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계에는 격렬하고 불쾌하리만치 코믹한 파벌이 존재한다. 심리치료의 신봉자와 약물치료를 고수하려는 사람 사이의 분쟁이 그것이다. 이런 분쟁은 방혈 여부의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했던 18세기의 의학 논쟁과 흡사하다. 이 분쟁 자체가 우울증의 설명 불가능한 성격과 치료의 난해함 자체를 거의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 분야의 임상의사들은 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우리 연구를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에 비교한다면, 아메리카는 아직 발견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바하마 군도에 있는 작은 섬에 도착했을 뿐이지요.˝
병은 가장 악랄하고 음흉한 단계에 이를 정도로 이미 진척되었던 셈이다. 내 행동은 정서 장애, 정신집중의 불가능, 기억상실 등의 결과였다. 증상이 악화되면서 나의 온 정신은 간헐적인 기억상실 증상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기분의 양극화가 생겨났다.
사람들이 이 병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동정심과 공감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해서는 그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수면 패턴이 엉망으로 되는 것이야말로 우울증의 악명 높은 파괴력 중 하나다.... 자기 혐오(우울증의 으뜸가는 증상)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지적 선언은 《시지프 신화》에 등장하는 바로 이 문장이다. “진정으로 진지한 철학적인 주제는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철학적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 무엇보다도,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자살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그 전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시지프 신화》에 죽음을 지배하는 생의 승리라는 엄숙한 메시지(희망이 부재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ㅡ가까스로)가 담겨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살에 관한 카뮈의 진술과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집착이, 윤리론과 인식론에 대한 관심뿐만이 아니라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정서 장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로맹 가리는, 자신은 무기력하지는 않으며, 또 조절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가끔씩 납처럼 무겁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그 상태가 찾아들면, 뉴잉글랜드의 청정한 여름에선 생겨날 수 없는 음울한 녹청색 분위기가 연출된다고 했다.
24시간 주기로 일어나는 혼란 상태ㅡ신진대사와 내분비선의 리듬은 정상적인 생활에 핵심적이다ㅡ 는 대부분의 우울증에 수반되는 증상이다.
알려진 것처럼 술은 심각한 우울증 유발 물질이다.
자살에 관한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한 데에 직접적인 한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와 같은 당연한 의문은 그러나 대체로 괴상한 억측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런 억측이야말로 오류 그 자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예술가 유형(특히 시인들)이 이런 혼란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상당히 근거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을 통해 우울증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 중 이십 퍼센트가 시인들이었다. 불꽃같이 살다가 슬프게 스러져 간 근대 예술가들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ㅡ하트 크레인, 빈센트 반 고흐, 버지니아 울프, 아실 고키, 케자레 파베세, 로맹 가리, 바첼 린지, 실비아 플라스, 앙리 드 몽테를랑, 마크 로스코, 존 베리먼, 잭 런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인지, 다이언 아버스, 타데우시 보로프스키, 파울 첼란, 앤 섹스턴, 세르게이 에세닌,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러시아 시인인 마야코프스키는 몇 년 전에 있었던 자기 당대의 시인 에세닌의 자살에 가혹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런 혹독한 비판은 자기 파괴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모든 사람들의 발명특허이다.)
이 병의 진행 과정과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상실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시달리고 있는 장애의 근원이 유아 시절에 경험한 상실감이라는 점을 점차 수긍할 수 있었다.
우울증이 두 번째로 심각한 단계ㅡ자살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으로 옮기기 바로 직전 단계ㅡ로 진행됨에 따라 초래된 격렬한 상실감은 인생이 맹렬한 속도로 빠져나간다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었다.
고통에는 사람들이 그걸 경험하면서도 경감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만약 그럭저럭 견딜 만한 치료법이 있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며 더욱 극심한 고통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름아닌 이 절망감이 고통보다 더욱 인간의 영혼을 파멸시킨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일상생활에서의 의사결정은 성가신 상황에서 덜 성가신 상황으로ㅡ 불편한 상태에서 비교적 편안한 상태로, 혹은 권태에서 활동으로ㅡ이동하도록 이루어지지만, 이 병의 경우에는 고통에서 고통으로 이동한다. 우울증 환자의 가시 박힌 침대는 잠시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어디를 가나 붙어다닌다. 이것은 인상적인 경험으로 귀결된다. 군사 용어를 빌리면 행군하는 부상병인 것이다.
나에게 진짜 치료사는 격리와 시간이었다.
우울증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우울증의 의미는 이 세계의 모든 악의 모사품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