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의 철학 - 이진우 교수의 공대생을 위한 철학 강의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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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아리스토텔레스)이라든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파스칼)라는 오래된 정의가 있다. 바야흐로 생각보다 말이 난무하는 세태에서 그 정의들은 매우 낡아 보인다. ‘생각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다. 포퍼는 인간과 동물의 지식을 차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물은 물론이고 우리 인간도 오류를 저지르는 불완전한 존재”(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라고 강조했다.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또는 반증주의처럼 가설을 사후 시험과 경험적 적용을 통해 검증하는 것이 인간의 독특한 사고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과학적 방법론이다. 지식과 정보와 팩트가 강조되는 지금 시대에서 기술과 과학은 이제껏 그래왔듯 앞으로의 인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포퍼는 ‘반증을 무조건 피하는 독단적인 태도는 근대 이전 과학의 특징이라고 말했지만, 근대로 끝났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도처에서 사이비 과학과 확증 편향을 만나고 있다. 이보다 더 위험스러운 것은 과학의 맹신으로 자기비판적 자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이다. 인공지능이나 유전 공학, 첨단의 기술에서 우리는 제어하기보다 끌려가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자기비판적 자세가 결여될 때의 위험성을 통찰한 포퍼는 열린사회라는 정치철학 용어를 만들게 된다. “열린사회는 지배자가 어떤 비판과 반박도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와 대립되는 개인주의 사회이며 추상적 사회’(무비판적으로 전통적인 규범과 관습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이다.

 

열린사회는 건강하고 생산적인 긴장을 수반한다. 비판과 토론, 그리고 더불어 합리적인 사고가 성숙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함으로써 자신의 오류를 제거하고 보다 나은 의견에 도달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민주적 긴장이 열린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한국 국민들은 자신의 나라가 배신운운하며 주군의 권위를 강조하는 닫힌사회로 퇴보한 것을 보았다. 이 세계에 완벽한 유토피아도 완벽한 민주주의도 없는 것이 절망이 될 수 있을까. 한국의 촛불 집회는 절망이 끝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 예였다.

 

 

 

이토록 정치적 자유를 강조하는 우리도 경제 문제 앞에선 기가 꺾인다. 나 아렌트정치가 단순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행정으로 축소된다면 정치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는 독창적 인식을 보여줬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작업·행위로 구분하면서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노동과 인공적 환경을 만드는 작업과는 달리 오직 행위만이 정치적 인간 조건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88만원 세대’, ‘잉여사회라는 신조어들이 설명하고 있듯이 우리는 정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고립과 관계 결여 속에서 원자화된 대중으로 배제되고 축소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 흡수되고 만다면? ‘타인과 사회에 대한 무관심,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무능력속에서 아이히만과 악의 평범성이 탄생했다. 자기비판 의식은 이토록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들여다보고 있을까.

 

 

그문트 프로이트는 자아는 자기 집주인이 아니다”(정신분석 강의)라고 했다. “정신분석학은 이제까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고 믿었던 이성과 의식을 철학의 왕좌로부터 끌어내린다.” 칼 포퍼는 정신분석학이 검증 불가능하므로 경험과학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현재 뇌과학이 인간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프로이트 다음 말은 그것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우연이란 없는 것이다”(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 더구나 이 마음의 집은 상황이 복잡하다. 자아는 외부 세계, 초자아, 이드의 세 주인을 섬기느라 집주인으로 맘 편히 살기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는 걸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쾌락 충동을 가지고 있다가 될 것이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이성적이 될수록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경쟁, 지배, 파괴와 같은 공격 본능도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성을 강화하는 본능과 공격적 충동을 내면화하는 본능은 그렇게 인류 문명을 이끌어 왔다. “쾌락을 추구하는 성 본능을 통해 공동체가 이루어진다면, 문명은 리비도의 산물이다.” 즉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을 결합시키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에로스이다.

