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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평점 :
황정은 작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상.
∎ 경험의 공유와 기억을 현재와 미래로 살아내기
∎ 단정한 문장과 심연으로 가라앉는 깊은 사유
∎ 타자의 고통을 내 몸으로 앓아내는 체현된 절망의 통증
- “희망을 버리고 힘을 내는” 우리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살아내는 ‘삶’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 유기체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스미는 연민과 사랑
체계바라처럼 "불가능한 꿈을 꾸는 리얼리스트" 황.정.은.
작가의 첫 번째 에세이 『일기』를 읽고, 4년만 다시 숨 고르며 그녀의 공개 일기를 읽는다.
12월 3일 계엄 이후, 탄핵까지의 시간이 일기에 담겨 있다.
‘작지만 큰 일기’ 『작은 일기』
개인의 경험이라면 작지만,
집단 경험과 연대가 함께 한 시간의 기록은 ‘큰 일기’다.
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처럼,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탄핵 이후에도 '안도감'과 ‘기쁨’은 현재 우리 마음을 담지 못한다.
일상에 집중하며 살 수 없었음을 매일 아침, 다시 확인한다.
계엄 – 산불 – 싱크홀 – 파면으로 이어진 겨울과 봄 사이
국가 폭력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위안은 사치다.
우리는 욕망을 중립으로 포장한 이들에 대한 자괴감까지 포함하여
공권력이 시민을 향했던 시간 동안 가져야 했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오랫동안 자유로울 수 없다.
이번 주말 청송, 울진, 삼척 피해 지역을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광범위한 상흔이 전후 회복이 요원한 상태로,
여전히 화재가 진행 중인 느낌이었다.
31명이 생명을 잃고, 50여 명이 부상을 당했던 2025. 산불.
흑백영화 한 장면 같은 잿빛 산림 위로 푸른 하늘이 낯설게 처연하다.
하림의 <별에게>를 들으며 『작은 일기』를 읽는다.
사람의 악함과 약함을 생각한다.
부당함을 겪고도 발화, 발설하지 못하는 존재를 떠올린다.
삶과 죽음을 변주하는 책과 영화를 찾아본다.
신간 평가단, 오랜만이다.

꾸준히 해오던 신간 평가단을 수년 전 멈춘 이유는 책이 흔해졌고,
책이 우리 삶보다 더 커지지 않는 것,
글과 삶이 유리된 채 제법 잘 쓰인 매끈한 글들이 넘쳤기 때문이다.
물론 단단한 내면과 올곧은 태도의 작가님 작품은 무조건 사야 한다.
반복 읽기와 선물 소비를 멈추지는 않는다.
- 누군가 내어준 일기를 읽는 것만 한 - 선물이 없다.
좋은 글은 계속 생산하여 읽는 선순환 만들기.
'작은 일기'는 행간 사이, 단락 사이, 길고 깊은 한숨을 채우며 오래 읽게 된다.
about time. ‘다시 읽음’으로 타임머신이 되어 시공초월의 경험을 한다.
글은 여전히 힘이 세다.
연대가 필요한 순간, 마법을 불러온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우리는 어디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환원될 수 없는 '모든 것'으로 트랜스포머하며,
이 세계 어디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황정은 작가의 책은 한 번만 읽은 적은 없다.
작가님은 내가 경험한 세계를 여러 번 다시 살게 한다.
복기해서 읽고, 필사와 메모를 반복하며
경험의 핍진성을 믿는 황정은 작가의 세계로 들어가 내 세계를 오버랩한다.
너와 내가 따로 있지 않다.
고요함의 표피 속에서 나, 그녀,
물질로 환원하는 없는 환대와 연대를 만든다.
다중이 만드는 오버 사운드로 얽히며 독서로 연대하는 집회장이 된다.
행복할 때보다 고립, 고통, 억울함이 일기를 쓰게 한다.
유년시절, 일기 읽기의 시작은 『안네의 일기』였다.
게슈타포를 피해 은신한 안네가 겪는 시간이
현재형으로 내 삶과 하나가 되었다.
이후 작가의 에세이 또한 ‘보여주기 위한 일기’임을 알게 되었고,
소설, 시와 다른 체감을 주는 애서가 되었다.
아니 에르노의 『바깥 일기』와 최현숙의 『작별 일기』를 다시 꺼내 읽는다.
<작은 일기>의 목차를 앞뒤 이어 붙여 만든 한 문장을 만들어 본다.
이 세계를 사랑하는, “너무 고마운 사람”과 함께 “알아보고 눈치채는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아침”을 맞이하자.
삶은 그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절하며 흘러갈 것이다.
그 추운 밤을 그 자리에서 보낸 사람들도 놀랍고, 그들에게 난방 버스며 음식이며, 바람 넘는 고개에서 버티는데 도움이 되는 물품들을 즉시 보낸 사람들도 놀랍다. 그건 나라에서 받은 것도 없어도 위기가 닥치면 들불같이 일어난다는 어느 민족의 성격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남의 곤경과 고립을 모르는 척 내버려두거나 차마 두고 갈 수 없는 마음이 아닐까. 남의 고통을 돌아보고, 서로 돌볼 줄 아는 마음들. - P57
오래전 어느 북토크 자리에서 "사람들의 악함은 약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라는 질문을 받고 엉뚱한 대답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질문도 자주 생각한다. 실은 몇해째하고 있다. 사람들의 악함을 마음에 들여 되짚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게도 그 싹이 무성하게 있으니까. 그런 것이 자신에겐 없을 거라고 믿는 얼굴 앞(65)에 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내게는 그런 입장 역시 악함의 기반이 되는 약함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의 약함에 내가 얼마나 분노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약함은 어느 정도 그의 탓일까. 그리고 권력 가진 이들의 혼돈 그 자체인 악함도 약함에서 그 탓을 찾을 수 있을까. - P64
우리 가족은 1992년에 살던 집을 경매로 빼앗긴 뒤 그 집 그 방에 들어갔다가 1995년 1월 어느 새벽에 다급히 짐을 꾸려 떠났다. 월세가 밀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직은 어디에도 말하거나 기록할 수 없는 그 일 때문에, 그 밤에 나는 몹시 겁을 먹었고 부당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슬펐다. - P68
가급적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이번 한번뿐이니까. 올 엣 원스. 삶의 목적과 의미를 ‘목격’에 두고 산 지 꽤 되었다. 태어나 보고 듣고 겪는다. 이걸 하러 나는 여기에 왔다. 아주 작은 무수한 입자들로 흩어져 있다가 어느 날 인간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세상에 출현해, 기적적으로 출아해, 세상을 겪고 세상의 때가 묻은 채 다시 입자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을 관통한, 그리고 세상이 관통한 더러운 경험체로서.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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