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don Kremer plays Weinberg - Cello Prelude op.100 No.5 (live, 2016)    

      

 

기돈 크레머의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흐린 겨울 저녁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었다.

ECM 레이블에서 나온 기돈 크레머의 바인베르크 연주는 마음 속 무언가를 분명히 건드린다.

유대계 폴란드 작곡가인 바인베르크(Mieczysław Weinberg)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소련에 정착했는데,

쇼스타코비치의 애제자였다고 한다. 전쟁의 슬픔이 깃든 듯한 연주가 매우 인상적이다.

 

 

 

  • 1-1. Sonata No. 3 Op. 126 (1979)
  • 1-2. Trio Op. 48 (1950)
  • 1-3. Sonatina Op. 46 (1949)
  • 2-1. Concertino Op. 42 (1948)
  • 2-2. Symphony No. 10 Op. 98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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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REMERATA BALTICA, GIDON KREMER [MIECZYSŁAW WEINBERG] (ECM, 2014)

     

     

     

    사실로 말하면 바인베르크 음악에 대한 관심은 이 앨범의 아트웍 때문이었다. 

    Alexei Vassiliev의 사진을 떠올리게 했다.

    고전적인 초상사진의 명확한 선예도가 Alexei Vassiliev의 사진에는 없다.

    오히려 경계를 지움으로써 더 관심을 사로잡는다.

    공기처럼 부유하는 색들이 인식을 돕지만, 그것은 무엇을 향한 방향인가.

    지워지려는 찰나의 강렬함.

    결코 분리되지 않는 물질들, 세계들.

     

     

     

     

     

     

     

     

     

     

     

     

     

     

     

     

     

     

     

     

     

     

     

     

     

     

    바인베르크의 사라지기 직전의 날카롭고 서정적인 선율과 Alexei Vassiliev의 사진은 그래서 퍽 잘 어울렸다.

    여기 딱 어울리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 모리스 블랑쇼.

     

     

     

     "반짝임은 소멸을 위한 반짝임이다."

     

     

    "희망은 종종 비탄의 고뇌일 뿐이다. 희망은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절망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술은 불행의 의식이지 불행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카프카의 엄격성, 작품에의 의무에 대한 성실성, 불행의 의무에의 성실성은 인생에 실망한 많은 나약한 예술가들이 자기만족을 찾는 허구의 천국에서 자신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예술의 목적은 몽상도 '건설'도 아니다. 진실은 알려질 필요도, 묘사될 필요도 없다. 진실은 자기 스스로조차 알지 못한다. 그것은 지상의 구원이란 것은 성취될 것을 요청하는 것이지 그것이 가능한지 질문을 던지거나 그 형상을 그려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이 설자리는 없다. 엄격한 일원론은 모든 우상을 제거한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예술은 정당화되지 않지만, 적어도 카프카에게만은 예술은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예술은 바로 카프카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의 '밖'에 있는 것과 묶여 있기 때문이다. 또 예술은 친밀성도 휴식도 없는 이 바깥ㅡ외곽의 심연을 표현하며 우리가 우리들 자신과도, 우리들의 죽음과도 가능성의 관계를 더 이상 맺지 못할 때 불쑥 솟아나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 '불행'의 의식이다. 예술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자, 더 이상 '나'라고 말할 수 없는 자, 그와 동시에 이 세계, 세계의 진실을 상실한 자, 그 유형에 속한 자들, 휠덜린이 말했듯이 신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신들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이 비탄의 시간 속한 자들의 상황을 묘사한

    다. 예술은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주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술에 기원이 있기는 하나, 그 기원은 또 하나의 다른 세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세계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카프카가 예술이 허용하지 않는 도약을 성취하는 곳, 또는 그 도약을 성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곳은 바로 이 지점이라는 것을 ㅡ 그것이 그의 작품에서라기보다는 그의 종교적 체험을 표현하는 메모에서이지만 ㅡ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두 세계를 확정적으로 구분 짓는다는 것 속에는 유혹, 그렇게 쉽게 해결해버리고 싶은 유혹이 있다는 사실을 카프카가 고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Mieczysław Weinberg - String Quartet n°5 op. 2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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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철나무꾼 2016-12-13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의 공간 옆에 모니스 블랑쇼로군요, 엑박 떠요~--;
    어차피 품절인 책이라 어쩌지 못할 테지만 말예요.
    기돈 크레머랑 바인 베르그, 이 쓸쓸한 겨울 저녁이랑 잘 어울립니다, 황량한 것이.

    ‘침잠하지 않도록, 주의‘라고 상기가 필요할 듯 해요, 제 자신에게~!

    AgalmA 2016-12-13 18:22   좋아요 1 | URL
    제가 읽었던 <문학의 공간> 구판도 챙기고 싶어서 엑박이어도 굳이 넣었어요.

    침잠해도 숨쉬러 떠오를 날 있겠죠. 수영을 내내 떠오른 채 할 순 없는 거 잖아요~_~

    양철나무꾼 2016-12-13 18:24   좋아요 1 | URL
    이 댓글 완전 맘에 들어서 챙기려고 댓글 남깁니다. 참 좋습니다, 좋아요~^^

    cyrus 2016-12-14 0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속 인물들이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에 등장하는 흐릿한 형체와 비슷하게 느껴졌어요. ^^

    AgalmA 2016-12-14 08:42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그 그림들과도 비슷하죠^^ 이런 주제성을 선호하는 작가들이 있다고 봐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