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어쩌다보니 우리집에 시집이 많이 방문했다. 귀찮지만 나는 귀한 손님 대접을 한다. 
 
이병률 시인은 수다쟁이류가 아니다. 말을 시켜도 가장 적정한 언어가 태어나기 전까지 기다려 달라는 태도다. 안 기다려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쓰던 시를 내버려두고 훌쩍 나갔다 오는 사이 사람들이 그의 떨어진 시들을 주워주는 걸 보면서 “사실은 내가 쓰려고 쓰는 것이 시이기보다는 쓸 수 없어서 시일 때가 있다”(내가 쓴 것)고 말하듯이. 이번 시집은 맑은데 맛이 깊은 국, 손에 잡힐 거 같이 가까운데 깊은 하늘 같다.


아픈 데가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 손을 올리는 성자도 아니면서
세상 모든 가시들은 스며서 사람을 아프게 하지요.“
이병률  사람중에서 (바다는 잘 있습니다, 2017)
 
옮겨놓은 것으로부터
이토록 나를 옮겨놓을 수 있다니
사는 것은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이병률  여행중에서 (바다는 잘 있습니다, 2017)
 
발을 땅에 붙이고서는 사랑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완벽한 사랑은 공중에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어찌 삶이 비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병률  이토록 투박하고 묵직한 사랑」  중에서(바다는 잘 있습니다, 2017)
  

 

김이듬 새 시집은 특유의 결기가 많이 누그러진 거 같아 다행인지 섭섭인지 모르겠다. 시인이 내내 불행의 옷을 걸치길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실제로 만나는 것만이 제대로인 만남인 시대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네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그럴 리 없다고 했다. 공격하면 끄고 편히 숨 쉬면 된다. 담배를 끊는 마지막 세대, 죽은 이를 기억하며 낭독회를 하는 마지막 몇몇.”
김이듬  마지막 미래중에서(표류하는 흑발, 2017)

 

  
나이가 들면 시인들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여백이 깊어지거나 사설이 많다. 그래서 나는 신인 시인들의 시집에 더 애정이 간다. 거칠고 뚝뚝 끊기는 호흡이어도 그들의 날숨이 가득 느껴져서 좋다. 만들어진 길을 애써 비껴 엉뚱한 몸짓 발짓으로 일어서 걷기 시작하는 그들. 어떤 시인은 빛 속으로 곧장 걸어간다.
  

돌고래 선언


  
손과 죽음을 사슬이라 부르자. 그들이 손가락을 걸고 있는 모습을 엉켜 있는 오브제라 부르자. 그들은 손가락을 쥐고 엄지와 엄지를 마주한다. 구부러진 몸이 손을 향해 있다. 손이 죽음을 외면하는 것을 흔적이라 부르자. 빠져나갈 수 없는 악력이 그들 사이에 작용한다. 손이 검지와 중지 사이 담배를 끼우고 죽음은 불을 붙인다. 타오르는 숨김이 병원 로고에 닿을 때 그들의 왼쪽 가슴은 기울어진다. 손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자. 손이 기둥을 잡음으로써 손은 기둥이 되고 그것을 선()이라 부르자. 죽음이 선의 형상을 본뜰 때, 다리를 반대로 꼬아야 할 때, 무너질 수 있는 기회라 부르자. 사라진 손을, 더듬는 선을, 부드러운 사슬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들의 호흡이 거칠어지면 담뱃재를 털자. 흩어짐에 대해 경의를 표하자.
 최지인  돌고래 선언」  全文(나는 벽에 붙어 잤다, 2017) 

 

물질과 기억


  
태엽을 감을 적마다
시간에도 감정이 있다는 걸 알았다.
 
감정은 신이 아니었지만
시계를 차고 사우나에 들어가면
자꾸만 바라는 게 생긴다.
 
태어나자마자 청춘이었던 사람은
어떻게 생일 챙겨 줄까?
 
에덴의 뱀을 둘둘 말아
태엽을 만들면
아담과 이브는 알람을 맞췄을 텐데.
  
선악과가 먹고 싶은 시간,
하느님 몰래
산책하고 싶은 시간.
 
창세기는 오전 730분부터.
 
기혁  물질과 기억  全文(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 2014)

 

 

예전엔 허수경 시인의 결이 나랑 맞지 않아서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맘에 착 밀착되던 순간부터 그의 시들을 참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문장이 지나간 행간 여백도 순도 100% 시여서 여운이 오래 남는다.

쓰레기도 흑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보랏빛 구릿빛 빛 아닌 살갗이었다가
허수경  나의 도시중에서(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2011)

 

 

 푸디토리움 (Pudditorium) - 인연 (Nid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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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10-14 19: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집들 제목이 공간을 전부 메우는 것들이네요~ ^^
그러면서 비워주는 곳이기도 하고.. ㅎㅎㅎ

AgalmA 2017-10-15 00:30   좋아요 2 | URL
시집은 책계 휴게소 같지 않아요? 시집 읽으면 숨통이 좀 틔어요ㅎ

2017-10-14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10-15 00:32   좋아요 2 | URL
이런 계절 외투 호주머니에 문지 시집 같은 거 끼워넣고 다니기 좋죠^^
시간이 있음 돈이 없고 돈이 있음 시간이 없고 이 상관관계 어쩌면 좋을까요;;

겨울호랑이 2017-10-14 22: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 「물질과 기억」제목을 보고 베르그송이 시썼다고 생각했네요 ㅜㅜ 이런~

AgalmA 2017-10-15 00:34   좋아요 3 | URL
ㅎㅎ 저도 제목 보고 바로 베르그송 생각했는데....아, <물질과 기억> 뿐만 아니라 사놓고 안 읽고 있는 책 보기 미안해서 집안 운신이 맘이 편하지 않습니다ㅎ;;;

2017-10-15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7 0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