 일상 안에 갇혀 있는 십대 소녀가 꿈꿀만한 세계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감독의 현실감 있는 연출 덕분에 관습적인 성장 영화가 될 뻔한 이 이야기는 삶 전체를 사유하게 하는 힘을 갖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서 경험하기를 꿈꾸는 ‘욕망’은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은 그 실체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제니가 학교 밖의 일탈을 겪고 나서 자기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녀가 선망하는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 역시 제니의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선망의 대상이지, 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탈로 구성된 물질세계인 데이비드의 삶과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치의 벗어남도 허용되지 않는 제니의 삶이 절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다.

 

이 영화가 ‘교육’ 그 자체에 집중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관객에게 이 영화가 갖는 의외성 때문에 당황스러울 수 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공교육과 교육문제 자체에 집중하며, 교육 담론을 펼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학교라는 공간이 갖는 폐쇄적인 구조를 잘 보여준다. 제니의 친구들과 교사가 보여주는 반응은 지금 한국의 학교와 별로 다르지 않다.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여전히 ‘학교’는 억압의 메타포로 사유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학교 밖에서 청소년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자유 보다는 ‘일탈’로 규범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학력과 학벌의 성공 신화가 여전히 유효한 담론으로 유통되는 한국 사회의 입시 현실과 맞닿아 있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특히 대학입시를 눈앞에 둔 모범생의 일탈과 방황은 진정한 ‘교육’에 대한 성찰을 이끌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캐리 멀리건(Carey Hannah Mulligan)이라는 여배우를 기억해야 한다. ‘제니’라는 설정된 인물도 매력 있지만, 우리는 캐리 멀리건이라는 배우의 매력에 반할 수밖에 없다. “연기 이외에는 하고 싶었던 것이 없었다.” 는 캐리 멀리건은 ‘제니’라는 인물에게 생명력을 부여하여 살아있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그녀의 연기 덕분에 열여섯 제니의 선택과 행동이 설득력을 갖는다. 영화에서 멀리건은 ‘헵번 스타일’의 올림머리와 선글라스와 드레스를 하고 상큼한 매력을 과시한다. 그 덕분으로 ‘제2의 오드리 헵번’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멀리건은 헵번의 1964년작 '마이 페어 레이디'의 리메이크작 주인공으로 결정되었다. <오만과 편견> <퍼블릭 에너미> <브러더스>, 다수의 TV시리즈 등에 조연으로 출연한 경력이 전부였던 그녀는 이제 세계적인 배우로 입지를 세우고 있다. 캐리 멀리건은 이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했고, <네버 렛 미 고>(2010), <드라이브>(2011)도 그녀의 화려한 필모그래피의 한 부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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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우정 - 전신마비 백만장자와 무일푼 백수가 만드는 감동실화!
필립 포조 디 보르고 지음, 최복현 옮김 / 작은씨앗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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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농담의 내적 치유력, <언터처블: 1%의 우정> (Untouchable, 2011),

감독 : 올리비에르 나카체 , 에릭 토레다노, 출연 : 프랑수아 클루제, 오마 사이

   

도저히 접촉할 수 없는 계층의 두 남자가 만났다. 프랑스 최상류층인 필립(프랑수아 클루제)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었다. 소외계층인 드리스(오마 사이)는 흑인 슬럼가에서 부랑아처럼 떠돌고 있다. 부유한 필립은 교양과 고급취향을 소유했지만, 전신마비 장애인이다. 드리스는 젊고 유쾌하지만, 범죄 경력을 가진 가난한 흑인 이민자다. 필립의 간병인을 뽑는 인터뷰에서 필립과 드리스는 처음 만난다. 높은 임금을 보장하는 그 자리를 탐내는 지원자는 많지만, 선발하기가 쉽지 않다. 돈이 목적이거나, 장애인을 위해서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는 그 자리를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참가한 드리스는 다른 후보들처럼 일자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필립이 거절하면 받을 수 있는 실업수당이 목적이다. 접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두 사람이 만남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그것은 ‘연민’ 없고, ‘검열’ 없는 드리스의 유쾌한 삶의 태도 덕분이다.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는 대책 없는 드리스와 가까워지면서 필립은 점점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간다.

