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과 심상정 대표의 한미 FTA 협상 건에 대한 토론을 찬찬히 읽어 봤다. 두 사람의 입장 차이를 객관적으로 보려 했다.
그런데 눈에 밟히는 건 노 대통령의 고뇌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말이든 글이든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지는 내게 너무 와 닿았다. 소통의 피로와 좌절감에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모든 문제에 관한 토론에 응한다는 것은 시간상으로나 능력상으로나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토론이 다 가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노력은 했으나 경제적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심 대표가 주장한 만큼의 진보를 이루어 내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왜 그 정도밖에 가지 못한 것인지는 심 대표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심 대표가 이 나라의 주류 정치세력이 되지 못한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든 저는 좀 더 유능하지 못했던 점에 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 대표는 제가 ‘토론을 거부’하는 것은 전임 정권의 책임자가 가진 역사적 임무를 다하는 일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소제목을 보면, 전임 대통령답지 않다는 표현까지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전임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에 있었던 일에 관하여 질문이나 토론의 제안이 있다 하여 일일이 응답을 하는 것이 가능한 일도 적절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래야 역사적 임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심 대표는 글 마지막에서 머지않은 기회에 토론의 기회를 달라고 합니다. 제가 민주주의 2.0에 올린 글을 보고 토론을 제안했으니 이곳에 와서 이 글에 이어서 토론을 하면 안 될까요?
저는 심 대표의 글을 읽다가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에 노 전 대통령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는 대목을 발견하고 좀 혼란스러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심 대표님은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노무현이나 이명박이나 다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중도 진보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좋지 않았지요.
그런데 오늘은 저를 이명박 대통령과 구별하여 말해주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과연 앞으로도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제가 혼란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토론이 부족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은 토론을 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 주장, 그리고 욕설과 싸움을 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싸움을 멈출 수가 없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그런 와중에도 여론 조사 결과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여론이 엎치락뒤치락 춤을 추더니 마지막 협상을 타결하고 나자 지지로 돌아섰습니다.
이쯤 하면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 아닐까요? 승복이 안 되더라도 싸움은 그치는 것이 민주주의 아닐까요?˝
˝개중에는 진정으로 의문이 있어서 질문을 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심 대표의 이 글처럼 비판이나 시비를 위하여 질문을 하거나 토론을 제안하는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이 불명확하거나 시비조인 글들도 많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는데 꼭 이틀이 걸렸습니다. 재주도 부족하고 틈틈이 글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당하기 벅차다는 저의 말이 결코 변명이나 회피만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발췌 출처 :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List.do?blogid=0EuFi&categoryId=746532]
대통령직에서 물러 나서도 노 전 대통령이 소통 창구를 열어놔 이런 논의들을 볼 수 있게 돼 다행이었다.
5차 대선 토론도 그런 풍경이었지만 우리는 대개 토론이 아니라 싸움을 하고 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때에도 누가 말을 걸어오면 대꾸를 해야 한다. 길을 묻는 자에게, 카톡을 해오는 이에게, 직장 상사의 지시에, 부모의 전화에, 배우자와 자식과 친구의 요청에.....
말을 할 줄 안다는 건 대화와 토론에 임해야 할 당위를 만든다. 중요한 직책에 있다면 책임의 무게는 더 커진다. 노 전 대통령 옆에서 그 무게를 고스란히 봤을 문 후보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인생행로를 보면 뜻에 맞는 행동(학생운동, 인권 운동)은 하되 자신이 빛나게 나서지 않았다. 사법연수원에서 수석을 하고도 학생운동 경력 때문에 채용되지 못했고 특전사로 강제 징집 당하고 감옥에 가는 등 많은 불이익을 당했으면서도 묵묵히 견뎌내기만 했다. 그런 훈장을 자랑하며 정치권에 들어간 자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조금이라도 욕심이 있었다면 노 전 대통령이 정계 입문할 때 같이 갔어야 했다. 머리도 좋고 꽃미남인데도 평범한 사람의 삶에 만족할 줄 알았던 사람 같다.
문 후보의 토론 실력을 보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인데 그의 고단함을 짐작해 한숨만 쉰다. 그는 순발력 넘치는 사고보다는 꼼꼼히 오래 생각하는 사람 같다. 노 전 대통령의 말처럼 (합리적 보수에 가까운) 중도 진보 이상이 되진 못할 거다. 자기주장의 관철만을 앞세우는 세력들 속에 한국 정치 토양은 이조차도 제대로 나아가기 어렵다.
문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노 전 대통령이 한미 FTA 건에 대해 끝까지 시달렸던 것처럼 사드 재협상 건이 문 후보에게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모두가 짐작하다시피 개헌, 내각제 개편, 언론 플레이 등등 얼마나 많은 문제로 시달릴지 뻔히 보인다. 5월 2~3일 내내 시끄러웠던 문 후보와 세월호를 엮은 SBS 가짜 뉴스 보도는 전초전에 불과할 뿐. 시민들이 예전보다 많이 깨어 있다는 게 유일하면서도 가장 든든한 힘일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승복이 안 되더라도 싸움은 그치는 것이 민주주의 아닐까요? ˝라고 한 의미는 이해하지만 민주주의 이전에 사람의 삶이기 때문에 말의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 이 토론의 마무리에서 심 대표가 ˝이 토론은 결국 제2의 심상정, 제2의 노무현이 바통을 이어갈 것이다..... 토론은 시대의 몫이 되었다.˝라고 말했듯이. 끝내고 싶어 하지 않는 자, 끝낼 수 없는 일은 어디든 있으니까.
그런데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모두의 사유가 간단히 공유되는 시대가 오면 토론도 원시적인 소통 방법으로 판명될지 모른다. 토론은 없고 전략 싸움만 되는 건 아닐까.
˝ 과연 모든 게임에는 각각에 대한 최적의 전략이 존재할까?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한 이가 바로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로 많은 이에게 알려진 수학자 존 내시다. 내시는 1950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가능한 모든 게임에 최적의 전략이 존재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즉, 아무리 복잡한 게임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최적의 전략이 최소한 하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시의 경로를 기리기 위해서, 모든 선수가 최적의 전략을 선택한 상황을 ‘내시 균형 Nash equilibrium‘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내시 균형에 따라 각각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최적의 전략을 ‘내시 균형 전략‘이라고 부른다.
인간을 괴롭히는 문제 중 많은 수가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모든 게임에는 최적의 전략이 존재한다는 게임 이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게임 이론을 통해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와 같은 기대는 게임이론이 등장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아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게임 이론이 제대로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회의론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만 것에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이 큰 역할을 했다.
맞대응 전략은 상대방이 이전 시행에서 선택했던 행동을 무조건 따라 하는 반면, 파블로프 전략은 이전 시행에서 상대방이 협동을 한 경우에는 자신이 이전 시행에서 선택했던 행동을 반복하고, 이전 시행에서 상대방이 변절을 한 경우에는 그 반대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ㅡ 이대열 《지능의 탄생》 중
503호 님과 최순실 무리들은 ‘내시 균형 전략‘을 짠 상태겠지만 ‘죄수의 딜레마‘, ‘맞대응 전략‘, ‘파블로프 전략‘ 등 다양한 전략에서 얼마나 협동하고 변절하고 있을까.
인간의 이 궁지에 대해 유발 하라리는 좀 더 나은 해법을 제시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