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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어느 때보다 다양한 붉은색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황색. 더 다음은 진갈색.
겨울로 넘어가며 회색.... 검정... 흰색. 죽음은 검정이 아니라 내겐 희다. 별의 마지막이 백색왜성이듯.
프리즈마 색연필 150색이 수중에 들어오면 저 색감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윈저 뉴턴과 펠리칸 잉크 등등이 오늘 도착한다. 말 대신 색에 더 골몰하고픈 계절이다.
가을에 말을 배웠다
망각되기에 좋은 계절이다
이별을 준비중인 나무들과 구름에 갇힌 그림자, 한참 동안을
잠언에 빠져 있던 그가 뒤틀린 소리를 밟으며 계단을 내려간다
그는 오랫동안 말들의 반대편에서 살았다
눅눅한 혀를 피하여 곧고 딱딱한 침묵 속에서 지냈다
좀처럼 껍질을 벗지 않는 말, 금속들의 표면 밖에서 이슬처럼
낮게 웅크렸고 때론 잠도 오지 않았다
어떤 햇살도 구름을 통과하면서 무광택한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일광욕에 필요한 웃음들은 모두 다 날아가 버렸다
창에서 바라보이는 것들은 쓸쓸히 뒷걸음질치는 것들과
어리석은 외출들뿐
아이의 늙은 조카들과 늙은이들의 젊은 조상이
서로의 손을 잡고서 배회하는 듯한 풍경, 말을 걸지 않는 건
자신 속 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흐린 오후
이름 모를 페이지에서 빠져나온 낙엽 한 장처럼 그의 입 근처에서
단풍 든 활자들이 쏟아졌다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공원 벤치 쪽으로 구르는 자신의 말을 좇아 그가 빠르게 걷고 있,
었다
박경원 《시멘트 정원》(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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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 낙엽 대신 세 잎 클로버가 끼워져 있었다. 이 시집이 12월 25일 나온 걸로 보면 봄에 읽었기 때문이리라. 많은 시간이 흘러도 말에 대한 고민, 계절에 대한 말은 변함없어라. 내가 아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