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파이? 아니면 과자?
아트나인 영화관 & 자비에 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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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에게만 페르소나 배우가 있는 게 아니다. 관객에게도 페르소나 배우가 있다. 자비에 돌란의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그가 내게 그렇다는 걸 직감했다. 이쯤 되니 다른 관객들은 어떤 공감을 가지고 그를 보는 걸까 궁금하지만 알 수 없다. 그 내밀한 감정과 삶을 숨기고 영화 속에 몰래 투사하고 있을 테니... 나는 수다스러우니까 이 기록을 남긴다.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마이클(자비에 돌란)을 담당한 정신과 의사 로렌스가 갑자기 행방불명된다. 그린 박사(브루스 그린우드)는 당시 함께 있었던 마이클에게 단서를 얻고자 서둘러 병원으로 온다. 덧붙여 집착과 히스테리 가득한 동거녀와 다운증후군 조카를 키우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가족의 굴레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라는 이유도 있다.

 

그린 박사는 가장 다루기 어려운 상대를 만난다. 마이클은 협조에 대해 조건을 건다.

 

 

1 내 진료기록을 절대 보지 말 것
2 간호사 피터슨을 배제시킬 것
3 그리고 내게 초콜릿 박스를 선물할 것
이 조건이 왜 중요했는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알게 된다.

초콜릿이 영화 <제8요일>에 중요한 역할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 소재를 쓴 건 시작부터 영화 평점 50%를 깎아먹는다. <제8요일>이 오래전 영화라 지금의 관객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어떤 변명이든 감독의 한계를 드러낸다.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서 대화만 가득한 영화인데도 크게 지루하지 않았다. 자비에 돌란의 아우라가 집중이 분산되지 못하게 강력했기 때문이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울기 시작했다. 마이클이란 캐릭터에 공감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처음이자 유일하게 만났을 때 아버지가 쏴 죽인 코끼리를 본 것이 마이클의 평생 트라우마가 됐다. 누구도 그 상처를 들어주지 않았고 감싸주지도 못 했다. 홀로 죽은 코끼리처럼. 아버지는 아프리카 사냥꾼, 어머니는 듣는 자가 아니라 자기 노래에 빠져 있는 성악가. 부계사회에 적응할 수도 없고 모계사회의 보살핌도 받을 수 없는, 현재 지구는 그 상태다. 모두 외톨이며, 타인이 만든 규칙에 휩쓸려 사는 감옥이자 자신의 병을 감내해야 하는 정신병원의 삶이다.
누가 누굴 치료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무엇이 위안거리는 될 수 있겠지. 어머니의 노래를 자기 식으로 마이클이 간직했듯.

로렌스의 행방불명으로 자신의 규칙을 강요할 수 있게 된 단 하루. 마이클이 선택한 건 탈출이었다. 짐작하다시피 이 세계에서 탈출은 죽음뿐이다. 어딜 가든 타인의 규칙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유롭지 못하다. 로렌스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서만 귀 기울이는 이 세계에서 미래는 종(種)으로서의 끝없는 적응을 요구할 뿐이다. 마이클의 상처로 가득한 삶은 이미 조현병으로 낙인찍힌 채 감금이라는 처벌만 주어졌잖은가. 마이클을 사랑한다면서 바라보기만 했던 로렌스보다 더 나은 사랑을 하는 사람은 이 지상에 얼마나 되는 걸까. 이리저리 회피하면서 자기 위치를 고심하는 그린 박사 처지 아닐까.

그린 박사와 피터슨 간호사의 관계도 이 영화에서 중요한 복선이다. 이들은 오래전에 끔찍한 사건으로 자식을 잃고 그 상처 때문에 이혼했으나 이 사건으로 재회한다.
피터슨 간호사가 마이클을 끊임없이 제어하려 한 것은 지키지 못한 자신의 아이 때문이며, 그린 박사가 마이클을 그토록 살리려 애쓴 것도 그 트라우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이클이 사망하자 그린 박사가 하염없이 울며 ˝용서해 달라˝ 말하는 최종적 도착지는 죽은 마이클도 죽은 자식도 아닌 살아있는 피터슨 간호사였다. 화해는 산 자끼리만 가능하다. 너무 늦지 않는다면.

