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시선 411
신용목 지음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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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에 가면 물속 돌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보석 같기도 물의 알 같기도, 나 같기도 전혀 다른 타자 같기도 한 그것을 꺼내 보기도 하다가 어떤 것은 집에 가져왔다. 내가 생각한 돌, 내가 가진 돌에는 내 기억과 환상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러나 누군가 각각의 돌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뭐라 답할 수 있을까. 내 경험과 인상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고, 돌이 있었던 장소나 성분에 대해 말할 수도 있지만 돌의 처음과 끝 그리고 본질에 대해서는 결코 말할 수 없으리라.

신용목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시집도 그런 궁지를 말하고 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시구가 있는 모래시계에서 모래시계과 같은 형국이다. 모래시계는 끝없이 자리바꿈으로 시간을 재는 기계다. 모래시계는 자체가 시간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을 움직이고 바라보는 주체에 의해 시간은 측정되고 경험된다. 주체도 환상이라는 문제까지 가져오면 앞으로 나아가기 더더욱 어렵겠지. 이런 복잡한 지경에 대해나는 알고 있거든시는 서사로서 보여주고 있다면, 모래시계시는 환상성으로 그 교차와 중첩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화자는 잤던 잠을 또 자고 꿨던 꿈을 또 꾸며 모래시계에서 모래알들이 떨어지듯 이름이 부서지는 것을 목격한다. 모래는 해변으로 바뀌고 이 모래가 다 어디서 온 건지 알 수도 없다. 모래처럼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돌아보았다. 비슷한 정황을 일찍이 이장욱 시에서도 본 적 있다.

 

 

삼 분 전의 잠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발밑으로 흘러내리는 모래들 내 잠 속에 쌓이고 있었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잠을 추억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잠을 추억하는 자
  
 그때 그 오래된 눈빛은 우연한 것이었으나 아, 이런 바람은 괜찮은데, 모든 우연을 우리는 미리 알고 있었네 삼 년 전의 문 열리고 삼십 년 전의 그대, 마른 등 보이네 눈뜨면 그때인 듯 상한 눈발 날리고 모래처럼 우연한 노래들 내 잠 속의 모래산, 모래산에 쌓이네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그곳에 오래 앉아 있었으나 깔깔한 모래들 아직도 내 잠 속 떠나지 않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기슭을 배회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독백을 기억하는 자 그리고 모래산 바람 부는 그대의 모래산

 

 

이장욱 (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의 시 111, 2002)

 

 

 

누군가가 누군가를, 무언가가 무언가를 계속 가져오며 일어나는 충돌, 거기서 일어나는 환기는 창작의 강력한 자장(磁場)이기도 하지만, 신용목은 이 시집 첫 시 후라시부터 내내 하나의 화두로 추적하고 있다.

 

 

 

 


 

동그라미는 왼쪽에서 태어납니까/ 오른쪽으로 태어납니까//왼쪽으로 태어난 동그라미의 고향은 오른쪽입니까 어디서부터/ 오른쪽은 시작됩니까// 동그라미를 그리는 자는 동그라미의 부모입니까후라시

 

누가 돌을 던져서, 허공의 어디쯤 깨져나간 것이 내 머리는 아닐까? 세계의 뚫린 구멍이 내 생각은 아닐까? 그 둥근 틈으로 모든 침묵이 날아가버려서//우리는 취하고//하나씩 가로등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불빛처럼,//끔찍한 일이다.// (중략) // 유리창이 깨지듯 잠이 깨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면, 오래전 날아온 돌멩이가 잡힌다.” 취이몽(醉以夢)

 

이 불판을 데우는 것은 타오르는 단풍 같습니다. 저 접시에 담겨 나오는 것은 / 갓 떨어진 낙엽 같습니다./ 놀랍게도, 고기는 연기의 빛깔로 익는군요./ 재의 색깔인가요? // (중략) // 어느날, 내 몸속의 잎들이 한꺼번에 지는 날이 있을 겁니다./ 내 몸을 찢고 나온 슬픈 식사가 있을 겁니다. 송별회

 

누군가 느낌을 담아가기 위해 사람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마트에서 부엌까지 비닐봉지에 비린내를 담아가듯 꿈과 꿈 사이로 이어진 생활을 지나가려고/ 누군가 내 뺨을 후려치고 그 손을 내 손목에 담아놓았는지도 모른다흐린 방의 지도

 

끓는다는 말 속에는 불꽃의 느낌이 숨어 있다 비 오는 날 지붕이 끓는 것처럼/ 냄비 바닥의 불꽃 속에 숨어 있는 빗소리의 느낌을 라면가닥으로 삼킨다는/ 말 속에는 또 비처럼 흘러내리는 몸의 느낌이 있다산책자 보고서

 

왜 여름과 가을이 가을과 여름이 방을 따로 쓰지 않는지 몰랐다 왜 밤과 낮이/ 한몸으로 뒤엉켜 나뒹구는지// (중략) // 왜 몸과 몸이 마음과 마음이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었는지 몰랐다 왜 너와 내가/ 그 방에 갇힐 수밖에 없었는지사과

 

   

자신을 돌멩이[*]에 투영하며 존재론적 울분과 슬픔(“이 슬픔엔 규격이 없다”, “슬픔은 대규모로 일어난다”)의 긴 운구 행렬을 보여주는 시인의 연유는 모래시계만큼 오래된 인류의 질문ㅡ“나는 누가 이렇게 오래 들어올리고 있는 술잔일까?”(귀가사(歸家辭))과 다르지 않다. 자주 거론하는 아버지의 죽음이 물음을 더 깊게 만든 이유 같다. 종교가 지금껏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이 시집에 답을 물어볼 만한 존재-신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 연관성이 있다. 입 없는 목소리들이 이름을 부르는 것을 계속 듣는 연유도 그러하겠다.

 


 언제나 부르는 사람의 바닥이 가장 깊어서 그 아래 낮에도 고여 있는 밤처럼그림자 섬

   

 


 

  

돌멩이[*] : 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돌멩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며 많은 작품을 썼는데 가장 낯설게 표현한 사람은 사르트르 아녔나 싶다. 구토에서 로캉탱이 바닷가의 돌을 집어 들고 구토를 느끼는 대목은 아직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데 이해되는 게 신기하다.

 

※ 이 시집에 대한 허수경 시인의 추천글은 장 그르니에 《섬》의 서문을 쓴 카뮈의 글만큼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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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8-26 2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 모래시계를 보니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아날로그 시계는 바늘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표시하고, 디지털 시계는 숫자로 시간을 표시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립니다. 디지털은 ‘존재‘의 있고 없음을 통해 인식을 하고, 아날로그는 변화‘ 또는 ‘현상‘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AgalmA 2017-08-26 22:12   좋아요 1 | URL
네, 사고 전환으로 삶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듯이 내부적 갈등, 해결방법도 연관되겠지요.

서니데이 2017-08-26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처음 보고 고기 말린 건 줄 알았...^^;
돌이라고 하면 하얀색 회색 검은 색이 익숙해서 그런 걸지도요. 근데 어디서 발견(?)하셨어요, 저 돌??

AgalmA 2017-08-27 00:32   좋아요 1 | URL
육포 색깔이기도 하지만 배고픈 거 아닙니까ㅎㅎ 낙엽과 고기를 환유로 연결한 신용목 「송별회」시 같은 상황이네요ㅎ;; 여행 한참 다닐 때 군산 바닷가에서 가져 왔지요.

서니데이 2017-08-26 22:57   좋아요 0 | URL
그런 걸까요.^^

2017-08-27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