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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집단 지성 – 깨어 있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바다출판사, 2016. 3.
'그람시 읽기'의 무게를 가늠하기에 앞서, 그람시를 읽고 싶은 욕망이 앞섰던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앎과 사유가 어렸던 나는 그람시의 사상보다 그의 아우라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람시의 삶 자체가 로쟈 룩셈부르크와 겹쳐지면서, 삶과 사상에 매료되었다. 한걸음 다가가지도 못한 채, 이십 여 년이 흘러버렸다. 그리고 다시 그람시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안토니오 그람시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22쪽).
시간과 공간이 확연히 다름에도, 그람시의 글은 21세기 한국의 정세를 분석하는데 잘 맞아 떨어진다. 민주주의는 과정일 뿐,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반대로 파시즘은 조건이 만들어지면 언제든지 새로운 형태로 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파시즘의 등장은 몇몇 권력자의 의지로 될 수 없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먹고 사는 경제’ 문제만 해결해준다면, 어떤 정권이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일 때, 파시즘은 슬그머니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다. 지난 대선에서 대한민국의 선택에서 가장 큰 변수는 ‘경제적 효용’이었다. 선택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쥐고 있는 시민이 어떤 가치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깨어 있는 시민만이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다.
세상의 가치가 경제를 바탕으로 할 때, 인간관계가 어떻게 파괴되는지, 우리 모두 목도하고 있다. 먹고사는 일이 투표의 방향을 결정하는 21세기 한국의 현실과 1920년대 전후 이탈리아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는 것이 파시즘을 불러 왔다.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최우선일 때, 이것이 파시즘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다. 혁명 역시 현재가 최악의 상황이라고 믿는 민중에게 극한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는 『옥중수고』 이전, 1917년~ 18년 동안 그람시가 쓴 산문을 모은 책이다. 그가 초기 사회 혁명가와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던 시기의 ‘정치 평론집(10쪽)’이다. <1장. 무엇보다 먼저, 2장. 정치와 정치인, 3장. 교육에 관하여, 4장. 자유와 법, 5장. 국가이 병폐들, 6장. 전쟁에 반대한다>로 구성되어 있다. 체계를 갖춘 논문으로서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정독 보다는 자신이 당면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면 좋을 듯하다. 여기에 1차 세계 대전 전후의 이탈리아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뭇소리니와의 의사진행발언을 포함해서 25개의 평론이 실린 이 책의 제목을 – 출판사와 편집인이 – ‘무관심의 증오’로 잡은 것은, 그만큼 그람시가 지성, 참여, 실천에서 ‘무관심’ 만큼 독이 되는 것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리라.
“산다는 것은 지지자(혹은 참여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라는 말을 믿는다. … 무관심은 무기력이고 기생적인 것이며 비겁함일 뿐 진정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27쪽). … 나는 살아 있고 참여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삶에 참여하지 ㅇ낳는 사람들을 증오하며,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32쪽).
여타 평론의 제목에서도 그람시의 단호함이 묻어난다. “구호는 권리이지, 선물이 아니다.”에서 다루는 병원 관료제의 문제점, “경솔한 언동에는 어떠한 인내도 없다.”에서는 ‘비타협-관용’과 ‘불관용-타협’이라는 조합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73쪽)하기, “통제 밖의 자본주의”가 가지는 착취의 본질, 전쟁은 경제적 이익 산출의 중요한 수단임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으로 글을 쓴다. 글의 소재도 전횡무진 한다. 경제적 투기를 하는 사립학교들의 학위 장사, 예술과 무관하게 귀부인 침실에 넘쳐나는 연애 소설과 같은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압권은 그람시가 무솔리니를 상대로 하원에서 의사 진행 발언한 파시즘에 대적한 녹취문이다. 수백 번에 걸쳐 반복할 필요는 없다는 의장의 말에 그람시는 “그것을 혐오스러워할 때까지 계속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밝히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짧은 녹취문에서 우리는 그람시라는 하나의 위대한 인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람시의 정치 평론은 문학처럼 읽히기도 하다. 현란한 언어로 독자를 현혹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행위는 자기 과시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진실함이 베어난다. 현란한 언어보다는 평이한 언어로 진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최대한 가공을 덜 해서 원재료의 풍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연주의 요리를 먹는 기분이 든다.
1990년대 초, 연세대학교 다니던 친구에게 '그람시'를 읽고 싶다고, 졸업 논문을 써볼 생각이라고, 대학도서관에서 그람시 관련 책을 빌려 소포로 붙여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국회에서 논문 서비스를 해준다거나, 시립도서관에서 전문 서적을 충분히 보여하고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친구는 자기 대학에 있는 그람시 관련 서적을 될 수 있는 대로 충분히 빌려서 소포로 보내주었다. 지나고 보니, 참 부끄럽다. 의욕은 넘쳤고, 앎은 일천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때가 되면 이렇게 다시 조우할 수 있다는 거다. 이제 연락도 닿지 않는 그 친구에 대한 그리움까지 더해져서, 나는 또 이렇게 그람시를 다시 만난다.
현재가 최선이라고 믿는 우리의 태도는 옳은가?
그람시의 사상에서 순간순간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다. 5월 봉하에 다녀왔다. 빛이 눈부신 5월, 초록이 떨고 있었다. 난장 같은 축제 분위기에 가족 단위로 넘쳐나는 상춘객들 사이에서, 나는 오롯이 그와 독대하는 기분으로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가 떠난 2009년은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그람시의 부활처럼, 노무현은 그렇게 민주주의의 현재에 머물고 있다. 그들의 말처럼 "깨어있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없이 민주주의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집단 지성의 힘없이, 세상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지성, 그 자체가 용기다. 현실에 수동적으로 안주하기 않기 위해서 지성은 필요조건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