 

<언터처블>은 이미 프랑스 박스오피스 10주 연속 1위의 기록을 세우고 있고, 국내에서도 관객의 발길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도쿄국제영화제 작품상, 뤼미에르영화제 남우주연상에 이어 ‘프랑스의 아카데미’인 세자르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감동과 울림이 크다. 실제로 필립은 유럽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명 샴페인 회사의 사장이다. 선조인 칼 앙드레아 포조 디 보고는 정계,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최상류층으로 황제 나폴레옹의 친구였고,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코르시카 섬의 수상이기도 했다. 가문의 부, 명예, 전통은 필립에게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음악 또한 큰 역할을 한다. 무사무욕적인 사치취향을 가지고 있는 필립과 대중 취향의 드리스가 서로를 존중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음악을 활용한다. 단순히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기능을 뛰어 넘는다. ‘따분한’ 클래식만을 고집하는 필립이 들려주는 음악을 듣고 난 뒤에 드리스는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주기를 요구한다. 그때 선곡한 곡이 바로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Boogie Wonderland’이다. 펑키한 리듬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드리스를 따라 점잖았던 파티장의 분위기가 반전한다. ‘어스 윈드 앤 파이어’는 펑크 역사상 가장 상업적 성공을 거둔 그룹이다. 그래미 어워드 10회,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4회를 수상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세계에서 일곱번째로 음반을 많이 판매한 아티스트로 평가되고 있다. 밴드의 리더이자 창시자인 모리스 화이트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과 보컬그룹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유머와 재치로 가득 차 있다. 시종일관 밝은 톤을 유지하는 <언터처블>의 미덕은 연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립이 드리스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장애인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리스와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전신마비 환자라는 것을 잊게 된다. 육체는 비록 한계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정신은 주체적인 선택 여부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들은 통속적인 격식을 깨트리면서 탈선과 자유를 넘나든다. 그것은 의도의 결과가 아니라, 드리스의 타고난 품성의 몫이다. 품성의 발현은 수평적 관계에서 시선을 맞추는 필립의 심성이 반영된 결과다. <언터처블>의 - 부자와 빈민, 이민자와 정주민, 흑인과 백인의 - 이분법이 불편할 수 있지만, 그들의 관계성은 진정한 의미의 소통과 상생을 성찰하게 해준다.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소유한 자원을 의심과 두려움 없이 나누는 건강한 우정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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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도 2012-04-0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좋네요 ..
 
래빗 홀 - Rabbit Hol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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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상영


겨울은 반드시 봄을 맞이한다. 맞이할 것이다. 맞이해야만 한다.

 

<래빗 홀>(Rabbit Hole, 2010) 감독 존 카메론 미첼/출연 니콜 키드먼, 아론 애크하트

 

<래빗 홀>은 <헤드윅>, <숏버스>의 감독 존 카메론 미첼과 배우 니콜 키드먼이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다. 영화의 원작은 데이비드 린제이가 제작한 연극에 바탕을 두고 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 강렬한 인상을 심었던 연극 <레빗홀>은 퓰리쳐 상 수상, 토니 어워즈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을 경험한 부부 이야기에 공감하여 제작에도 직접 참여한 니콜 키드먼은 여전히 아름답고, 민감하며, 긴장감 넘치는 연기를 선보인다. 어린 아들의 죽음 이후, 부부가 겪어 나가는 일상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누구나 직면하게 될 수 있는 상실과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지만, 상투적이거나 관습적인 접근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다. 관객은 고통에 직면하고 극복해 가는 여정의 주체로 위치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감당키 어려운 슬픔

 

교통사고로 갑자기 아들을 잃고 일상을 유지하기도 힘든 코벳 부부, 행복이 컸던 만큼 아들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아내는 역설적으로 아들의 물건을 정리해서 치워버리거나, 아들을 차로 친 가해 소년을 찾아가서 위안을 얻는 기이한 상황이 펼쳐진다. 아내를 위로하고 소통하려는 남편의 시도는 매번 거절당한다. 남편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겪고 있는 다른 여자와 마리화나를 피우며 슬픔을 잊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부부의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 간다.