다시 돌아온 로렌스가 하는 말처럼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사랑하지 못한다. 무언가 깨달았을 때는 언제나 늦었고 많은 희생이 치뤄진 뒤다. 그린 박사와 피터슨 간호사의 해피엔딩은 마이클의 희생을 통해서 가능했다. 희망을 꿈꾸는 자는 어떻게든 찾을 수 있겠지. 그런데 평생 상처뿐이었던 삶을 구하기란 왜 이리 힘들까. 상대에게 약을 먹고 생각을 바꾸라고 말하는 속내 중에 스스로 빨리 이겨내라는 질책과 모종의 우월감은 없을까. 우리가 어떤 책임까지 감수하긴 힘드니까. 나 자신도 무리를 벗어날 수 없는 멸종 위기의 엘리펀트니까.

<제8요일>에서는 초콜릿만 먹고 끝나지 않았다. 옥상에서 떨어져 확실히 끝을 냈고, <엘리펀트 송>에서는 치밀하게 머리를 써야 했다.
미련하고 멍청한 나는 지금 흐린 하늘을 보고 있을 뿐이다. 때마침 비도 온다. 듣는다.




ㅡAgalma
 

 


덧)

영화를 현실에 너무 대입해 해석했다고 웃어도 되고 내 의견에 공감하지 않아도 된다.

모두 내실있는 자유를 꿈꿀 수 있기를.


 

 

 


[불편한 음악으로 불리기도 하는 ECM 레이블 창립자 만프레드 아이허와 이은수 인터뷰 - '듣기'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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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6-13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잘 봤어요.아직 못봤는데..기대가 엄청되는,,지극한 동감을 전해요..
이 세계가 정신병동과 다름없고 멸종위기의 얼마 안남은 희귀인류일지..
모르겠어요..우리 모두는 각자 독특하니..말이죠.^^

AgalmA 2015-06-14 00:20   좋아요 0 | URL
귀하죠. 다 귀한데....

스윗듀 2015-06-2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보고왔는데 agalma님 해석은 이러하군요! 전 그저 자비에돌란 헤....침 질질 정도 연출하지말고 그냥 연기했으면 좋겠어요 ㅋㅋㅋ

AgalmA 2015-06-28 02:08   좋아요 0 | URL
ㅎㅎ 자비에 돌란 연기면 연기, 연출이면 연출...감독하면서 주연 계속 하는 거 찬성합니다~ 자신이 각본, 감독한다면 캐릭터를 제일 잘 아니까 중요 배역을 자신이 소화해내고 싶기도 할 거예요. 그의 작품의 주인공들이 참 소화해내기 쉽지 않은 캐릭터이기도 하고.

스윗듀 2015-06-28 02:08   좋아요 0 | URL
ㅎㅎ말나온김에 자비에돌란 영화 중에 뭐 제일 좋아하세요? 마구 공유하고싶다능 _

AgalmA 2015-06-28 02:13   좋아요 0 | URL
안타깝게도 제가 그의 영화를 많이 못 봤어요^,ㅜ
<탐 엣더 팜>, <아이 킬드 마이 마더>, <하트비트> 볼 게 많더라고요...
lovelydew님은 뭐 인가요?

스윗듀 2015-06-28 02:16   좋아요 1 | URL
저도 아직 다보진 못했는데 지금까지 중에서는 <하트비트>에요! o.s.t로 쓰인 bang bang이란 노래가 있는데 영화 보고나서 일주일 정도는 계속 생각나더라구요 ㅋㅋㅋ

AgalmA 2015-06-28 02:19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하트비트> 돌란 패션 스타일링이 제일 제 취향이긴 하더군요. 오호호~~
오, ost가? 찾아서 들어봐야겠군욧!

스윗듀 2015-06-28 02:24   좋아요 1 | URL
악!!!!! 저도 그 스타일링 완전 좋아요😍 이런 멋진 게이같으니!

AgalmA 2015-06-28 02:26   좋아요 1 | URL
역시👓...😉

스윗듀 2015-06-28 02:28   좋아요 0 | URL
ㅎㅎ참고로 bang bang은 버전이 아주 많은데 영화삽입곡은 dalida가 부른 bang bang이에요

AgalmA 2015-06-28 02:34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 게이 영화는 왜 그렇게 신파로 내달리는지...현실 반영이라 해도 표현이나 연출에 있어 자비에 돌란에게 배울 게 많다고 생각됩니다ㅎ;)
네, dalida-bang bang~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