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 눈을 너무 오래 감지 마 … 음악들이 다 날아갈 때까지만 …
■ 섹슈얼리티라는 낱말은 1800년대에 생물학과 동물학에서 기술적인(technical) 용어로 존재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적인 혹은 성을 갖는 것의 성질’의 의미로 널리 사용된 것은 19세기 말경이다.(p57)
킨제이 보고서 같은 각종 성문화 조사가 과학적 담보로 특정한 성적 관행의 자질에 대한 도덕적 반감은 중화(p65)시켰을지언정,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터져 나온 ‘남녀평등’, ‘성 해방’이니 하는 말들이 나는 ‘불평등’ 만큼이나 문제적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제대로 담론화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여성의 이권다툼’이나 ‘남성 공격만 일삼는 페미니즘’으로 치부되기 일쑤고, 남녀노소불문하고 사회적 인식 저반도 그리 나아 보이지 않는다. 아래는 앤소니 기든스가 미국의 러빈 조사와 관련해 말한 부분인데, 미국만의 상황으로 보이지 않았다.
■ 남성들은 대부분 여성들을 성적으로 손에 넣기가 보다 쉬워졌다는 사실을 환영하며, 장기적인 성적 결합관계에 있어서는 지적·경제적으로 동등한 파트너를 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빈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남성들은 그러한 선택에 내포되어 있는 여러 의미에 대해 분명하고도 뿌리깊은 불안감을 보여준다. 남성들은 이제 여성들이 ‘친절하게 해 줄 능력을 상실했다’거나 ‘더 이상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지 못한다’고, 또 ‘여성들은 아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내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남성들은 평등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평등이 그들에게 초래하는 결과에 대해서는 거부하거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p40)
나는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다. 한국남성들이 동남아로 신부를 구하러 떠나듯이 한국여성이 그러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 사회에서 어떤 소리가 나올까. 여성 비하 사이트의 인구가 2배는 증가하리라. 왜 누군가의 결혼(연애) 못함이 누군가의 콧대 높음 등으로 치부되는가. 같은 식으로 반대로 생각해볼까. 여성들 경우는 자신의 못생김/ 뚱뚱함을 고민한다. 상식이 없거나 넘어서는 사람(남/녀)은 과연 일부일까. 신부를 구하러 떠나는 사람들의 권리 만큼이나 거부하는 사람들의 권리도 있는 것이다. 결혼은 한 개인의 행복추구권이자 선택 문제이다. 왜 사회적 눈초리로 억압하는가. 이 억압들은 온갖 모습으로 도처에서 도깨비들처럼 출몰한다. 피해자이면서 왜 울면서 사과해야만 했는가.
[그것은 알기싫다 - 122b. 광범위한 책임전가:성폭력을 소비하다]
http://www.podbbang.com/ch/7585?e=21643417
우리는 이런 소식들을 너무도 들어와서 일반화하고 슬슬 회피한다.
모두는 정말 사랑과 공존을 원하고 있는 걸까. 서로를 인간으로, 남성/여성으로 존중하고 있는 걸까. 관계의 목적성(연애, 경제적·사회적 안정, 결혼, 자식 등)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사랑을 원하는 만큼 상대에게 얼마나 이해와 배려를 하고 있을까.
■ 현대 이전의 유럽에서 대개의 결혼계약에 기초가 된 것은 서로 간의 성적 매력이 아니라 경제적 상황이었다. 가난한 사람들끼리의 결혼은 농업노동을 조직하는 수단이었다.(p77)
낭만적 사랑 복합체가 가진 내재적으로 전복적인 특징은, 사랑과 결혼과 모성의 결합에 의해, 그리고 진실한 사랑이란 일단 발견되기만 하면 영원하다는 관념으로 인해 오랫동안 억눌러져 있었다. 결혼이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영원했던 때에는, 낭만적 사랑과 성적 파트너쉽이 확실히 구조적으로 적합한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종종 오랜 불행의 나날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결혼하기 위한 맹세로서의 사랑과 일단 결혼한 이후 계속해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요구 사이의 연관이 워낙 빈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이 실질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임노동을 남편의 영역으로 배당하고 아내에게는 가정을 배당한 성별 분업 덕분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점잖은’ 여자라는 표시로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결혼에 감금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알 수 있다. 남성들로 하여금 싹트는 친밀성의 영역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준 동시에 또한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도록 한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p87~88)
§§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 - 그녀는 언제까지 거기 있을까
페미니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 내게 가장 부각된 점은 인물들(에리카의 어머니-에리카/발터 크레머-에리카)관계의 삐뚤어진 에고이즘이었다.
