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기억을 걷다 - 옛사람의 손길과 우리 발길의 만남
최보길 지음 / 살림터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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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는 지세(地勢), 분위기, 곳곳에 퍼져 있는 유적들을 볼 때 경주와 매우 흡사하다. 강화에는 청동기시대부터 한국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야기와 유적도 많아 경주보다 한국 역사를 더 많이 보여주는 장소라 할 수 있다. 헌데 경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씁쓸한 점이 있었다. 너무 많기 때문일까. 방치되어 있는 유적들이 꽤 많다는 생각을 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인 봉은사의 것으로 알려진 ‘하점면 5층 석탑(보물 10호)‘, 신라의 미소나 백제의 미소처럼 고려 혹은 강화의 미소를 보여준다고 할 ‘하점면 석조여래입상(보물 615호)‘이 시골 산속에서 허물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말이다.

이 책은 강화와 연결된 한국의 여러 역사와 문화,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어 유익했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이야기들을 밑줄긋기로 소개한다/

고려산이라는 이름은 몽골의 침략으로 도읍을 강화로 옮긴 고려 정부가 강화도를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같도록 꾸미는 과정에서, 개성에 있었던 고려산과 같은 이름으로 바꾸어 부른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련산은 장수왕 4년 천축조사(인도에서 온 고승)가 고려산 정상에서 날려 보낸 청, 백, 황, 적, 흑색의 오색 빛깔 연꽃이 내려앉은 곳마다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현재에도 흑색 연꽃이 떨어진 흑련사를 제외하고는 청련사, 백련사, 황련사, 적력사(적석사)는 부처님을 향한 수행과 기도의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불교에서 연꽃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합니다.

청, 백, 황, 적, 흑 다섯 색깔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음양오행을 상징하는 색으로 오방색이라고 합니다. 황색은 오행 가운데 흙으로 중심부의 색이고 오방색 중에서 가장 고귀한 색으로 여겨집니다. 황제만이 황색 옷을 입는 것과도 관련이 있지요. 청색은 나무에 해당하며 방위로는 동쪽을 의미하고, 창조, 생명, 그리고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또 백색은 쇠에 해당하고 진실, 삶, 순결 등을 뜻하고, 적색은 불에 상응하고 남쪽과 정열과 열정을 상징합니다, 끝으로 흑색은 오행 가운데 물을 나타내며 북쪽과 인간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이렇듯 고구려 장수왕 때 인도의 고승을 통해 뿌려진 오방색의 소망은 그 떨어진 자리마다 지어진 절을 통해 세상으로 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 다섯 색깔의 사찰 중 청련, 황련, 적련(적석), 백련사는 있지만 ‘인간의 지혜‘를 뜻하는 흑색 연꽃만이 피고 있지 않습니다.
ㅡ‘강화에 불교가 들어오다‘ 중

오늘날 우리는 무덤의 격을 능, 원, 묘, 총, 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능이라 함은 왕과 왕비, 원은 왕세자의 왕세자빈 또는 왕세손과 왕세손비, 묘는 왕위와 관계없는 왕족과 일반인의 무덤을 총칭하는 명칭입니다. 또 총은 그 규모로 보아 당시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그 주인을 알 수 없는 경우에 붙여진 이름이고, 분은 발굴이 되지 않아 무덤으로만 추정되는 무덤을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얼마 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의 왕릉인 동구릉과 비교하면 강화의 고려왕릉은 초라하기까지 합니다. 왜 그럴까요?
.... 강화에 있는 고려왕릉의 초라함은 무신정권기 고려 왕의 권력과 비례하는 것입니다.