 

에로스의 목적은 개인을 결합시키고, 그다음에는 가족을 결합시키고, 그다음에는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결합시켜, 결국 하나의 커다란 단위즉 인류로 만드는 것이다.”(문명 속 불만)

 

 

 

 

 

 

프로이트 자아는 자기 집주인이 아니다"라는 말은 르틴 하이데거 다음 말과 닮았다.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체 또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존재와 시간) 이 말은 우리 존재의 의미가 (자연·부모·신과 같은) 다른 존재자에게로 환원된다고 해서 해명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설명한다. “전통 철학이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는 의식철학의 모델에 바탕을 두었다면,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나와 세계의 의미를 통해 통합된 구체적 상황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유명한 현존재(Dasein), 세계--존재(In-der-Welt-sein)는 이런 관계성의 맥락에서 나왔다. 이런 철학 기반의 하이데거가 현대 기술의 도구적 합리성에 회의적인 건 당연했다. 도구적 합리성을 대변하고 실현하는 사람들이 미국인과 유대인이라고 본 하이데거의 철학적 편견은 반유대주의와 반미주의로 드러난다.

 

   

 

하이데거의 애매모호한 사유를 비판했지만 스 호르크하이머-오도르 아도르노도 기술의 진보에 회의적이었다. “서양의 고대 문명이 신화에서 벗어남으로써 시작되었다면, 계몽의 이성은 신화와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인간이 계몽되면 될수록 더욱더 깊이 신화 속으로 빠져 들어가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와 직면한다고 보았다. 야만적 상태가 계몽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했다.(계몽의 변증법) 공포의 원천인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도구적 이성’(계몽)을 통해 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로 만들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진단한 야만의 상태는 나쁜 경우 4차 산업 혁명의 미래를 예견한다도 하겠다. 이미 문화 산업에서도 욕구와 가치 충족에 급급한 우리는 전혀 승리자의 모습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폴 사르트르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존재와 무;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말은 그다지 힘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불안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방식(자유)’보다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수동적 방식(자기기만)’에 더 익숙해져 간다. 자신의 직업적 역할에 더 충실한 현대인의 모습, 관태기(관계 피로증)로 인해 타인과 있기보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를 대변하듯 사르트르는 타인들은 지옥이라고 말했지만 타자나를 바라보는 자’”라고도 말했다. 타인을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써 본다면 타자는 우리의 존재 근거를 밝혀주는 비밀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너무 힘들어 신에게 달려간 사람에게는 이런 예약 문자가 전달된다. “은 죽었다.”(즐거운 학문) 리드리히 니체 이전에 신의 죽음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헤겔은 이미 1803신앙과 지식(Glauben und Wissen에서 새로운 시대의 종교의 토대가 되는 것은 신 자체가 죽었다는 감정이다.“라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말함으로써 허무주의 시대의 도덕적 문제를 예고한다. 니체는 당대에 만연한 분위기를 도전적 언어로 표현했을 뿐이다.”

삶의 허무로 신을 찾는 이들에게 니체는 기독교가 바로 허무주의의 기원이라고 단언한다.” 니체 위버멘쉬 사상이 잘 말하고 있듯이, 내가 이 글 처음부터 지금까지 되풀이해 말하고 있듯이 우리 자신을 초극하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신에게 책임과 구원을 전가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예술은 덜 부담스럽게 날 행복하게 해주겠지 싶어서 찾아가도 아주 편하진 않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나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 뺨치는 예술 작품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예술을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 정도로 감상하고 싶은 당신은 티켓에서 다음 주의사항을 본다. “사회의 물질적 조건이 변화하여 우리의 지각 방식이 바뀌면 결국 예술도 변화한다.” 이러한 예술의 운명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한 사람이 터 벤야민이다.

 

모든 예술에는 이제 더 이상 이전처럼 관찰되거나 다루어질 수 없는 물질적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은 현대 과학과 현대의 활동에서 가해져올 영향들을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다. 물질이든, 공간이든, 시간이든, 20년 전부터 그것들은 오래전부터 띠어온 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엄청난 혁신들이 예술의 테크닉 전체를 변모시키고, 그로써 발명 자체에 영향을 끼치며, 결국에는 예술의 개념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를지 모른다는 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현대 예술은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수동적 태도에 만족하지 않는다. “창조성과 천재성, 영원한 가치와 비밀 같은 일련의 전승된 개념들을 폐기시킨다.” 아우라(Aura)의 붕괴.

“‘블록버스터란 단어가 원래 2차 세계대전 중에 쓰인 폭탄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영화의 기능을 암시한다.” ‘대중의 정신을 분산시키고, 지각 구조를 변화시키고, 대중을 동원하는정치 의도가 교묘하게 깔려 있는 영화미디어에서 우리는 관음증적 관중 이상이 되고 있는가, 즐기는 소비자 이상이 되고 있는가.

