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작노트 ◆
“별의 반짝임처럼 짧은 순간을 사는 우리 존재는
죽음에 가까이 이르면 형언할 수 없는 덧없음을
드러낼 따름이다.
죽으면 어디로 가고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는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이 영화를 늙은 떡갈나무, 나의 아버지에게 바친다.
그 분은 그 이유를 잘 알고 계신다...”
- PROLOGUE <비우티풀>은 한 아버지와 그의 자녀들간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욱스발의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그는 현대 바르셀로나의 위험한 암흑가에서 부성(父性), 사랑, 영성, 범죄, 죄책감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조화시키려 몸부림치며 갈등을 겪는 사람이다.
그는 불법적인 일로 생계를 유지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희생에는 끝이 없다.
인생이 그러하듯이 이 영화는 처음 시작한 곳에서 끝나는 순환적인 이야기이다.
그를 둘러싼 운명과 한계점이 교차할 때 흐릿한 구원의 길이 밝아지며
아버지에게서 아이에게 전해지는 유산과 좁고 긴 인생길을 헤쳐 나가는 부모의 손길을
환하게 비춘다. 그것이 밝건 나쁘건 – 또는 ‘비우티풀’ 하건.
- 비우티풀에 대하여(On Biutiful)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직접 쓰다
<바벨>로 전 세계를 돌고난 후 나는 여러 이야기의 동시 진행, 파괴된 구조, 내러티브를 넘나드는 것들은 이제 충분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든 영화들은 모두 다른 언어로, 다른 나라에서 찍었다. <바벨>이 끝나갈 무렵, 너무 지친 나머지 다음 영화는 반드시 한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한 가지 시점에서, 딱 한 도시에서, 직선적인 이야기 진행으로 그리고 내 모국어로 찍겠다고 결심했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바벨>이 오페라라면 <비우티풀>은 레퀴엠… 그리고 나는 여기까지 왔다. <비우티풀>은 내가 한번도 해 보지 않은 것들이다. 단선적인 이야기로 주인공이 내러티브를 형성해 가는, 나에게는 미개척 장르인 바로 비극(the tragedy)이다.
나에게 <비우티풀>은 이 생애에서의 짧고 미미한 영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별의 반짝임처럼 짧은 순간을 사는 우리 존재는 죽음에 가까이 이르면 형언할 수 없는 덧없음을 드러낼 따름이다. 죽으면 어디로 가고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이 이야기는 욱스발이 마주한 시간과의 고통스럽고 아찔한 경주이다. 삶의 마지막 날 인간은 무엇을 하나? 그는 삶과 죽음 중 어느 쪽에 전념할까? 어쩌면 초월에 대한 꿈은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말이 맞았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시작부터 관심을 가졌던 건 죽음이 아닌, 피할 수 없는 상실이 발생했을 때의 삶과 삶에 깃든 모습이었다.
현대 사회는 많은 것들 가운데서도 사망 공포증(thanatophobia)으로 깊이 고통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과 미지의 심연에 빠져드는 순간 계몽되는 인간이라는 추악한 시(詩)를 만드는 것은 틀에 박히고 주제에 치우친 모순이고 이것은 도전이라는 것을 안다. 내가 모순이라고 한 것은 욱스발 안에서의 소용돌이가 그의 내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향해 가는 동안, 유럽의 새로운 정치사회적 현실이라는 위기는 반대 방향으로 그의 외적인 소용돌이를 향해 뻗어가기 때문이다. 뉴스에서는 모든 유럽 도시마다 형성된 이 인간 벌집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통계를 발표한다. 이 아찔하고 공허한 뉴스는 생명력을 얻기 어렵다. 항상 가려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 이민자들의 냉혹한 현실. 2007년 바르셀로나를 방문했을 때 욱스발이라는 캐릭터가 나에게 자기는 이 세계 사람이라고 했다. 나로서는 이 현실 중 한 가지만 강조할 수 있어도 보람있는 여행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극단적 현실로 보이는 것들이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이고 매일매일 겪는 일상이다. 많은 배역들을 비전문 배우들이 연기했고 그들은 영화 속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어떻게 발생되었는가?