강화로 도읍을 옮기는 것은 한 국가의 미래를 위한 ‘모색‘이 아니라 어려움을 잠시 ‘모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강화천도‘는 고종이 아니라 최충헌에 이어 집권한 최우의 생각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강화천도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대몽항전을 위한 돌파구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것은 최씨 무신정권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강화에 도착한 최우는 천도 이전 삶과 다를 바 없는 호화로운 삶을 살았으며, 단 한 번도 강화 밖으로 나아가 백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실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고려의 백성들은 강화도에 안전하게 피난 온 조정으로부터 "산과 섬으로 들어가라"라는 수동적 방어책만 들었을 뿐입니다.
ㅡ‘남한의 고려왕릉‘ 중

선원사는 최고 권력자인 최우가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지은 사찰입니다. 백성들을 육지에 남겨놓고 왕과 지배층만이 강화로 옮겨 온 사실과 당시 육지에서 전쟁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백성들을 생각하면, 부처님의 힘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자 절을 지었다는 것이 감동적이지 않고 씁쓸한 웃음만 짓게 합니다.

선원사가 유명해진 것은 송광사와 더불어 고려 후기 2대 승보사철이었던 점도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보관했던 것으로 더 유명합니다.

대장경이란 경, 율, 논 삼장을 일컫는 말입니다. 경이란 부처님의 말씀이고, 율이란 부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한 규범을 말하고, 논이란 ‘경‘과 ‘율‘에 스님이 해석한 설명을 단 것입니다. 불교 경전을 인쇄본으로 처음 만든 것은 북송 때 제작한 북송관판대장경인데, 이는 여진족이 세운 금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현종(1011) 때 처음으로 대장경을 조판(초조대장경)하였고, 이후 내용을 더 보충해서 속장경을 만들었습니다. 속장경은 중국, 거란, 일본의 경전을 수집하고 조사해서 동아시아 불교의 경전을 집대성한 것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했으나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이후 선원사에서 다시 대장경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은 없어진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을 다시 만들었다고 해서 재조대장경, 고려시대 완성된 대장경이기에 고려대장경, 그 판각본이 8만 1, 258매라는 데서 비롯되어 팔만대장경이라고 불렀습니다. 불교에서 인간의 수많은 번뇌를 ‘팔만사천법문‘이라고 부르듯이 ‘팔만 혹은 팔만 사천‘이라는 숫자는 ‘많다‘라는 의미로 여기기도 합니다.

한편 팔만대장경의 제작 전통이 강화도에 고스란히 남아 ‘맹인들의 훈민정음‘이라 불리는 훈맹정음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는 강화도의 부속 섬인 교동에 살았던 박두성이 만든 한글 점자체계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강화에서는 팔만대장경뿐만 아니라 <상정고금예문>도 인쇄되었다. <상정고금예문>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그 편찬 기록이 전해온다. <상정고금예문>은 예부터 고려시대까지 전해오는 예절에 관한 글들을 모아 정리해놓은 책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ㅡ‘인쇄 문화가 꽃피다: 선원사와 팔만대장경 그리고 훈맹정음‘ 중

강화도에는 진강산, 대모산, 형구산, 덕산 등에 8개의 봉수대가 있었습니다. 그중 봉천산 위의 봉천대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제사를 지내는 제단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강화천도기에 개성이 내려다보이는 봉천대에서 행해진 국가 주도의 제사는 외세 침략에 대한 저항이자 민중을 버리고 강화로 천도한 지배층의 안녕을 꿈꾸는 제사였습니다. 강화에 단군과 연개소문 등 민족의 역사성과 자주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오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조선에 와서는 외세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통신수단인 봉수대로 그 쓰임이 바뀌었습니다.
ㅡ‘봉천산 주변의 고려 불교 유적: 강화의 얼굴 하점면 석조여래입상과 5층석탑 그리고 봉천대‘ 중