같은 오스트리아 작가인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치를 떨었던 조국의 그 속물주의를 대변하는 듯한 에리카의 어머니는, 에리카를 부와 명예를 거머쥔 예술가로, 부재하는 남편으로, 자신의 주택부금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억압하고 착취한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앤소니 기든스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제 3장 낭만적 사랑, 그리고 다른 애착들’에서 '가부장적 권력의 완화에 따른 모성의 발명' 언급이 적확하다)
에리카의 제자인 발터 크레머는, 고고해 보이는 에리카가 늙은 어머니에 붙잡혀 사는 노처녀 신세라 자신을 거부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제 열정에 취해 집요하게 접근한다. 그는 자신의 상상을 충족시켜주기는커녕 훼손시킨 에리카에게 혐오와 폭력으로 되갚아준다. 발터 크레머는 다재다능함, 출중한 외모와 젊음, 활력적인 스포츠를 영위하는 자신의 외면적 삶에 취해 스스로가 에고로 가득 찬 마초라는 걸 모른다.
에리카는, 어머니와 불분명한 꿈에 얽매여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 채 자라나, 발터가 나타나자 이제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길 바란다. 그녀는 평범한 사랑으로는 발터를 붙잡지 못한다는 걸 알고 영구적인 애착관계를 만들어내려고 그에게 S/M을 권했지만 결국 파멸한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앤소니 기든스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제 3장 낭만적 사랑, 그리고 다른 애착들’에서 여자에게 요구되는 ‘정숙한(Chaste)’의 신화가 얼마나 견고한 지 잘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굳이 이 책을 보지 않더라도 드라마와 영화, 소설, 유행가를 통해 익히 안다. 하지만 앤소니 기든스가 '낭만적 내러티브와 열광적 소비자'로 여성만을 지칭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바로 위 발터 크레머도 만만치 않은 예이므로.) 그녀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성적 가학성 아래 ‘자기 본래’가 있음을 누군가 알아봐주길 바랐지만 그녀 또한 상대를 ‘지겨운 어머니’, ‘얕잡아보는 제자’, ‘질투 나는 여자애’, ‘더러운 터키인’ 등으로 바라보는 왜곡을 보지 못한다.
이 소설의 모든 인물은, 자기 결여 충족만 추구하고 상대에겐 철저히 이기적이다. 그들에겐 ‘모정으로 치장된 폭력’, ‘예술 뒤에 숨어 가하는 폭력’, ‘사랑이라 말하며 복종을 원하는 폭력’의 감정계산만 있고, 성찰이 없다.
이 소설이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자전적 소설인 걸 생각하면 더욱 가슴아픈 사실이다.
앤소니 기든스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으로 돌아와,
그는 푸코가 성(性)을 담론화한 기여도는 인정하지만, 성을 종교-(생명)권력 구도하의 피지배적 혹은 행정 권력 관계성으로만 파악하고 ‘개인의 제도적 성찰성, 선택성’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프로이트 경우는 '도착' 등의 과도한 병리적 해석이 있긴 했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개인이 자기 정체성과 신체에 대해 더욱 성찰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 프로이트의 중요성은 그가 성에 대한 현대적 몰두를 설득력있게 정식화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프로이트는 섹슈얼리티와 자기 정체성의 연관관계가 전혀 분명하지 않았을 때 그러한 연관을 밝혀냈고 또한 동시에 이 관계가 문제가 있는 것(problematic)임을 보여주었다.(p66)
앞서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대로, 性의 외부적 굴절들과 사회적 문제점들은 내부적 억압에 대한 성찰 없이는 해결 모색은 어려울 것이다. 힐링에 이어 심리학 저서들이 이토록 많이 출판되고 있는 상황은 우리 스스로도 이미 이 문제에 심층적으로 고심하고 있다는 방증이겠지만, 모두 자신을 들여다보기도 바쁘다. 나부터도 너무나.
§§§ ……
회복하려 안간힘을 쓰는 이 시간도 좋다.
말이 좀 없으면 더 좋으련만.
나다운 건 말이 있는 거였던가, 없는 거였던가.
아무려면 어때. 곧 날아갈텐데 ……
ㅡ Agal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