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어둠 - 우울증에 대한 회고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임옥희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이 1989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후원으로 정서 장애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한 강연록이다.

희생자이자 관찰자로서 자신의 경험과 주변을 깊이 반추하며 여러 가지 요인들을 짚고 있다. ‘유아 시절에 경험한 상실감을 그도 우울증에 대한 가장 큰 요인으로 보고 있다자아 형성 시기에 만난 최초의 충격파가 끝까지 함께 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나는 우주배경복사를 떠올린다.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계속되어온 빛.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은하와 항성들의 복사 에너지를 합쳐도 우주배경복사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이토록 지배적인데도 감당하기 벅찬 빛을 우리는 어떻게 얼마나 극복할 수 있을까. .

역사에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으며 겪게 된 애도의 상실감을 딛고 정치 혁명으로 승화한 링컨도 있고, 부모와 아내를 잃고 문학으로 승화한 에드거 앨런 포도 있다. 두 사람 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보여준 삶의 빛을 우주배경복사의 다른 의미로 발견한다.

 

또, 나는 라캉의 해체 욕망과 들뢰즈와 푸코의 권력 욕망이 만난다는 걸 생각한다.

질 들뢰즈는 권력이 욕망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도 있다. “욕망은 언제나 특정한 배치로서 존재하고 작동한다. 즉 우리의 욕망은 실존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자리를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카뮈 《시지프 신화》에서 생과 사의 투쟁이 그러하듯. 욕망이 해체되는 우울증 속에서 나를 찾을 수 없어 혹은 지키기 위해 자살에 이르는 이들처럼. 무엇을 해체하고 무엇을 모을지 주체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이 세계를 바라보며 나는 매일 흐린 저녁을 맞았다.

 

 

 

 Gipsy Kings - Inspiration

 

정신의학계에는 격렬하고 불쾌하리만치 코믹한 파벌이 존재한다. 심리치료의 신봉자와 약물치료를 고수하려는 사람 사이의 분쟁이 그것이다. 이런 분쟁은 방혈 여부의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했던 18세기의 의학 논쟁과 흡사하다. 이 분쟁 자체가 우울증의 설명 불가능한 성격과 치료의 난해함 자체를 거의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 분야의 임상의사들은 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우리 연구를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에 비교한다면, 아메리카는 아직 발견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바하마 군도에 있는 작은 섬에 도착했을 뿐이지요.˝

 

병은 가장 악랄하고 음흉한 단계에 이를 정도로 이미 진척되었던 셈이다. 내 행동은 정서 장애, 정신집중의 불가능, 기억상실 등의 결과였다. 증상이 악화되면서 나의 온 정신은 간헐적인 기억상실 증상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기분의 양극화가 생겨났다.

 

사람들이 이 병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동정심과 공감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해서는 그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수면 패턴이 엉망으로 되는 것이야말로 우울증의 악명 높은 파괴력 중 하나다.... 자기 혐오(우울증의 으뜸가는 증상)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지적 선언은 시지프 신화에 등장하는 바로 이 문장이다. “진정으로 진지한 철학적인 주제는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철학적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 무엇보다도,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자살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그 전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시지프 신화》에 죽음을 지배하는 생의 승리라는 엄숙한 메시지(희망이 부재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가까스로)가 담겨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살에 관한 카뮈의 진술과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집착이, 윤리론과 인식론에 대한 관심뿐만이 아니라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정서 장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로맹 가리는, 자신은 무기력하지는 않으며, 또 조절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가끔씩 납처럼 무겁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그 상태가 찾아들면, 뉴잉글랜드의 청정한 여름에선 생겨날 수 없는 음울한 녹청색 분위기가 연출된다고 했다.

 

24시간 주기로 일어나는 혼란 상태신진대사와 내분비선의 리듬은 정상적인 생활에 핵심적이다는 대부분의 우울증에 수반되는 증상이다.

 

알려진 것처럼 술은 심각한 우울증 유발 물질이다.

 

자살에 관한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한 데에 직접적인 한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와 같은 당연한 의문은 그러나 대체로 괴상한 억측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런 억측이야말로 오류 그 자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예술가 유형(특히 시인들)이 이런 혼란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상당히 근거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을 통해 우울증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 중 이십 퍼센트가 시인들이었다. 불꽃같이 살다가 슬프게 스러져 간 근대 예술가들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하트 크레인, 빈센트 반 고흐, 버지니아 울프, 아실 고키, 케자레 파베세, 로맹 가리, 바첼 린지, 실비아 플라스, 앙리 드 몽테를랑, 마크 로스코, 존 베리먼, 잭 런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인지, 다이언 아버스, 타데우시 보로프스키, 파울 첼란, 앤 섹스턴, 세르게이 에세닌,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러시아 시인인 마야코프스키는 몇 년 전에 있었던 자기 당대의 시인 에세닌의 자살에 가혹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런 혹독한 비판은 자기 파괴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모든 사람들의 발명특허이다.)