보통 조선시대의 형벌은 태, 장, 도, 유, 사의 다섯 가지로 구분합니다. 쉽게 풀어보면 태형은 10대에서 50대까지 다섯 단계로 구분하여 작은 회초리로 때리는 것이고, 장형은 태형보다 무거워 큰 회초리로 60대에서 100대까지 때리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도형이나 유형에 더해지는 형벌이었습니다. 도형은 일종의 징역형으로 일정 기간(보통 1년에서 3년) 동안 관아에 구금하고 일과 시간 중에는 각종 노역에 종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유형은 거주 지역을 강제로 옮기는 것으로 기간을 정하지 않고 특정한 지역에 유리시켰는데, 사형을 면한 정치범에게 죄를 감면하여 부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형은 조선 시대 형벌 중 가장 무거운 형벌로서 일반적으로 교형과 참형으로 나뉩니다. 교형은 신체를 온전한 상태로 두고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이며, 참형은 신체에서 머리를 잘라 죽이는 것입니다. 유교 사회에서 시신을 훼손하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역모 등 정치범에게 많이 가해졌겠지요.
조선의 다섯 가지 형벌 가운데 교동과 연관성을 찾아본다면 당연 유형입니다. 교동이 여러 인물들의 유배지로 유명하기 때문이죠. 교동에 유배 온 인물들은 주로 왕족으로 왕위계승에 실패하거나, 반정으로 왕위를 내려놓은 왕족들이었습니다. 강화가 주로 유학의 주류에서 스스로 혹은 타의에 의해 비주류가 된 이들의 고민이 심어져 있는 곳이라면, 교동은 왕족의 유배지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선비들이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귀양살이한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훗날 있을지 모르는 반정에 대비하기 위해 가까우면서도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섬을 찾았으리라 여겨집니다.
이 밖에도 유배지로서 교동을 찾은 인물로는 고려의 희종이 있었고, 조선에는 세종의 셋째 아들로 계유정난에 의해 강화로 유배된 후 교동에서 죽은 안평대군 그리고 임해군과 광해군이 있습니다. 임해군은 광해군의 형으로 광해군에 의해 교동으로 유배를 오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 보낸 광해군 자신도 인조반정 후 이곳 교동으로 유배를 왔습니다. 이렇게 연결시켜보면 역사는 참 재미있습니다. 광해군의 동생뻘인 능창대군도 광해군에 의해 이곳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다른 광해군의 형제들이 죽은 공간은 교동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연산군은 이곳 교동에 유배된 지 2달 만에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흥청망청‘이라는 말의 유래는 연산군 때로 올라간다. 연산군은 전국에 채홍사, 채청사를 파견하여 각지의 기생들을 모았다. 이렇게 모인 기생들 중 궁중에 들어간 기생을 흥청이라 불렀다. 연산군은 흥청이들과 놀면서 원각사를 폐지하고 기생 양성소로 만들었고, 성균관은 유생들을 쫓아내고 유흥장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임금이 흥청과 놀아나면서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에 빗대어 생긴 말이다. 오늘날 ‘흥청망청‘은 사전적 의미로 흥에 겨워 마음껏 즐기며 노는 것, 혹은 계획 없이 돈이나 재물을 마구 쓰는 것을 뜻한다.
ㅡ‘성리학의 전래와 성리학적 통치 질서: 교동향교와 연산군 유배지‘ 중

정제두 선생 묘에서 시작해 영재 이건창 선생의 묘소까지를 걷다 보면 역사 시간에 배운 용어가 떠오릅니다. 바로 ‘양명학‘입니다. ‘해가 지는 마을길‘은 초기 양명학(조선)에서부터 후기 양명학(대한제국)까지의 역사가 담긴 길입니다.

양명학은 남송시대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의 관념성 문제에 대응하여 새로운 유학의 한 갈래입니다. 명나라 철학자인 왕수인(호 양명)이 만들었습니다. 성리학은 고려 말에 전래되어 조선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학문으로 사물이 지닌 특성을 인정하는 성학(性學)이었습니다. 성리학에서 자연과 사회는 도덕적 본성을 갖는 것이고, 이 안에 속한 사물의 개별성과 등급성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성리학은 조선 사회의 모든 시스템에 작용하는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자리 잡아 인간 세계의 위계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양명학은 사물이 지닌 특성보다 마음을 통한 자각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통한 자각은 세상을 움직이는 ‘지행합일‘과 ‘양지‘에 이르게 하는 마음공부에 집중했습니다. 양명학은 ‘결과‘보다도 마음속의 ‘동기‘에 집중한 것입니다. 이미 마음속에 있는 이치가 ‘진리‘라고 생각했기에 진리의 완성은 실천과도 통한다고 여겼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앎‘을 주희는 불완전한 것으로, 왕양명은 완전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주희는 불완전한 것을 완전함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교육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반면 왕양명은 거짓된 앎을 걷어내기 위한 성찰을 중요시했습니다. 이와 같은 차이는 민중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에 관한 ‘친민‘과 ‘신민‘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주희는 본래의 ‘친민‘을 ‘신민‘ 으로 달리 해석해서 민중을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가르침은 유학에 익숙한 사대부의 역할로 생각했습니다. 사대부가 민중을 가르쳐야 하니 당연히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사대부의 특권을 인정했습니다. 반면 왕양명은 말 그대로 ‘친민‘에 집중했습니다. 백성은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수양하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좋은 앎‘ 곧 ‘양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깨달은 사람, 곧 사대부가 수양을 통해 ‘양지‘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백성과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명학을 수용한 강화학파의 생각이 지금 더 친숙하게 여겨지는 것은 성리학의 한계를 넘어선 시각 때문입니다.