나에게 영화는 항상 짧은 대화, 차창을 통해 언뜻 보이는 풍경, 한 줄기 빛, 몇 개의 음(音)같은 모호한 데서 시작된다. <비우티풀>은 2006년의 어느 차가운 가을 아침, 아이들이 아침식사를 준비할 때 내가 손이 가는 대로 튼 CD인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에서 시작되었다. 몇 개월, 전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로스 앤젤레스에서 텔룰라이드 영화제로 가는 길에 ‘라벨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틀었다. 네 개의 모서리를 통해 보이는 풍경은 숨이 멎을 듯했다. 그러나 라벨 곡이 끝나자 애들 둘이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이 곡이 가진 그 우울한 분위기, 슬픔의 의미와 아름다움에 아이들이 압도된 것이다. 아이들은 그걸 받아들이거나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느낄 뿐이었다. 그 날 아침 라벨의 피아노 곡을 다시 들었을 때 두 아이 다 CD를 멈춰 달라고 했다. 그들은 그 정서적 충격과 그 음악이 어떻게 그들을 감동시켰는지를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한 캐릭터가 내 머릿속 문을 두드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올라 (안녕), 내 이름은 욱스발이야.” 그 이후로 3년 동안 나는 그에게 내 인생을 바치게 된다. 그가 뭘 원하는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는 오만했고 모순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사실 내가 그를 어떻게 소개하고 싶은지 그를 어떻게 끝내고 싶어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 방금 시작과 끝이 생각났다.
그로부터 1년 후, 바르셀로나의 엘 라발 구역을 걸으면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바르셀로나는 유럽의 여왕이다. 그녀는 진정 아름답지만 다른 모든 여왕들처럼 보이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면도 있고 좀 지루하기도 하고 관광객들과 엽서 사진가들이 감탄해 마지 않는 부르주아적인 아름다움도 있다. 난 17살 때부터 세계를 돌아다녔고 화물선에서 바닥 청소부로 일했으며 아무도 보지 않는 숨겨진 동네에 매력을 느끼고 궁금해하고 매료되었다. 내가 반응하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최근에 바르셀로나와 유럽 대도시 대부분에 생겨난 다양하고 복잡한, 변두리의 다문화적 새로운 세계를 말이다. 17살에 처음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에는 이런 걸 상상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시 찾았을 땐 바로 욱스발이 여기 속한다는 걸 알았고 그가 세계를 새롭게 재편해가는 이 절충적이고 활기찬 동네에 산다는 걸 알았다.
1960년대에 프랑코는 카탈루냐 지역에 수많은 스페인 다른 지방 사람들이 들어오도록 촉진하고 이주시켰고 카탈루냐의 문화를 파괴하고 카탈루냐어 사용을 금지시켰다. 거대한 경제 불황의 와중에 카스티야어(표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 대체로 엑스트레마두라, 안달루시아, 무르시아 지방에서 온 – 자기 나라에서 이민자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산타 콜로마라라는 바르셀로나 교외 지역에 거주하도록 배정되었고 가난한 이민자들과 그 아이들을 가리켜 경멸하는 말인 “샤르네고스” 로 알려지게 되었다. 80년대와 90년대의 경제 회복력에 힘입어 “샤르네고”들은 산타 콜로마를 떠나기 시작했고 전세계에서 몰려든 이민자들이 그 자리를 채워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오 치노 (중국인 동네)’로 알려진 엘 라발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들이 모인 것으로 유명하며 나는 바달로나 인근의 산타 콜로마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이 곳에는 세네갈인, 중국인, 파키스탄인, 집시들, 루마니아인 그리고 인도네시아인들이 아무 문제 없이 다같이 평화롭게 모여 살며 스페인에 동화될 필요나 걱정 없이 그들 각자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솔직히 스페인 사회도 그들을 동화시키는 데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여기는 살균되지 않은 동네이다. 인간적이고 특징이 있고 모순적이다. “공존(convivencia)”에 딱 들어맞는 예이고 DNA 조합을 보면 완벽한 UN이다. 과거에는 300년 걸렸던 이주와 인종 혼합을 이곳에서는 25년만에 경험했다. 물론 고통과 비극이 없는 건 아니다. 매해 수백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스페인 연안에 들어오려다 익사한다. 그 장면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또한 신문에는 매일같이 유럽 곳곳에서 학대당하고 착취당하는 중국인 이민자들의 기사가 실린다.
