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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개소리의 본질을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본다.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러시아어 개인 교사였던 파니아 파스칼의 일화는 다각도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파스칼은 요양원에 있을 때 문병 온 비트겐슈타인에게 ˝마치 차에 치인 개가 된 느낌이에요˝라고 말했다가 ˝당신은 차에 치인 개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소. ˝라는 말을 들었다. 앓는 소리를 조금 과장한 것에 대단히 매정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에겐 사소하지 않았다.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가정해 파스칼의 말이 ‘진실에 대한 무관심과 생각 없음‘, ‘다른 누군가에게서 얻은 묘사로 별생각 없이 그리고 사태가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고려없는 되풀이‘였기 때문에 비난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비트겐슈타인의 기준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우리 말들은 대부분 개소리다. 인사치레와 중구난방 쌓인 지식과 어디서 들은 소문과 관용어와 추측과 비유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면 침묵하란 지침으로 산다면 세상살이가 참 벅찰 거다. ˝좋은 봄날이죠? ˝하는 인사에 ˝강릉 기타 등등 지금 여기저기 불 나서 난리인데 무슨 좋은 날 타령입니까? ˝대답한다고 해서 이 말의 진실성을 긍정할 수만도 없다. 각자 판단하는 진실의 방향, 말하는 방법, 감정 조율, 문해력, 문장력, 인과적 해석 등을 총동원해 제대로 말을 하자고 들면 우린 입을 떼기 어렵다.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모호한 개소리 함정에 즉각 빠지기 쉽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습득해도 개소리 기술이 더 고급할지 몰라도 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개소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도 말하기를 요구받는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할 기회나 의무들이 화자가 가진 그 주제와 관련된 사실에 대한 지식을 넘어설 때마다 개소리의 생산은 활발해진다. 이 불일치는 특히 공인의 삶에서 일반적이다. ˝
공인의 삶뿐만이 아니다. SNS, 각종 커뮤니티, 블로그 등을 통해 일반인들의 개소리들도 적잖이 노출되고 있다.
진실이 중요하다 강조하지만 개인의 자유, 발언권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세상은 큰 비난을 받을 거짓말, 불쾌함을 주는 개소리로 더 어지러운 거 같다. 오염된 언론, 가짜 뉴스, 조작된 인터넷 글 때문에 믿을만한 정보 찾기도 힘들다. 거짓말쟁이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치밀히 설계해 실행하고, 거짓말보다 덜 분석적이고 덜 정교한 개소리들은 진실이 뭐든 자기 목적에 맞도록 소재들을 선택하고 가공하며 무한히 증식한다. 보통 진실을 유일한 어떤 것이라는 통념으로 볼 때 이 무차별한 협공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파스칼의 저 예처럼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처럼 극도의 정확성을 추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더 큰 문제는 정확히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저자가 진단한 ‘진실과 기만 양쪽 모두에 대한 노력의 포기 아니면 계속되는 개소리‘라는 회의적 결말 외에 더 나은 것은 없나.
˝말하는 사람의 입맛에 맞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마구 주장하는 개소리 행위에 과도하게 탐닉하다 보면, 사태의 진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정상적 습관은 약화되거나 잃어버리게 된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같은 게임 속에서 반대편으로 활동한다. 그들 각각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사실에 반응한다. 비록 한쪽의 반응은 진리의 권위에 저항하며 그 요구에 맞추기를 거부하지만 말이다. 개소리쟁이는 이러한 요구를 모두 무시한다. 그는 거짓말쟁이와는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쟁이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사실을 전달하거나 은폐하려는 사람은 실제로 어떤 식으로든 확정적이고 인식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고 가정한다. 진실을 말하거나 거짓말을 하는데 그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사물을 잘못 이해하는 것과 올바로 이해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며, 적어도 때로는 그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어떤 진술이 참이고 어떤 진술이 거짓인지를 규명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오직 두 가지 대안만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진실을 말하려는 노력과 기만하려는 노력 모두를 그만두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내세우기를 삼간다는 뜻이다. 두 번째 대안은 상황이 어떠한지를 기술하려는 주장, 그러나 개소리 밖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주장을 계속하는 것이다. ˝
저자는 회의적인 두 가지 대안을 말했지만 사실상 한 가지다. 진실을 말하려는 쪽도 기만하려는 쪽도 현실적으로 그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무소유조차 주장이 되는 구조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밤낮없이 말하는 장이기도 하다. 거리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라 생각하는 성경이나 불경을 크게 읽고 있어보라. 얼마 되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잘못하고 있다는 눈총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객관적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신뢰할 만한 방법을 가질 수˝ 없다고 간주하는 회의주의도 개소리 확산의 원천이다. 우리는 완벽한 ˝정확성correctness˝을 얻지 못하게 되자 ˝진정성sincerity˝이란 규율에 매달린다. 공동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으니 자기를 정직하게 충실히 전달해 무엇을 이뤄보겠다는 대안인데, 우리는 진리 파악, 자신에 대한 옳은 기술은 고사하고 정작 자신 자체에 대해서도 정확히 모른다. ˝진정성˝을 강조할수록 그에게서 거짓과 개소리를 보려는 시선과 입들이 똥파리처럼 몰려드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절망스럽게도 개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오지 않는 세상은 적어도 지구에는 없는 것 같다. 개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