입신양명을 위한 유학이 아닌 진리를 찾기 위한 마음속 동기가 강화도와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각으로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양명학은 조선 후기에 발생한 실학에도 영향을 주었지요. 물론 양명학파는 조선 사회의 비주류로 살았으나 이미 기득권을 가진 지배층이었습니다. 백성의 고단한 삶을 그토록 애닯게 여겨 많은 시로 풀어낸 이건창도 갑오농민운동에 대해서는 날 선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리학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어놓았다는 것과 ‘신민‘이 아닌 ‘친민‘으로 보고자 했음을 들어 강화학파를 조선의 진보 세력으로 보는 곳은 지나친 해석일 수 있습니다.
ㅡ‘성리학을 넘어 양명학으로: 강화학파(정제두 묘와 이건창 생가)‘ 중

중국에서 관우를 모시는 신앙은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병했던 명군(明軍)을 통해 이 땅에 들어옵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의 두려움을 없애는 데 무성인 관우의 신앙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명나라는 그들의 신앙을 조선에도 강요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동묘(동관묘)가 세워집니다. 그런데 왜 관우 신앙을 조선에 강요 했을까요? 아마도 여진의 성장 속에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기 위함이고, 이를 위하여 명의 원병 참전을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정치적 이유도 있었던 겁니다. 명군이 물러가고 조선의 관우 신앙은 정치적 의미가 점점 사라지고 일상의 신앙으로 변화합니다. 조선의 관우 신앙은 잡귀를 물리치고, 사악한 기운을 극복하려는 성격을 띠게 되었죠.
강화도에는 관제묘가 많이 들어서 있습니다. 강화 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에서 한옥마을을 지나는 곳에 북관제묘와 동관제묘가 있습니다. 두 관제묘는 모두 조선 고종 때 세워졌는데, 동관제묘가 1885년(고종 22년), 1892년(고종 29년)에 세워진 북관제묘보다 조금 빠릅니다. 동관제묘는 마여인이 북관제묘는 강화산성 수문장 윤의보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관제묘 사당 내부는 일반적으로 관우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들인 관평과 심복 장수였던 주창을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관우를 모신 사당답게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 없이 죽는다"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오늘날 관우를 모시는 신앙은 원조 격인 중국과 역사적 연관성을 가진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보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신격화된 한국과 일본에 들어오는 역사적 배경은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요코하마를 비롯해 주로 화교들이 밀집한 차이나타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중국을 떠나 외지 생활을 하는 화교들이게는 그들의 재산과 안녕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 필요했던 까닭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남관왕묘가 먼저 세워졌으며, 명나라 장수의 부상에 따른 요양지에 세웠던 사당이 시초이다. 또한 동묘(1596)는 명나라 황제의 건립 요구에 따라 세워졌는데,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다. 현재 지히철 6호선 동묘역이 있다. 아울러 지방에도 세워졌는데 주로 명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곳에 있다.
ㅡ‘임진왜란이 남긴 관우 신앙:북관제묘‘ 중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왕의 강화도 입성 여부가 전쟁의 양상을 다르게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병자호란의 승패는 전투력 차이에서 온 것입니다. 몽골과 후금의 전투력의 한계를 청이 수병과 홍이포로 보완하였던 것입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민중 봉기나 외세와의 전쟁 때 왕이 강화로 오지 않았습니다. 무기와 전술 등 전투력이 발전하여 강화는 더 이상 요새 기능을 못했지요. 운요호 가건,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에서 강화의 방어선이 뚫려서 외세의 상륙을 허용한 것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ㅡ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강화도:충렬사와 안동 김씨‘ 중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는 주전파와 주화파가 각각 자신의 대외정책을 놓고 논쟁을 벌였지요. 결국 최명길을 중심으로 한 주화파의 논리가 채택되어 청과의 강화가 송파(잠실)에서 체결되었지만, 주전파였던 김상헌의 동생 김상용은 강화성 남문에서 폭약을 장치하고 그대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주전의 논리를 강조한 주전파에게는 성리학적 명분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폭사한 김상용은 이후 불벌의 상황과 맞물려 당대의 충신으로 여겨졌습니다. 훗날 조선 정부에서는 김상용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했지만 자폭해서 여기저기로 흩어진 시신을 찾기란 어려웠고, 그의 신발이 발견된 곳에 충렬사를 세워 그의 정신을 기리게 했다고 합니다.
국어 시간에 서포 김만중이 유복자 곧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이라고 배웠는데,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도 이때 김상용을 따라 자결했고, 현재 충렬사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때문에 강화성 남문을 이야기할 때면 병자호란, 김상용, 김만중의 이야기가 부록으로 따라다니지요.

