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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평점 :
옛날 휴대폰을 들고 나간 바람에 다시 돌아왔고 새 휴대폰을 들고 곧장 나가지 않고 생각지도 않은 일을 했다. 예를 들면 오래전 밑줄긋기 지우기 같은 일. 이렇게 끊임없이 기억하며 지운다. 간혹 지우지 못한 것도 남는다. 처음을 탓해야 할까, 치밀하지 못함을 탓해야 할까. 치밀보다 끝까지 치사하기로 한 누군가 들을 떠올리며.
다시 살펴본 《자정의 픽션》에서 유난히 아이가 많이 거론된 게 눈에 띄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내 증오심 중 가장 중요한 이유를 생각했다. 배와 아이들을 연결할 때 이곳 사람들은 즉각 트라우마와 죄책감과 분노를 가지게 되었다. 30년이 지나도 이 기억은 많은 사람들에게 트리거가 될 것이다. 또 하나의 금기. 금기가 증가하는 사회. 나는 이런 게 몹시 화난다. 아무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것, 아무 죄 없이 벌을 받는 것, 혹은 죄에 비해 터무니없이 과한 벌을 받는 것. 적산타클로스가 루돌프 마차에서 악의 선물을 뿌려대는 한밤처럼.
뉴스에서 박 대통령이 화려한 성형 시술을 받았을 시크릿 가든이 스쳐 갔다. 길라임을 꿈꾸며 더 열심이었을지도. 어딘들 안 그렇겠는가마는 최근 한국 문학계에 가장 강적은 박 대통령 같다. 이것도 내겐 몹시 화나는 일이다. 문학의 위기, 문학의 종언은 문학 자체에 이유가 있다기보다 이런 사실들의 스캔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점점 문학 상상의 힘보다 사실들의 무기가 싸우는 걸 더 원하게 되었다. 점잖게 하지만 집요하게 핍진성을 요구하며. 세계 무대가 원하는 배우들은 그렇게 계속 뒤바뀐다. 서로를 원망하며.
언제인지 모르게 초가 꺼졌다. 나는 밤 속으로 나가야 한다. 곧 밤바람이 담배 연기처럼 내 분노를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 주겠지.
몸이 두 동강 난 현교수가 피범벅이 되어 떡볶이마냥 누워 있었다 ㅡ<논쟁의 기술>
과학은 언제나 극소수만을 위한 예술인 법이다. 그들의 삶으로부터 170년 전인 서기 2005년 시월의 지구에서 나는 그들을 보고 있다. 가을이라 하늘은 파랗고 이따금씩 지나가는 바람에는 쥐포 굽는 냄새가 났다.
갓김치나 호박엿 같은 특산물 하나 없는 못난 별이었다. 다들 그 별을 우습게 봤다.
거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언어는 사람들에게 묘한 느낌을 주었다.
높으신 분은 평소부터 ‘모두가 똑같은 옥수수 한 알‘ 따위의 싸가지 없는 구호나 외치는 옥수수행성 사람들을 싫어했다.
원숭이 구조대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갔다.
사고지역 부근의 대기는 음파 손실률이 제로에 가까웠다. 일단 발생한 소리는 거의 사라지지 않고 이틀 간격으로 심연을 한 바퀴 돌아 진원지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도떼기시장이 되지 않도록 지역의회에서 일주일마다 대칭음파를 쏘아 깨끗이 상쇄시키곤 했다.
그 시대엔 죽은 자를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진화의 증거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공감각 증세 때문에 노파의 클론은 고함 소리를 똥 냄새로 인식하고는 코를 틀어막았다.
아이가 결백하다는 건 조금도 기쁘지 않은 일이다ㅡ자기 팔이 두 개라는 사실이 조금도 기쁘지 않듯이.
ㅡ<날개>
세상 만사에 전력을 다해 궁금해하는 건 어린아이의 몫이었다.
ㅡ<노란 육교>
채 눈도 뜨지 못하는 어린 생명의 처소는 어머니의 팔 바로 안쪽에 마련되었는데, 거기는 애초에 아이의 자리였다.
사냥꾼의 총격에 넋이 빠진 어린 사슴처럼.
아기의 지친 울음소리가 버림받은 개새끼처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ㅡ<물속의 아이>
아전인수를 일삼는 몇몇 학자들의 방조 내지는 조장 아래 이제껏 우리는 문화사에 등장하는 길고 두툼한 건 무조건 남근의 재현이며 남성성의 상징이라고 해석해왔다. 그렇다면 야구는 난봉꾼들의 난봉대결이며 다듬이질은 의류에 대한 성적 학대인가? 이런 불합리한 잣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남근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불알 중심적 사고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ㅡ<[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아랫도리에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고요한 빛의 황혼을 달고 있던 진한 파란색의 하늘이었다.
ㅡ<존재, 혹은 고통 따위의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
그것들이 바로 진실의 방을 고동치게 하는 심장이었다.
"진실은 다정하니까. 진실만 있으면 누구도 아프지 않아."
짧고 간단한 실마리 하나, 그것만으로 갇혀 있던 모든 기억이 분수처럼 터져 나올 듯한데, 그 실마리는 손끝 너머에서 부유하다 자꾸만 자꾸만 허공으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사내와 경감, 그 둘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놀랍게도 긴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도대체 며칠일까?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거울을 보고 싶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진실의 방과 거울은 절대로 어울리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원했기에 O는 벌을 서는 잿빛으로 침묵.
그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제껏 진행되어오던 일을 계속해서 진행시키는 것, 저 진실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상한 두려움이 O로 하여금 그 실마리와의 대면을 막았다. 사내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 알고 싶다면, 좋아 말해 줄게. 바보 녀석, 이 불쌍한 녀석, 진실의 심장? 좋아, 내가 알려 줄게. 책상 밑 서랍을 열어봐. 거기 있어. 그래, 거기 진실이 있어.
그것은 무덤이었다. 시계들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침묵은 진실이 나오기 전 단계, 괜찮아요.
그때 욕조 옆의 작은 이끼를 발견한 경감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O가 지켜보는 가운데, 손가락 하나를 이용해 깨끗이 지워 버렸다.
ㅡ<진실의 방으로>
헬기와 몸집이 작은 전투기들은 너무 많이 떨어져 내려, 마치 활화산 분화구로 길을 잘못 든 메뚜기 떼 같았다.
그렇게 거대한 불의 아가리는 모두를 깨끗이 삼키고는 하늘나라로 보내버렸다. 하늘나라에 난리가 났다.
ㅡ<두유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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