샤오 훙 파이가 <중국의 속삭임 : 영국의 숨은 노동 부대의 가려진 진실>에 썼듯이 영국에만 해도 백만 명의 중국인이 있다. 미국과 달리 그들은 유럽의 도시에 와서 그 문화에 섞여들지 않는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이곳에 와서 고향에 남겨진 사람들을 돕는다.
그러나 <비우티풀> 이야기의 큰 맥락으로 찾아낸 이 사실은 바르셀로나와 유럽 도시 대부분에서 일어나는 흥미로운 사회 현상이라기보다 정서적인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혜택받은 사람이지만 이민자이고 10년간 그렇게 지내왔다. 이민자의 양심 혹은 지리적인 고아원이라는 것이 그들의 심리 상태이다. <비우티풀>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빛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판 노예들의 어려운 일상을 강조할 따름이다. 일과가 끝나고 영화가 기록이 아니게 되면 그것은 꿈이다. 그리고 몽상가로서 언제나 혼자이고 화가로서 흰 캔버스만 남은 혼자이다. 혼자라는 것은 질문을 하는 것이다(고다르가 말했듯이)… 그리고 영화를 만듦으로써 그 질문들에 대답한다.
- 캐릭터에 대하여…난 캐릭터 각각에 대해 꼼꼼하게 일대기를 썼다. 중국인과 아프리카인 캐릭터에 대해서도 썼다. 각자 실질적인 캐릭터이기만 할 게 아니라 과거와 이유가 있어야 했다. 이 작업을 한 이유는 캐릭터를 좀 더 잘 이해하고 배우들이 그들의 배경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욱스발은 “샤르네고”로 태어났고 산타 콜로마에 사는 10%의 카스티야어 사용자 중 한 명이다. 이민자들이 그에겐 낯설지 않다. 그는 그들과 함께 자랐다. 그는 그들과 함께 일한다. 일요일에 그 동네를 걷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인 경험이다. 집시들이 거리에서 모여 노래를 부르고 동시에 무슬림들은 공원에서 기도하고 작은 이슬람 사원의 스피커를 통해 기도문을 읊으며 카톨릭 교회는 중국인들로 가득차 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똑같은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여정이 되길 원했다.
바르셀로나에 다녀온 후로 나의 무의식은 강박적으로 이야기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내 딸 마리아 엘라디아가 올빼미는 죽을 때 부리로 털뭉치를 토해 낸다는 얘길 해주었다. 그날 밤 난 그 모습이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난 욱스발을 모순이 가득한 인간으로 봤다. 삶이 너무 바쁘고 복잡해서 평화롭게 죽지도 못하는 자, 이민자들을 법으로부터 보호하면서도 그 자신은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자, 영적인 재능이 있어 죽은 자들과 이야기할 수 있고 그들을 빛으로 인도할 수 있는 거리의 남자…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돈을 받는다; 사랑으로 상처를 입었고 두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들에게 성질을 내고 마는 家長; 모두가 의존하지만 그 또한 모두에게 의존하는 사람; 원시적이고 단순하고 미천하지만 깊은 초현실적 통찰력을 지닌 남자.
위성에 둘러싸인 태양. 나는 그를 이런 신체적 시스템으로 봤는데 몸은 거리, 심장은 가족, 영혼은 부재한 아버지를 찾는 것이다. 각본을 쓰기 전에 지도를 그렸다. 욱스발의 여정과 그의 심리 상태를 도식화한 두 개의 나선과 한 개의 선을 그렸다. 나선 하나는 안에서 밖으로 나갔다. 이것은 통제되지 않는 그의 매일매일의 삶이다. 다른 하나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다. 이것은 욱스발의 마음이며 아주 깊은 영역까지 깊숙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 두 나선을 잇는 선을 그렸다; 그것은 영혼이다.
나의 아버지는 저소득 노동자나 택시 기사들은 우울해질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건 부자들의 사치야”라고 하셨다. 삶은 그들에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욱스발이다; 절망적이고 외로운,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사람.