현재 강화도 면적의 3분의 1은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땅입니다. 강화의 간척사업은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고려가 원나라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으니 인구가 갑자기 늘어났겠지요. 당시 강화로 건너온 사람들의 숫자가 30만이었다고 합니다. 원에 대항하는 시기였으므로 육지와의 물자 교류가 쉽지 않았겠죠. 이런 이유로 강화도에서 왕실과 지배층의 안전을 보장할 자립적 경제구조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쌀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를 확보해야 했지요. 주로 강화도 북쪽에 간척지가 조성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려를 시작으로 조선 숙종 때까지 강화에는 간척을 위한 대공사가 이루어집니다.
선두포 축언시말비는 조선 숙종 때 강화유수 민진원의 지휘아래 이루어진 간척사업의 내용을 기록한 비석입니다.
ㅡ‘조선의 건축과 간척:강화성과 선두포 축언시말비‘ 중

철종은 1863년 33살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죽었다. 그는 부인 철인왕후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의 예릉에 묻혔다. 조선의 왕릉은 왕의 권력을 상징한다. 당연히 규모와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고 왕릉이 조성된다. 예릉은 황제의 격에 따라 조성된 고동(홍릉), 순종(유릉)과 비교해서 조선의 왕릉 형식으로 조성된 마지막 왕릉이다. 따라서 판위, 금천교, 석계, 비각, 각종 석상 등 왕릉으로서의 격을 잘 갖추고 있다. 석상들만 보아도 규모 면에서 웅장함을 보이고 있다. 재위 기간 동안 세도가문의 위세에 밀렸던 철종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의외라는 생각마저 든다.
사실 여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예릉이 조성되기 전 이곳 주변에는 중종비인 장경왕후의 희릉과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효릉이 있었고, 또 중종의 왕릉도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종의 왕릉인 정릉은 서울로 옮기고 그때 사용하던 석상들은 한 번 사용한 석상들은 다시 쓰지 않는다는 예법에 따라 그 자리에 모두 묻어버렸다. 철종이 죽고 왕릉을 조성하던 때는 알려진 바와 같이 세도정치가 한창이었다. 몇몇 가문의 권력과 부는 크게 성장했지만 왕실의 재산인 내탕금은 비어 있어 철종 왕릉을 조성하는 게 어려웠다. 이때 중종 왕릉에 쓰던 석상들이 땅속에서 발견되자 왕실에서는 그것을 다시 쓰도록 하였다. 지금 보이는 예릉의 석상은 정릉(중종릉)이 옮겨가기 전 사용하던 석상들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랑과 존중을 받지 못한 철종의 아픔이 느껴진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예릉, 희릉, 효릉을 통틀어 서삼릉이라 부른다. 최근에는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과 함께 주목받고 있는데,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조선의 왕릉이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서삼릉 주변에는 농협대학이 운영하는 젖소연구소와 한국마사회에서 운영하는 경주마 목장, 경마교육원이 들어서 있다. 주변에는 골프장도 여러 곳 있다. 원래 서삼릉의 영역이었으나 어느새 말과 소에게 넘어간 것이다. 말과 소가 함께 있는 왕릉이라니 조선의 장례법을 생각하면 왠지 어색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문화를 억압하려 했던 총독부의 음모인가 생각했더니 19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 때의 일이라 한다
ㅡ‘세도정치와 강화도령 철종:용흥궁과 철종 외가‘ 중

