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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자본주의 - 자본주의를 모르면 자본주의에 당한다!
마토바 아키히로 지음, 홍성민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5년 9월
평점 :
ㅡ 먼저 총평
장점: 40여 년간 <자본론>을 연구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통찰을 빠르게 학습할 수 있다.
마르크스 자본론, 자본주의 태동과 200년 역사 흐름을 살피며, 현재 일본과 미국-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 역학을 정리해 볼 수 있다.
단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저자가 강조하는 [1대로 제한하는 재산 소유권], [직접민주제](유시민 씨도 이거 정말 바라던데....누군들 안 그럴까)를 이론 이상(以上)으로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피케티의 섬세한 데이타 분석과 해법 방안보다 현실성이 떨어졌다.
논거가 매우 단정적이어서 책 읽는 내내 보이지 않는 저자와 입씨름하는 기분이었다. 자본주의에 대해 바칼로레아 입시 시험을 치르는 듯한;
부작용 : 자본주의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에 아래처럼 딴지 걸고 싶은 게 많다.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그 효과를 현재 나로선 알 수 없다;
편린 : 현실과 이상理想의 조화는 언제나 불가능으로 보인다. 현실의 속성과 이상의 속성을 알면서도(거의 모른다면 더 문제) 원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인가, 세계의 문제인가.
ㅡ 개인과 자본주의
*시민사회가 남긴 소유권의 불평등에 대해 처음으로 이론을 정립한 사람은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입니다. 그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그것이 실패로 끝난 이유가 개인의 완전한 소유권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정교분리`와 `사회주의`라는 두 가지 확고한 이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농민과 노동자가 부자가 될 `자유`를 보장했다는 점은 평가할 수 있지만, 부자가 부자로 있을 `자유`도 보장했다는 점이 후세에까지 근본적인 문제로 남았습니다. 경제에서 불평등이 고정되거나 정당화되고 상속권에 의해 그 불평등이 영원히 지속되는 사회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을 토대로 성장한 것이 바로 자본주의였습니다. (p117~118)
**아시아나 다른 지역에서도 `민주주의`는 물론 `공동체`에 의한 직접민주제의 사례까지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는 봉건적이고 비민주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공동체의 해체야말로 민주주의인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개인의 해방과 연결될 뿐 아니라 분열한 개인으로서 정치를 재조직화하는 것을 민주주의라 정의하게 됩니다. 결국 그것은 대의민주주의, 혹은 간접민주제입니다. (p134~135)
Agalma ------- ˝개인화˝ 채찍질에 영합할수록 ˝자본주의˝는 더 뿌리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 논점은 동감이다.
헌데 저자는 기독교가 공동체를`개인과 신 사이의 적(敵)`으로 간주했다고 말하며, ˝공동체˝라는 개념과 ˝공산주의communism-공동체주의˝를 너무 일원화해 기독교와의 대척점을 강조하기만 한 건 아닌지.... 저자는 초기 기독교가 공동체 방식이었다는 걸 언급하면서도 기독교 자체가 ˝공동체˝적 질서로 구축되었고 지금도 그러한 세계라는 걸 간과 또는 배제하는 것으로 보였다.
또, ˝사적 소유는 기독교 사회가 만들어낸 독자적인 개념˝(p138)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소유욕을 자본주의에서 파생된 듯 말하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모든 농부가 자기 땅을 바라는 것이, 17세기 영국의 청교도혁명으로 농민이 토지 분할 소유를 인정받게 된 것(p140)에 기인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면죄부를 사고 파는 종교를 비판하며 개혁을 요구한 마르틴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이 부를 축적하는 면죄부(자본주의)가 된 과정을 보며, 사적 소유권(상속권)의 제한은 오래도록 성취하기 어려운 과제구나 했다.
ㅡ유럽적 민주주의 VS 종교로 뭉친 거대한 개인
*민주주의 개념은 개인이 신에게서 분리되지 않으면 성립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주된 민의는 그런 것입니다. 신의 의사가 아니라 개인의 생각입니다. 민주주의는 그런 기독교 관념을 전제로 형성됩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일상이 곧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교들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처럼 경전종교는 될 수 없습니다. 경전종교는 성서처럼 절대적인 정전이 있어서 철저히 그것만을 읽고 거기에 쓰여 있는 세계를 자신의 종교 이론 안에 주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신이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와 같은 진의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서양문화는 성서에 한정되지 않고 철저히 관련서적을 읽고 문자를 읽는 행위로 집적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거기에 쓰여 있는 문자는 과연 믿을 만한가 하는 근거를 철저히 찾아 읽어내는 것입니다. 즉, 사료비판의 학문 문화입니다. 이런 행위의 연장선에서 이론이 생겨납니다. 기독교는 실천보다 이론을 중시하는 문화를 가진 종교입니다. 여기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바로 서양의 합리주의입니다. (p128~129)
Agalma ------- 기독교 신학이 철학으로 이어지고 서양 근대 문명으로 나아가는 궤적, 논리상으로는 그럴 듯 한데 나는 이 논점에 자꾸 의문이 들었다. 기독교가 철저히 개인을 만들고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는데, 현시점과 연결해 더 넓게 볼 여지는 없는가. 지금 이스라엘과 이슬람 각각이 벌이는 무장 충돌은 종교성과 욕망의 혼재를 보여주고 있다. 더 정리해 보면, 그들은 `종교로 뭉친 거대한 개인`이자`종교 틀 안에서 세속을 단죄하는 개인들`이라는 것. 왜 나는 그들을 `공동체`라 말하지 않고 `개인들`이라고 말하는가. 원시 부족집단 외엔 거의 자본주의화된 이 세계에서 그들이 과연 `공동체`인지 `공동체` 척하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어떻든 그들은 과거 기독교가 파생시킨 개인과는 속성이 다르기에 자본주의에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미셸 우엘벡 소설 <복종>의 의미가 여기서 또 한 번 이해되는군.
