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바 - ‘이 세계에서의 나가 있기에 그것은 온다

“제 잠바가 언제 오는지…….”가 잠시 일상에 화두가 된 이웃분 글을 읽다가(http://blog.aladin.co.kr/710563160/8148309), 글쓴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세상의 원리가 담긴 문장이라 생각했습니다. 내 인연은 언제 오는지, 내 운(성공)은 언제 오는지, 내 죽음과 세상의 멸망은 언제 오는지, (깨달음)은 내게 언제 오는지 ……. 온통 언제 오는지를 바라고 기다리는 삶. 기다리는 자는 오로지 입니다. 시간과 사건과 관계 속에 그렇게 는 만들어집니다.

사는 건, 잠바라고 툭 내뱉듯 조금 촌스럽고 조금 구차한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상투적으로 말해 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머릿속 어딘가에서 모리쇼 블랑쇼의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머리 뚜껑 열렸다 그런 뜻은 아니고요; 모리스 블랑쇼의 기다림은 상처와 죽음이 소용돌이치는 망각과 한 몸이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의 기다림은 상처와 죽음의 소용돌이 속에 의지와 한 몸입니다.

 소설은 노인이 앞으로 어디로 향하건 온 힘을 다해 남은 생을 살아가려 한다는 것이 주제니까요.” (오에 겐자부로, 읽는 인간, p17)

 

 

여러 책을 한꺼번에 읽는 일이란...

오에 겐자부로 읽는 인간을 읽다보면 그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가져온 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는 문장으로 작가의 길을 결심하는 대목이 나오죠. 랭보의 시집 제목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작품 각각의 심오함은 이 자리에선 잠시 제쳐 두고 제가 주목하는 점은, 젊은 날 우리가 지옥’, ‘어둠’, ‘이란 개념을 잘 모르면서도 치기와 호기심에 거리낌 없이 즐겨 썼다는 것. 그리고 더 연결 지을 것들을 찾아보다가 저는 갑자기 길을 잃었습니다. 읽는 인간과 비교해 볼 가장 욕심나는 책을 떠올리며 다 읽지 못한 것에 한숨을 쉽니다. 능력은 부족한데 욕심은 산이란 말이지요. 오에 겐자부로는 소설에는 이렇듯 작가 자신도 알 수 없는 파국으로 그를 몰아세우는 힘이 있”(읽는 인간, p18)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모든 글엔 글 쓰는 자의 기개와 무지가 동시에 작동되고 드러납니다.

괴로워하면서도 기다림에 적응하듯 우리는 아주 짧은 글이라도 그 속에 빠져듭니다. 내 생각에 따라 언어가, 글속의 인물들이, 움직입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와 오든 <1929> 시를 비교하며, ‘소설을 쓸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사람의 이동을 리드미컬하게 제대로 다루는 문장’(읽는 인간, p30)이라고 말하죠. 소설을 직접 써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는 어려움입니다. 초보자 습작 속 인물들은 부조리극 배우들처럼 대화를 하고 허공에 떠다니는 게 비일비재하니까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라고 우길 수도 없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허점은 글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글이 길면 길수록 더욱 확연하게.

 

존 윌리엄스 스토너에서, 윌리엄 스토너가 처음 영문학에 눈뜬 순간에 대한 묘사는 실수의 먼지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학생이 눈을 깜빡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스토너, p22)

그러다 펼쳐 본 이언 매큐언 속죄에서는 브리오니의 문학 얘기가 속사포나 하수구처럼 쏟아져서 책을 급하게 덮었습니다.

 이미 예전에 깨달았던 바지만,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에 추함은 끝도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대사를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희곡 속의 세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질서정연해서, 이를 보충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모두 감탄사를 수반하는 극단적인 감정 표현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속죄, p20)

이 문장엔 제가 이언 매큐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특성이 있습니다. 그가 주로 다루는 인간의 악의와 현실의 메커니즘. 속죄역시 이언 매큐언 특유의 불편함이 넝쿨지어 있었습니다. 캐릭터에 대한 비호감 때문인지, 문체에 대한 제 부적응 탓인지, 저와 때가 맞지 않은 것인지는 이언 매큐언의 다른 책을 읽어보면 알게 되겠죠. 다행히 이언 매큐언이 낸 책은 많으니까. 하하하하ㅜㅋㅜ;