운요호는 일본 규슈 섬의 나가사키에서 출항했습니다. 나가사키는 일본 역사에서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문화 교류의 허브 역할을 해왔지요. 지금도 나가사키에는 데지마라는 작은 인공섬이 있는데, 일본이 쇄국정책을 취할 때 이곳을 통해 네덜란드와 중국과의 교류만은 허용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난학(네덜란드로부터 받아들인 서양 문물)이 모두 이곳을 통해 전래되었습니다. 나가사키와 인천 그리고 데지마와 강화는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서양과 만나는 곳이 되었다는 점, 크리스트교의 포교지이자 순교지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사의 측면에서 나가사키와 강화를 이어주는 인연의 끈은 분명 나가사키를 출발해 강화에 도착한 운요호일 것입니다. 여기에 일본이 시작한 침략사건이 끝날 무렵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생각하면, 조선 침략의 첫발과 마지막 발걸음이 나가사키에서 비롯되었지요. 강화와 나가사키는 그렇게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ㅡ‘염하를 따라 걷는 외세 침략과 저항의 역사: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연미정‘ 중

강화도에서 실제로 경험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은 조선의 해군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근대식 군사력 확충과 특히 해군력에 대한 관심은 강화도에 해군통제영학당을 설치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조선 정부는 청으로부터 1,000원의 차관을 받아 통제영학당을 설치함으로써 최초의 근대식 해군 장교 양성의 첫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1893년 10월에 개교한 통제영학당은 이듬해인 1894년 11월 폐교되었습니다. 통제영학당 폐교의 원인은 대외적으로는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의 영향이 컸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을 제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했지요.
ㅡ‘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통제영학당지‘ 중

강화에는 다양한 종교 관련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381년에 세워진 전등사와 팔만대장경에 관련된 선원사지 등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 개신교 중 감리교 초기 선교에 얽힌 사연 때문에 ‘어머니 교회‘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교산교회, 그리고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단군성지인 참성단과 이를 중심에 두었던 대종교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병인양요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순교를 통해 다시 신앙의 불씨를 살려낸 천주교의 갑곶성지, 조선의 해군력 강화 방안으로 설치된 통제영학당의 교관이었던 영국인과 관련된 성공회 이야기도 강화가 다양한 종교의 성지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줍니다.

성공회의 강화 포교와 확산에는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국이나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에 비해서 영국에 대한 강화 사람들의 반감이 적었다는 점과 앞서 말한 통제영학당에 파견된 교관들이 영국인이었고 그들의 종교가 성공회였다는 점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ㅡ‘서양 종교가 강화에 들어오다: 1. 성공회 강화읍 성당과 온수리 성당‘ 중

강화의 3.1 운동은 서울에 간 유학생들의 신속한 정보 전달과 강화 감리교의 조직망이 연결되어 일어났습니다.
강화읍의 만세 시위는 각 면단위 장터를 중심으로 퍼져 한달여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도시가 아닌 강화라는 시골에서 이렇게 큰 규모의 만세 시위가 일어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강화가 서울과 가까워 3.1만세운동 소식이 신속하게 전해졌고, 두 번째는 정기적으로 시장이 열려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등 외세, 특히 일제에 대한 역사 경험으로 저항의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고, 네 번째는 섬이라는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강화에 강화의 운동을 진압하러 출동한 일본한 일본군은 다음 날에서야 강화에 들어왔습니다.
ㅡ‘식민지배에 저항하다: 강화 3.1운동 기념비‘ 중