   

 

 

이성이 이 세상과 역사를 지배한다고 해석한 헤겔을 를 마르크스는 비판했다. 그의 뜻을 저자는 풀어썼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성이라는 철학적 전제를 설령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가 온갖 명분으로 자행한 대학살, 착취, 잔혹한 전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소화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관념론적 믿음은 종종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불의를 역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에 좀처럼 사회 변화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논리를 뒤집어 인간의 정신이 물질적 조건으로 규정된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그가 본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공산당 선언)로 귀결된다. 슬프게도 노동의 분업으로 더 나은 세계가 열릴 것이라 진단한 마르크스의 비전은 지금 다르게 펼쳐지고 있다. 갖가지 분업으로 나뉜 노동을 기계가 접수하고 있는데 노동자가 건너갈 수 있는 다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지금 시대는 생산보다 더 복잡한 분배가 필요한데 여전히 사회 변화의 실천은 더디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 세상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거나 추구하지 않은 것의 총체라는 생각을 하며, 어쩐지 참담한 심경이 되어 이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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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4-24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이런.. 이번 리뷰는 ˝We are the Wolrld˝도 아니고, 제가 이름만 들어본 많은 이들이 많이 나오는 군요.. 많이 어렵네요. 어제 대선후보 TV 토론을 보면서 사람의 생각을 멈추게 하는 대표적 도구인 TV를 통해 우리가 판단을 하게 되는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보다 좋은 마케팅 (정치인을 상품이라 본다면)을 위해 동원된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걷어 내고 그 안의 메세지를 발견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찾기도 어렵고 설사 찾았다고 하더라도 기대보다 작은 허무감은 어쩔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요. ^^:

AgalmA 2017-04-24 17:04   좋아요 2 | URL
어려운 부분은 많이 쳐냈는데도 그런가요ㅜㅜ; 리뷰가 너무 길어져서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비트겐슈타인은 빼버렸는데ㅎㅎ어쩔 수 없죠. 이 리뷰 쓰느라 제 책 읽는 시간을 더 뺏기긴 싫어요ㅎㅎ

대선토론이 이 나라 국민성 보여주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들더군요. 홍 막말 비롯 토론을 무슨 말싸움에서 이기기 쯤으로 생각하는 행태들을 보며 말하기도 잘 안되는 사람들이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국정을 어떻게 하자는 건지. 합리성은 개뿔! 부정선거였다 해도 박근혜 씨가 당선될 정도로 표를 받은 것만 해도 이 나라의 ‘생각없음‘ 상태를 정말 잘 보여주죠.
합리적 사고도 비판되는 마당에 이 나라는 거기까지도 못 가고 있으니....
요즘 인터넷에서 페미니즘 논쟁들 보며 자기 편향 논리를 합리적 사고, 표현의 자유로 착각하며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내 생각이 잘못된 건가 한참 짚어봐야 했다는...그 이상한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공부하고 글 쓸 생각을 하고 있는 터라 아주 피곤합니다.... 민주주의는 정말 피곤한 정치 체제입니다ㅎㅎ;;


겨울호랑이 2017-04-24 17:13   좋아요 2 | URL
^^: 부족한 것은 제 내공이 모자란 것이고, 앞으로 가야할 길을 보여줘서 저는 고맙지요.ㅋ 갈 길이 멀군요 ㅜㅜ

그래도 지난 번 대선 때 있었던 토론 낭독회보다는 조금 나아진 듯 해서 작은 성과라 생각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이번 대선 토론회의 의의를 찾고 싶네요. 개인 또는 사회가 더디게 발전한다고 해도 이처럼 뜨거울 불에 데이다 보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어느 정도의 방향성을 가지고 나가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이 역시 갈 길이 멀군요. ㅠㅠ

페미니즘과 관련해서는 제가 잘 모르기 때문에 말하기 조심스럽네요.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상태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문제에 대해 공감하기 보다는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은 무조건 문제다라는 극단적인 사고가 문제의 공론화를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AgalmA님께서는 페미니즘 공부 중이시군요.^^:

북다이제스터 2017-04-24 2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근 이성이 아니라 애로스죠. ㅎ 긴 글이라 나중 세 번 정도 나눠 곱씹어야 할 방대하고 좋은 글입니다. ^^

AgalmA 2017-04-25 01:53   좋아요 0 | URL
저자는 쉽게 잘 전달하고 있는데 그걸 압축하려니 어렵더군요.
리뷰 쓸 때마다 늘 느끼는데 내용 이해보다 전달이 더 어렵습니다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