 

회복 불능의 상처를 안고 가는 사람은 타인의 행복을 바로 보지 못한다.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위로를 할 수 없다. 마당에 심고 있던 화초를 실수로 밟은 이웃 여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마트에서 아이와 함께 물건을 사고 있는 모르는 여자의 뺨을 때리는 황당한 장면은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을 여실히 드러낸다. 베카는 세상 밖으로 조금씩 나가 보지만, 언제나 사람과 상황에 부딪혀서 허둥대고 겁을 먹는다. 마약으로 아들을 잃은 자신의 엄마에게 폭언을 퍼 붓고, 뱃속에 아이를 품은 행복한 여동생을 매번 불안하게 만든다. 주변 사람 하나둘 뒷걸음질 치게 하는 베카는 상실의 동반자인 남편까지 슬픔에서 배제시키며 자신의 밀실로 잠행한다.

 

카메라는 아들을 잃은 코벳 부부, 특히 아내 베카에게 응시하고 있지만, 사실 주변인들 역시 감당키 어려웠던 상실을 끌어안고 숨죽인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상실의 슬픔은 도처에 퍼져 있다. 자녀를 잃고 집단 심리 치료를 십수년 째 받는 사람들, 마약으로 돌연사한 아들과 11년째 이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베카의 엄마,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와 ‘레빗홀’이라는 상상의 공간에서 만나고 있는 십대 소년은 베카의 슬픔 역시 그 많은 상실 중 하나임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떠올리게 하는 <레빗홀>은 코벳 부부의 아들을 차로 친 십대소년이 베카에게 선물한 만화의 제목이다. 현실과 다른 세계로 간다는 점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모티브를 차용한 것처럼 보인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단지 슬픔의 차원일 뿐이고, 다른 세계에서는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는 잠시지만, 현재의 슬픔을 잊게 한다. 그렇게 수많은 차원의 세계를 연결하는 ‘레빗 홀’이 있고, 각각의 차원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면, 조금은 낙관과 위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가 전부는 아니므로,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평정심으로 회복하기를 바라는 베카에 대한 소년의 절실한 소망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깊은 슬픔에 빠진 부부에게 계몽적인 미션을 제시하지 않는다. 슬픔은 온전히 감당해야 할 그 개인의 몫으로, 설사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온전한 위로가 어렵다. <레빗홀>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비켜나 철저히 개인의 고통에만 집중한다. 개개인의 시계는 - 거대담론의 그늘에 가려져 - 미시사의 소우주를 형성하며, 초침과 분침을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슬픔으로 자신을 파괴하고 서로에게 견디기 힘든 상처를 내는 것에도 끝은 있게 마련이고, 생명을 키워낼 새봄의 토양이 준비되어 있다. 깊었던 사랑은 온몸에 상흔을 남기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직면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온몸에 새겨져서 일생을 함께 간다. 즉 슬픔의 무게가 변하여 견딜만한 것이 된다 해도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지 “주머니 속에 넣어가지고 다닐 만한 벽돌”이 되어서 언제든지 꺼내볼 곳에 자리를 잡는다. 남은 세월 그 슬픔을 인정하고,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가야 하다는 것을 조용히 말해주는 영화 <레빗홀>은 회복 불능의 상처를 경험했던 사람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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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 I Wish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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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예정


화산 폭발의 ‘기적’을 꿈꾸는 아이들의 비밀 여행기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I Wish, 2011)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 마에다 코키, 마에다 오시로, 오다기리 조, 오츠카 네네

 

 아이들의 일상을 리얼하게 담아낸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관객 스스로 자문자답하게 만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여덟 번째 장편영화다. 그의 렌즈에 포착되는 순간, 의미 없어 보이는 사사로운 일상은 차원 높은 세계와 마주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든다. 이승과 저승의 중간 역에서 되찾고 싶은 행복의 시간을 가지고 떠나는 <원더풀 라이프>, 어머니에게 버림 받은 네 남매와 사회의 무관심을 다룬 <아무도 모른다>, 세상을 떠난 맏아들의 기일에 모인 가족의 감추어진 비밀과 균열의 조짐을 들추는 <걸어도 걸어도>, 사람의 감정을 갖게 된 인형을 통해서 현대인의 고독과 왜곡된 사랑을 보여준 <공기인형>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줄거리로 묶이지 않는 의미와 감정을 담아낸다.