- 캐스팅에 대하여…마람브라(마리셀 알바레스)
이헤(디아리아투 다프)
안나(안나 보우차이브)
마테오(기예르모 에스트레야)
<비우티풀>을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난 줄곧 하비에르 바르뎀을 욱스발 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어떤 배우도 그가 한 것처럼 캐릭터를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없었으면 이 영화를 못 만들었을 것이다. 나에겐 오직 그만이 욱스발이었으니까. 수년간 하비에르와 나는 함께 작업하려고 시도해 왔다. 이 역할이 우릴 촬영 현장으로 데려다 줄 다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배우들과 일하는 스타일과 과정은 간단하거나 쉽지 않다. 난 프로젝트마다 완전히 몰두해서 일하고 배우들에게도 똑같이 요구한다. 나는 완벽 혹은 내가 완벽이라고 여기는 것에 집착한다.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정말 힘든 여정이다. 글쎄, 하비에르를 그 등식에 집어넣는 건 마치 배고픔과 굶주림을 한꺼번에 겪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린 둘 다 만족을 갈망했다. 하비에르는 그냥 뛰어난 배우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특별하다. 모두가 다 그걸 알고 있다. 그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그의 캐릭터에 대해 빼곡하게 메모를 쓴다. 그는 헌신적이고 열정적이고 훌륭함에 집착한다. 그러나 하비에르를 그렇게 특별하고 독특하게 하는 것은 깊고 강한 이미지와 심오한 내면의 삶을 기반으로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무게감, 비중감, 심상치 않은 존재감이다. 그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좋든 나쁘든)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몇 주에 걸쳐 여러 이야기를 여러 배우들과 촬영했던 나의 다른 영화들과 달리 이 작품은 아주 기나긴 시간 동안 치열하게 찍었고 거의 모든 씬에 하비에르가 등장해 말 그대로 그의 등에 필름을 얹고 가는 셈이었다. 매 씬마다 요구되는 꼼꼼함과 감정의 강도를 계속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특히 배우들과 비전문 배우들, 아이들간의 균형을 맞출 땐 더 그랬다. 2008/09년의 가을과 겨울 동안 내가 알던 하비에르 바르뎀이란 사람은 욱스발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그렇게 사라져 있었다.
우리는 이 작업이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것처럼 매일 매일 점점 더 힘들어지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노선을 짜고 논의했다. 나는 영상 문법 언어와 영화의 모든 측면을 디자인했다. – 순차적 촬영 순서, 의상, 미술, 카메라 움직임 그리고 영화의 각 단계마다 다른 포맷을 사용하는 것까지 – 그가 잘 헤쳐나가서 우리 둘 다 원하는 곳에 도달하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강하고 엄격하고 군림하는 자에서 자유롭고 굴할 줄도 알고 고통을 통해 빛을 보고 느끼는, 지혜를 얻는 사람이 되도록. 우린 둘 다 굉장히 몰입해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요구하는 위험한 곳까지 너무 들어갔고 다시 돌아나오기 힘들 때도 있었다. 이런 영화를 하면 상당히 진이 빠진다. 그러나 그 대단한 노력과 희생은 우리가 나눈 작품에 대한 굉장한 만족감과 비례했다.
- 마람브라에 대하여캐릭터를 쓰고 캐스팅하기 가장 어려웠던 역할 중 하나는 마람브라였다. 양극성 장애는 조울증이라고도 불리는 복잡한 정서 장애로 희화화되기 쉽다. 나는 아주 특정한 분위기와 기운을 찾고 있었다. 스페인 전역에서 캐스팅을 진행했고 거기서 아주 재능있는 여배우들을 많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던 사람을 찾지는 못했다. 본 촬영 들어가기 3주 전, 난 아직도 그 배우를 못 찾고 있었고 촬영을 연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르헨티나에서 공개 캐스팅을 했고 거기서 우린 마리셀 알바레스를 봤다. 비디오 테스트만으로도 바로 이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마리셀은 잠도 못 자고 24시간 후에 스페인으로 날아와서 그보다 24시간 전에 받은 대본으로 너무나 훌륭하게 리허설 테스트를 해냈다. 마리셀이 스페인에 도착한지 12시간만에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가기 전, 카메라 테스트도 했다. 평생 처음 필름 카메라 앞에 선 마리셀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가 제시하는 어떤 이미지나 상황만 떠올려 보라고 했다. 모든 현장과 스탭들이 숨을 죽였다. 1분 후 난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전히 신비한 힘이자 마법이었다. 마리셀에게는 마람브라에 필요한 위험함과 부드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녀는 수년간 뛰어난 연극 배우로 활약했으며 이 지구상에서 아주 찾아보기 힘든 광범위한 작품 분야와 기교를 지니고 있다.