ㅡ 헤겔의 철학은 유럽적이냐 아시아적이냐를 나누고 싶어했다
*본래의 그리스 철학은 유럽인이 읽은 것과는 다릅니다. 그 본질은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있었을 텐데, 헤겔은 이마저도 제외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철학은 아시아적 요소를 품고 있습니다. 헤겔을 포함한 유럽인이 자신들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해석한 그리스철학은 문서로 저술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철학은 기독교 시대에 일단 전부 버려지고 신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학이 벽에 부딪히자 13세기에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수용했습니다. 아퀴나스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그리스철학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며 당연히 진지하게 연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배우려 했던 것은 오히려 이슬람교도와 유대교였습니다.
15세기 이후 유럽인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그리스는 1829년까지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즉, 그리스철학의 본고장인 그리스가 이슬람권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그리스철학을 자기 문명사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기 위해 물밑작업을 벌일 때 유럽인들은 교묘한 작업을 했습니다. 유럽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영웅으로 포장했고, 그들의 철학을 고전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순수하게 `유럽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상이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고 치켜세웠습니다. 결국, 헤겔 철학사는 무엇이 철학인가 하는 진지한 물음과 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유럽적이냐 아시아적이냐를 판가름하는 일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렇듯 출발점부터 이상하니 그다음의 논리가 제대로 되었을 리 없습니다. (p131~132)
Agalma ------- 헤겔 역사 테제들 보기 전에 헤겔 두드려 맞는 거 보니 헤겔 점점 더 읽고 싶지 않아진다-_- 하지만 사놓은 미학 책은 읽어야겠지...
ㅡ 자본주의 불멸설
Agalma ------- 1992년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1952~)는 '역사 종언'설을 주장하며 '민주주의, 인권, 자본주의'는 한몸으로서 그것이 확대될 때 세계 역사가 종말하게(안정화) 될 것이라고 보았다.(p190~191) 자본주의가 지닌 문명성을 높이 평가한 해석이다.
그러나 그 해석을 뒤집어보면,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강조는 개인에 대해 강조하며 그의 성공심리를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위한 먹이로 이용되고 있다. '누구에게든 성공은 열려 있다. 당신의 노력(스펙쌓기)에 따라!' 자본주의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 일을 잘 시키기 위해 정규 교육이 도입되었던 것과 유사하다. 오래 전 한국 산업화 시기에 공장과 학교가 같이 붙어 있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었던 시스템은 누구를 위한 거 였나. 민주주의와 인권을 상징하던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와 충돌 관계였지만 현재 양상은 복잡해졌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층화, 해외 노동자 착취 등으로 노동조합은 매우 의심스럽게 되었다. 저자는 자본주의에 영합하는 노동조합으로 비판하고 있다.(p242~) 노동조합의 긍정적 방향을 전혀 거론하지 않아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저자에게 불만.
러시아와 중국의 지리적 특성(막강한 자원과 세계 견제)과 성격(자본주의에 맞서는 정치시스템과 경제력)을 볼 때, 후쿠야마가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는 현실적이진 않다.
자본주의 자체의 종말을 요구하는 지금 시점에서, 저자도 지적하듯이 후쿠야마는 자본주의의 특수한 성격과 불완전함을 놓친 단점도 있다.(p230~231)
ㅡ 뉴턴의 사과는 어디서 떨어졌나
Agalma ------- 저자 마토바 아키히로는 내가 과학책에서 읽었던 사실을 뒤집는 발언을 했는데,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ㅁ-)? 기독교 사회는 이슬람 사회의 ˝자연과학을 신의 모독˝(p133)으로 보았고, 뉴턴은 관찰이 아니라 이론으로 그 법칙을 발견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적 근거로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했던 걸로 봐선 불가능하진 않다. 헌데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그 법칙을 발견했다는 게 통설로 굳어져 있으니...쩝.
ㅡAgalma
사람들이 혼동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명확한 구분(p200)
사회주의 - 국가가 사적 소유를 제한한다. 편의적인 토지의 국유화, 자본에 대한 과세, 자본가의 경제활동 제한. 이렇게 해서 얻어진 이익을 국민에게 재분배하는 사회
공산주의 - 평등이라는 대원칙에 따라 사적 소유 자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음. 토지의 공동소유화. 자본의 개념이 없고, 자본가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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