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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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서 저항하는 힘이 감퇴했음을 감안해서 대부분의 질문들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뜻밖의 대화에 휩쓸리게 되면, 그 후에 방금 전 하던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충분히 그럴 나이가 된 것이다.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지 않으려면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

아직 백 살까지는 시간이 있지. 소설도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쓸 생각이야.”

끝까지 못 찾을 수도, 있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소설가로 살겠다는……

그렇게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거다.”

 

오에 겐자부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박범신 은교속 이적요의 대사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처럼 젊음에서도 늙음에서도 우리는 본디 승자가 아니라 수용자이다. 노년은 살아갈 기회는 줄지만 그동안 치열히 노력해왔다면 더 넓게 해석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격동의 시대를 산 두 노장, 범신에 겐자부로는 여전히 을 고민한다. 박범신은 촐라체로 국내 최초로 인터넷 블로그 연재를 한 바 있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영화의 형식을 빌려 왔다. 형식너머엔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 박범신 은교》가 남성 판타지와 늙음에 대한 고민이 강했다면, 오에 겐자부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그가 사랑한 포 시집에서 애너벨 리와 나보코프 롤리타를 모티프로 가져와 상처받은 여성과 사회의 화해를 이끌려 했다는 차이가 있다. ‘상처받은 개인과 공동체의 화해에 대한 모색은 오에 겐자부로 작품에서 늘 드러나는 주제이다.

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애너벨 리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한 오에 겐자부로가 쓴 첫 장편 싹 뜯고 아이 치기(1958), 노벨상을 받은 만엔원년의 풋볼》(1967), 그의 장애 아들 히카리, 그가 사랑했던 문학, 시대에 대한 고민을 총망라해 이야기를 펼친다.

그의 고향 시코쿠에서 일어난 1860년 만엔원년에 일어난 농민봉기에 대한 이야기를 개인적 체험으로 종결한 엔원년의 풋볼에 대한 아쉬움을 그는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에서 일본을 무대로 한미하엘 콜하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을 통해 다르게 해석해보고자 한다. 알다시피 하엘 콜하스는 영주의 부당한 횡포에 대한 억울함에서 시작되었으나 이후 체제에 대한 항거로 커진 독일의 봉기를 다룬 이야기이자 실화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쓰는 미하엘 콜하스의 주인공은 실제로도 극 중에서도 남성에게 유린당한 사쿠라라는 으로 바뀐다.

  

 

전후 일본에서 왜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오에 겐자부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에이전트 대사

 

 

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이 부당한 외세에 순종했던 은유는 사쿠라가 죽은 애너벨 리를 연기하며 잠든 사이 미국 장교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한 걸 무의식 속에서만 감지한 채 정신 승리로 이겨보려 한 설정으로 제시된다.

 

   

“'I'는 죽은 애너벨 리의 몸에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나요.”

오에 겐자부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야나기 부인 대사

 

 

우리가 아름답게 향유하는 포의 애너벨 리’, 나보코프의 롤리타’, 박범신의 은교에서 그녀들은 얼마나 주체인가 아름답고 가냘프며 상처받기 쉬워 더욱 사랑스럽고 신비로운 상징으로 소비되는 건 아닌가 비판받기도 한다. 이 책 제목이 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인지 이제 드러난다. 오에 겐자부로는 미하엘 콜하스의 주인공을 봉기의 주동자인 메이스케의 머니로 설정해 그녀들이 말할 수 있는 장을 만든다.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 소설에서는 30년의 세월이 흐른다. 짧은가, 긴가.

    

 

비디오카메라는, 진한 빛깔의 단풍 햇빛에 반짝이는 숲에 에워싸인 여인들 무리로 들어간다. 사쿠라 씨의 탄식과 분노의 넋두리는 고조되고, 추임새에 화답하는 사람들은 파도를 이루며 흔들린다. 그 목소리와 움직임의 정점에서, 침묵과 정지가 찾아온다. ‘작은 아리아가 그곳을 가득 채우면서 사쿠라 씨의 외침 소리가 들리고 소리 없는 메아리로서의 별이 스크린에 반짝인다……

 

오에 겐자부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마지막 장면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그중 누군가는 을 바라보고 있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그 별은 단순히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에 겐자부로가 쓴 에세이  는 인간이 단순히 읽은 책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듯. 나는 눈을 감고 세상에 깃든 별들을 책을 읽듯 떠올린다. 아프고 흐릿하지만 환하다.

 

 

그리고 도착한 詩 하나.

 

 

해군 버스가 지나가면서 그 많은 해군 가운데 하나가 찡긋 웃는다 나도 찡긋 따라 웃는다 머나먼 별 하나가 보이지 않는 다른 별 하나를 향해 그러하듯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모른다 우리가 본 것들은 우리가 보고 싶어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란 또 누구인가 지나가는 것들은 제가 지나가는 줄 모르고 자꾸 웃는다 지나가는 그대의 짧은 머리카락이여, 우리가 본 것들은 모두 바람이 본 것들이다.

 

ㅡ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25

 

 

 

 

나도 바로 그렇게 마치 갑자기 시간이 휑뎅그레 비어 있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거기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 시간이 오는 날을 향해서…… 이젠 시간이야 일찍이 그런 적이 없었을 만큼 많아. 앞으로 한 달 남았다고 의사가 말하지만, 한 달이란 어릴 때는 거의 영원에 가까운 시간 아니었나. 그래서 책을 읽네.
ㅡ 오에 겐자부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병상에서 고모리가 겐자부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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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6-09-10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는 왜 이렇게 제 가슴을 찡하게 만드나요?

좋은 구절이 많아 그 부분을 반복해 읽었네요.

슬프고 아름다운 음악 한 곡을 감상한 기분입니다.

AgalmA 2016-09-10 19:17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오에 겐자부로가 소설을 그렇게 써서 저도 충분히 담아보려 했습니다. 불가능 하더라도 별빛을 담으려는 시도. 글을 쓰는 건 아마 그런 거라서. 시큰...
제 문장이 미약해 더 잘 담아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그장소] 2016-09-11 19:37   좋아요 1 | URL
저도 동감이요 ! 감성 터지는 부분들이 많아요!^^

2016-09-25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5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6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7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