 

초등학생 코이치(마에다 코키)는 부모의 이혼으로 가고시마의 조부모 집에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코이치의 동생 류노스케(마에다 오시로)는 인디밴드 활동에만 몰두하는 아빠와 후쿠오카에 살고 있다. 가족이 다시 모여 살기를 꿈꾸는 코이치는 화산이 폭발하기를 바라지만, 소원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코이치와 류노스케의 친구들에게도 기적을 소망하는 꿈이 있다. 사서 선생님과 결혼하고 싶고, 가족과 같은 애완 고양이가 되살아나길 바란다. 야구선수, 영화배우, 가면 라이더가 되고 싶다. 그림을 잘 그리고, 여유교육이 다시 시작되며, 학교 숙제가 없어지면 좋겠는 아이들의 바램은 그 나이에 맞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다. 아이들은 신칸센이 교차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기적을 외칠 장소를 찾아 떠나는 비밀 여행을 감행한다.

 

다큐멘터리에서 영화로 선회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소소한 일상에 카메라 렌즈의 포커스를 맞추는 사실적인 연출로 알려져 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 아역배우 야기라 유야가 칸영화제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작인 - <아무도 모른다>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묵직하고 담담한 회색의 <아무도 모른다>는 이번 영화에서 코스모스 가득 핀 들판의 파스텔톤의 희망으로 변주되었다. 무표정한 공허함으로 가득 찼던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절망을 넘어서 건강하게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 일상에 차오르는 경이로운 생기(生起), 그 자체가 진짜 기적이다. 아이들은 어두운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실천함으로써 판타지를 삽입하지 않고도 기적을 만들어낸다.

 

일상과 세계 사이에서

 

아이들은 여행을 통해서 일상과 세계의 경계를 체험하며 한층 성장한다. 코이치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화산 폭발의 재앙을 불러낼 수 없음을 수용하고, 마지막으로 ‘가족 보다는 세계’를 선택한다. “개인에 대한 생각에 몰입하지 말고 세계나 음악처럼 더 큰 것을 생각해보라”는 무관심한 아빠의 말이 아이를 고민과 변화에 직면하게 한다. 가족의 재결합을 간절히 소망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할 수 있음을 고민하는 코이치의 얼굴은 관객의 마음을 파고든다. 아이들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모험 중에 만난 ‘기적 같은 선의와 의도적인 무관심’이다. 그것이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가족이 아닌 세계를 선택하는 코이치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조건이다. 학교를 조퇴하도록 도와주는 양호선생님, 제때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아이들의 탈주에 공모하는 할아버지, 생면부지의 아이들을 기꺼이 먹여주고 재워주는 노부부의 선의가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각자의 고민과 일로 분주한 부모들의 사각지대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부재한 시공간에서 희망을 공모하고 협력하며 더불어 성장한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어린 두 주인공 코이치와 류노스케는 실제 형제다. 감독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오디션 끝에 발견한 보석들로, 배우에 맞추어 시나리오까지 수정했다고 한다. 때로는 작위적인 우연이 겹치지만, 전체적인 줄거리 속에서 거슬림이 없다. 아이들은 각자가 처한 한계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꿈꾸는 기적을 넘어서 삶의 무거운 본질까지 통찰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통해서 우리는 결코 쉽지 않았던 각자의 어린 시절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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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러브 - I am lov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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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나는 사랑이다, 나는 욕망한다, 나는 오로지 사랑으로 존재한다.”

<아이 엠 러브>(I Am Love, 2009) 감독 : 루카 구아다니노, 주연 : 틸타 스윈튼

 

밀라노를 배경으로 한 <아이 엠 러브>는 이탈리아의 명문 레키가(家)의 일원인 엠마가 가식의 굴레를 벗어나서, 자신의 욕망과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엠마는 (외적으로) 재력가 시부모, 명망 있는 남편, 잘 성장해준 자녀를 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 평온한 일상의 파국은 아들의 친구, 안토니오와의 급격한 사랑과 딸의 레즈비언 선언으로 시작한다. 엠마는 안토니오가 요리한 음식을 먹고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딸의 레즈비언이라는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과 사랑을 성찰한다.