우리가 책을 끝까지 읽게 되는 건 작가의 역량 때문일까 독자의 탐구심 때문일까 생각해보다가 읽는 인간을 다 읽지 않아도 저는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잘 써도 오에 겐자부로처럼 찾아 읽지 않으면 소용없는 거니까요. 그는 단순히 읽는 인간이 아니라 탐독(耽讀)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스토너의 열정을 살아서 보여주는 한 예였습니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 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 나는 살아 있어.”(스토너, p353)

 

아래 ˝열정˝은 또 어떤가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엄청난 열정이라면, 직관으로 또 조형적 질서에 대한 인식으로 이루어진 사진을 하나의 가속도가 붙은 데생으로서간주하는 것인데, 이는 미술관과 화랑을 드나들었기 때문이고, 독서와 세계에 취향 탓이다라고 말한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그는 누구인가, p10, “질 모라와의 대담”)

카르티에-브레송에게, 역사에 대한 도전은 새로운 것이었고 또 전쟁을 겪은 체험이 그가 어떻게 역사를 폭로하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지에 대한 대단히 폭넓은 설명이 된다. 벌어졌던 그대로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초조감이, 역사가 그렇게 펼쳐지고 있었던 때에 그가 있었던 그곳으로 향하도록 그를 자극했다. 이는 바로 그가 매일 저녁, 그가 낮에 찍었던 이미지들에 긴 설명문을 붙이도록 했던 바로 그 역사이다. 이런 설명문은 단순히 그의 작업의 일부는 아니다. 그것들은 그의 작업이 무시했던 차원을 이룬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다시 찾는 시간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이런 설명에 사진 그 자체에 못지 않는 열정을 쏟았다고 회상한다. 이 열정단지 보는 것만이 아니라 소통하려는 열정은 저널리스트에게 딸린 업무와 관례적 업무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으로부터 확연히 독립된 예술가에게 예비되었던 열정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그는 누구인가, p21, 피터 갤러시(뉴욕 현대 미술관 사진부장))

 

나는 지금 얼마나 열정적이며 살아 있는가. 책을 읽는 건 내 열정을 살피며 지피는 일.

 

요 며칠 읽은 문장 중 가장 인상적인 건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다”(한병철 심리정치첫 문장, p9)였습니다. 전체의 삶, 역사 속에서 낱낱의 삶들은 에피소드였습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의미를 찾는 몸부림이 겨우 우리가 알 수 있는 인생일 겁니다. 존 윌리엄스 스토너도 그런 인생을 말해 주었고,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도 스쳐가지 않습니까.

심리정치에 대해서도 비교해 보고 싶은 책이 갑자기 생겼습니다. 둘 다 완독해야 뭐든 가능하겠습니다. 에휴...

이렇게 많고 많은데, 지금 제가 접근해보고 쓸 수 있는 글은 겨우 이 만큼이었습니다.

후루룩~ 올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나요.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겠어요.

이웃의 잠바도 결국 도착하겠죠. 책 한 권을 읽는 동안이나 어쩌면 두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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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6-01-15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밤에 라면을요? 너무 달콤하면서도 위험한 유혹인데요~

AgalmA 2016-01-15 01:33   좋아요 0 | URL
라면은 역시 처음 한 젓가락이 쵝오b 그 다음부터는 점점 슬퍼지더군요ㅜ.ㅜ 배불러서 더 슬퍼요;

2016-01-15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5 0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5 0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6-01-15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 스네이프교수님이 또 별나라로 가셨답니다. 인터넷 뉴스에 나오는데 진짤까요.???

AgalmA 2016-01-15 01:41   좋아요 1 | URL
앨런 릭먼! 아, 그런 인상적인 배우도 흔치 않은데 안타깝습니다. 해리 포터에서 배우 때문에 그 캐릭터에 더 관심이 갔는데...
이 분도 암이 사망 원인이네요. 69세면 정말 일찍 가시는 건데...
암기보다 암을 더 조심해야 겠어욛ㄷㄷㄷ;;

2016-01-15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5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5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1-15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현 극단의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나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AgalmA 2016-01-20 04:04   좋아요 0 | URL
요며칠 그런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자유를 규정하는 주체에 따라 그 자유는 끝없이 도주할 구멍이 생길 거라는.

서니데이 2016-01-16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요즘 많이 바쁜가요.??
그래도 저녁은 맛있게 드세요.^^

AgalmA 2016-01-20 04:05   좋아요 1 | URL
몸도, 마음도 전혀 여유가 없었습니다. 인사 늦어서 죄송했습니다.

2016-01-20 0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0 0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