강화에는 근대 서양 종교의 포교 과정을 알 수 있는 성공회 강화읍 성당과 온수리 성당, 감리교 교산교회와 서도 중앙교회, 근대 산업의 발달 과정을 배울 수 있는 조양방직 공장과 사무동(1930년대 만들어진 국내 최초 방직공장) , 1960년대 이후 종교계(가톨릭)의 사회 참여와 노동운동 역사가 담긴 심도직물 공장터와 함께 심도직물 상징탑(굴뚝)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 외에도 1890년대 간장 공장으로 세워진 이후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으로 거듭나 항아리를 이용해 발효하던 전통 방식의 막걸리 제조 과정을 알려주는 강화양조장 등이 있지요. 최근에는 인천시와 강화군이 이러한 근대건축문화유산을 지정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서 보존할 계획을 수립했지만, 강화양조장의 경우 소유자가 화재 위협을 이유로 철거해버림으로써 전통적인 막걸리 주조 시설을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공공 기관의 보존 계획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강화의 근대 문화유산 답사를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ㅡ‘강화의 근대문화유산을 찾아서:1928년 주택, 조양방직 공장과 사무동, 심도직물‘ 중

전망대로 들어가기 전 망향단에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가 흐릅니다.....<그리운 금강산>은 왜 강화에서 구슬프게 울리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이곳에 노래비가 있는 까닭은 작사가 한상옥 님과 작곡가 최영섭 님의 고향이 강화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주재런가"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북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지금 우리가 부르는 가사는 원래 가사가 아닙니다. 이 노래는 1961년에 작사 작곡되었으나 우리에게 익숙한 가사는 1972년에 변경된 가사입니다.......‘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던 해입니다. - 물론 7.4 남북 공동성명이 남과 북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급조된 것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통일의 원칙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같은 해에 공동성명의 후속 조치로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은 평양에 간 남측 예술단이 공연 때 부르기로 한 노래였습니다. 원래의 가사로 부르기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일부 수정하여 부른 것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ㅡ‘분단을 넘어 평화의 시대로: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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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6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20 11:12   좋아요 1 | URL
책만 읽다 온 기분입니다-_-; 낮에 잠깐 움직이고 밤에서 해뜰 때까지는 내내 책 보고ㅎ
그래도 타지에 가니 좋긴 좋더만요. 날 풀리면 더 움직여 봐야죠.

바쁘시더라도 님도 많이 움직이시길^^

2017-03-20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20 19:23   좋아요 1 | URL
아니요. 일 거부하고 놀러갔다가 책만 읽고 온 거ㅎㅎ
강화 나들이는 정말 쬐끔 밖에 못하고 책으로 더 많이 봄ㅋㅋ

2017-03-20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7-03-16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색이 아니라 모면이라는 의미가 강화의 역사인 문구가 눈에 띄네요....

AgalmA 2017-03-20 11:14   좋아요 1 | URL
한국사는 보고 있음 속상하고 화나서 좀 피한 감도 있는데, 이렇게 재밌고 유용한 책을 통하니 배우는 게 많더군요. 한국 근현대사 공부 좀 많이 해야겠다 싶더군요.

겨울호랑이 2017-03-16 2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조선 참성단 때부터 개화기 운양호 사건까지 강화도는 우리 나라 역사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섬인 것 같습니다... 역사적 의미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단된 현실 때문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AgalmA 2017-03-20 11:18   좋아요 1 | URL
지역주의 문제도 있지 않나 싶어요. 관광권으로 개발할 게 많은 거 같은데 강화가 그리 낙후되어 있는 걸 보면...
문제가 어디 한 둘이어야 말이죠...
이번주 <그것이 알고 싶다> 아이들 실습 상황 보고 정말 화가 너무 나더군요. 노동 문제가 정말 썩을대로 썩은 한국 어찌 해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