 

이 병의 진행 과정과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상실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시달리고 있는 장애의 근원이 유아 시절에 경험한 상실감이라는 점을 점차 수긍할 수 있었다.

 

우울증이 두 번째로 심각한 단계자살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으로 옮기기 바로 직전 단계로 진행됨에 따라 초래된 격렬한 상실감은 인생이 맹렬한 속도로 빠져나간다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었다.

 

고통에는 사람들이 그걸 경험하면서도 경감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만약 그럭저럭 견딜 만한 치료법이 있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며 더욱 극심한 고통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름아닌 이 절망감이 고통보다 더욱 인간의 영혼을 파멸시킨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일상생활에서의 의사결정은 성가신 상황에서 덜 성가신 상황으로불편한 상태에서 비교적 편안한 상태로, 혹은 권태에서 활동으로이동하도록 이루어지지만, 이 병의 경우에는 고통에서 고통으로 이동한다. 우울증 환자의 가시 박힌 침대는 잠시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어디를 가나 붙어다닌다. 이것은 인상적인 경험으로 귀결된다. 군사 용어를 빌리면 행군하는 부상병인 것이다.

 

나에게 진짜 치료사는 격리와 시간이었다.

 

우울증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우울증의 의미는 이 세계의 모든 악의 모사품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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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2-14 0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이 책을 읽어보기는 했지만, 생각나지 않네요 어디선가 이 책을 소개해서 한번 읽어봤을 것 같아요 누가 소개했는지... 잊어버린 것을 말했군요 책도 제대로 못 읽었는데... 우울증을 겪은 사람 이야기다 하는 말을 보고 봤을 거예요 어릴 때 겪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살면서 겪은 커다란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것을 다은 걸로 나타내는 사람도 있군요 그건 많은 사람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걸 누군가한테 보이는 사람도 있고, 자기 혼자 뭔가 하면서 만족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것을 못하면... 그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도와야 할 텐데, 옆에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잘 듣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조금 관심을 가지면 나을 것 같기도 하지만... 쉽지 않을 듯하네요

사람에 따라 어떤 일을 받아들이는 게 다르기도 하죠 자기 일과 남의 일이 다른 것과 같기도 하겠습니다 이런 말로 흐르다니... 많은 사람이 가벼운 우울증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겉으로 아무리 밝아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을 다 좋게 여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지 못하는데...


희선

AgalmA 2017-02-14 04:06   좋아요 1 | URL
스타이런은 말미에 종교적일 정도의 격려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흔해빠진 격려를 귓등으로 흘려 들어도 계속 듣다 보면 정말 힘이 난다고. 특히 아내가 엄청 힘이 되어 줬던 거 같아요. 종교적 격려, 제 경험상으로도 그건 공감합니다. 스타이런은 조증 친구랑 서로 아침저녁으로 전화하며 격려해주면서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어 서로를 더 공감할 수 있었겠죠. 상대가 나아지는 것에 자신이 힘을 얻기도 하면서. 하지만 이 경우도 서로 궁합이 맞아야지 잘못하면 휘발유를 붓는 일일 수 있어요; 위에 인용으로도 알렸듯이 정도를 넘어선 우울증은 상상하기 힘들어서 공감하기 어렵죠. 아무도 알 수 없는 혼자 갇힌 감옥이죠.

희선님 말씀처럼 저도 우울증의 주요 요인을 어릴 적 충격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스타이런의 프로이트식 귀결에서 한참 연필을 두드렸는데요. 우울증 환자의 대부분이 이 요인을 가지고 있다는 건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 여러 요인들이 덧붙여지면서 더 심각해진다고 봐야죠.
우울증 약을 잘못 써서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는 더 딱하죠. 실제로 유명 연예인 비롯 그런 사례는 많았죠.
약이든, 종교적 격려든, 목표든 무엇이든 부여잡고 싶은 때는 그나마 나은 상태죠. 그 모든 걸 놓아버릴 땐 아무 소용이 없는....

페크pek0501 2017-02-15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은 책이에요. 반갑네요. 관심 가진 책이 같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