- 이헤에 대하여이헤 역을 위해 우린 스페인과 멕시코에서 1,200명 이상의 여성들을 살펴 봤다. 디아리아투 다프는 미용사로 일하던 바르셀로나 시내의 미용실에서 발견되었다. 세네갈인이고 수많은 다른 아프리카 여성들처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목숨 걸고 조국을 떠났다. 그녀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외삼촌이 남편감을 골라주는 세네갈 전통에 따라 15세에 50세 남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폭력적인 이 남자로부터 도망쳤고 이후 좋은 젊은 남자와 결혼해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경제 상황이 절박한 작은 마을에 살던 그녀는 스페인에서 일자리를 찾기로 결심했다. 캐스팅할 당시 그녀는 3년 넘게 아들을 못 보고 있었다. 밤낮으로 일하면서 남편과 아이 뿐 아니라 세네갈로 보내줄 수 있는 그 적은 돈에 의지하는 다른 30명까지 부양하고 있다. 디아리아투는 미용실에서 일자리를 잃을까봐 늘 두려워했다.
리허설을 하는 동안 그녀는 내가 원하는 대로 그 캐릭터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진솔하고 깊이있게 그 역을 연기했다 – 베개를 갖고 자기 아이인 양 연기하던 상황에서도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이 들렸다. 이헤의 이야기는 그녀의 이야기였다. 실제의 삶이 영화에서의 배역과 그렇게 가까운 사례는 그 동안 본 적이 없었다. 현실이 허구와 함께 내 눈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그 영화를 만드는 동안 힘겨워했지만 그녀와 같은 처지의 수백만 여성의 이름으로 목소리를 내겠다는 약속이 더 컸다. 난 늘 이 아이디어가 좋았는데 이헤가 부차적인 역할로 시작했다가 나오는지도 모르게 다시 등장하고 이야기의 주춧돌 역할로 끝난다. 그녀는 마마 아프리카(Mama Africa) – 이성적이고 똑똑하고 애정어린 어머니이다. 그것이 디아리아투의 실제 삶이다. 영리하고 재능 있고 감성적이고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진실하다.
- 안나(안나 보우차이브)와 마테오(기예르모 에스트레야)에 대하여아이들은 항상 발굴하기 어렵다. 아이들이 등장하는 씬은 항상 어려운데, 일어나는 일들의 소재 때문이기도 하고 이 경우에는 하비에르 바르뎀과 마리셀의 신체적인 특징 때문에 더 쉽지 않았다. 마테오 역을 할 기예르모는 일찌감치 찾아 두었지만 욱스발의 딸을 찾다가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촬영 들어가기 겨우 2주 전, 곧 찾게 되길 바라며 일단 없이 진행하기로 하고 촬영할 한 동네의 학교에서 사전 점검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 학교에 다니던 안나가 내 등을 두드리더니 뭐하는 거냐고 물었다. 난 돌아서서 그 아이를 봤다. “영화 만들어.” 그랬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도 출연하고 싶어요.” 그렇게 된 거다. 그 아이는 답이 바로 자기 코끝에 있는지도 모르고, 온 스페인을 돌며 찾아다니던 절박한 사람의 문을 두드린 천사였다.
에두아르드 페르난데스, 루벤 오챤디아노, 쳉 타이센, 루오 진, 마르티나 가르시아 그리고 함께 한 모든 훌륭한 출연진들에 대해 몇 시간이고 얘기할 수 있지만 내가 말하는 것보다 그들의 연기를 직접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난 이 영화에서 나의 오랜 공범자들과 함께 일하는 영광을 누렸다. 우리가 차갑고 기술적인 무의미한 음악에서 멀어져 갈 때 그리고 모든 영화가 여기서 벗어나 기억, 욕망, 이성, 꿈들, 빛과 이미지에 대한 의견과 주관적인 현실을 향해 갈 때 바로 그 록큰롤 밴드가 베이스 라인, 드럼 그리고 여러 악기들로 음악을 더 풍부하고 더 즐겁게 해 주었다.
“언제나처럼 이 영화를
가족에게 바친다 –
그들이 내 가족의 일부여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유이자 근원이고
혹은 내가 영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은 누군가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내 아버지께 바친다.
그 분은 그 이유를 잘 알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