 

<아이 엠 러브>는 한 여성의 선택을 통해서 여성의 자유와 상류층의 몰락을 한꺼번에 폭로한다. 남편과 안토니오 모두 그녀에게 문제적 상황에 직면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완벽한 타자이다. 남편은 떠나는 엠마에게 “넌 존재하지도 않았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남편과 엠마 사이에는 ‘사랑'이 부재하였고, 엠마는 오직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외적 스토리 내부에서 자본주의 상류층의 붕괴를 포착한다. 외적 삶과 내부 갈등을 중첩함으로써, 두 공간이 비틀려 균열하는 과정을 탁월하게 영상화한다. 가면을 쓴 얼굴로 피상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재벌들의 파티에서 엠마는 - 같은 공간에 있어도 - 항상 고립되어 있다.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지만, 귀족의 몸에 밴 습성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있어서 늘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식사 시간조차 팽팽한 긴장이 이어져 누구도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다.

 

의견 충돌을 보이며 논쟁하는 남자들과 달리 레키가(家)의 모든 여자들은 - 레즈비언을 선언한 엠마의 딸을 제외하면 - 소비되는 사물로 존재한다. 가업인 직물공장을 유지하자는 의견과 새로운 사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놓고 갈등하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침묵 속에서 은연 중에 연대의식을 공유한다. 배제된 여성은 자신들의 정서적 연대를 구축한다.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해방된 엠마와 그녀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이 오랫동안 마주치는 엔딩 장면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감각적이고 퇴폐적인 이야기는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를 통해서 고전적이고 우아한 예술로 창조되었다. 진부하고 도식적인 서사를 끌어안고 가면서도, 다양한 영화적 방식을 동원하여 강렬하고 뜨거운 에너지를 생산한다. 영화가 제 7의 종합영화임을 확인시켜주는 <아이 엠 러브>는 관객이 오감을 느낄 수 있도록 모든 영화 장치를 활용한다. 엠마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면서 극단으로 치솟을 때, 음악과 미장센이 전환을 일으키며 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룬다. 또한 시청각을 공감각적으로 교차 편집하여 자연스럽게 감각의 전이가 일어난다. 안토니오니가 만들었던 요리는 시각에서 출발하여 미각을 자극하고, 미각은 다시 청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공간을 활용한 감정의 영상화 또한 탁월하다. 엠마와 남편의 정사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내연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안토니오와의 정사는 창문이 활짝 열려 빛이 들어오는 공간에서 시작되어, 외부 공간인 숲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직 잔설이 쌓인 밀라노의 거리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닫힌 창문을 비춤으로써, 엠마의 내면 상태를 포착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엠마가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문들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다가 결국 활짝 열리는 현관으로 빛이 쏟아진다. 또한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레키가(家)의 닫힌 문과 안토니오의 오두막집의 열린 문들은 엠마의 심적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두 공간의 대비는 물리적으로만 존재할 뿐 철저한 부재인 엠마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녀는 평탄한 저지대의 대저택에 살고 있고, 안토니오는 좁고 굽은 길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고지대에 살고 있다. 엠마의 감정은 그대로 공간적 높낮이로 드러난다. 높이 올라갈수록 엠마는 불안하게 흔들리지만 넘실대는 생(生)의 의지로 불탄다.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대신 활용한 부감 샷은 더 많은 감정을 이끌어내는데 성공적이다.

 

진부한 캐릭터일 수 있는 엠마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배우 틸타 스윈튼이다. <아이 앰 러브>는 틸다 스윈튼의 영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감정을 그대로 실어 나르는 드라마틱한 얼굴의 표상을 완벽하게 완성한다. 그녀는 이지적인 상류여성의 모습과 사랑으로 불타는 관능미까지 상반된 모습을 동시에 소화했다.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러시아인으로 이태리어를 써야하는 엠마 역이 영국 출신 틸타 스윈튼에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존 아담스가 담당한 음악 또한 놓치면 안된다. 엠마가 처음 안토니오가 요리한 음식을 먹는 장면, 엠마가 집을 뛰쳐나가는 장면에서 음악은 그 자체로 엠마와 동일시된다. <아이 엠 러브>는 음악이고, 공간이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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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품은삶 2012-01-12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이엠러브. 2011년 제가 뽑은 '올해의 영화'였어요. 아직 리뷰조차 쓰지 못하고 숙제처럼 남겨놓은 영화.
이 영화, '음악, 공간, 사랑'이라는 더불어숲님 말씀에 123% 동의합니당!!
또한 요리가 얼마나 섹시할 수 있는지, 그 요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다지요.
역시 식욕과 성욕은 신경계가 통한다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