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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란 무엇인가 ㅣ 동문선 현대신서 61
니콜라스 쿡 지음, 장호연 옮김 / 동문선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 논쟁이 되지 않기 위한 취향으로의 도피
대화를 하다가 최근 출간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2015) 얘기를 했다. B가 아무 말없이 듣다가 조용히 물었다. “유시민이 누구예요?” (잠시 정적) 서로 당황했다. 나는 놀라움을 가라앉히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 기초연금을 마련한 정치인 등등을 언급해나갔는데,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정치인 유시민을 공격하는 부정적인 견해의 사람들은 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정치·사회를 깡그리 외면하고 산 B를 보며 화가 나면서 마음도 아팠다. 그동안 투표도 안 했단 건 뻔한 일이었고, B도 그렇다고 확인시켜 주었다. 지금은 신용불량자 상태지만 B는 젊은 나이에 무슨 무슨 협회 회장직도 했고, 종교계 출판 사업체도 운영했으며 자신도 책을 써보겠다고까지 하는지라 유시민씨의 책 얘기를 꺼낸 거였다. 교회에 주 3회 가는 것에 방해될까 봐 일도 가려서 하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지만, 전도 문제로 나와 큰 충돌이 있기도 했다. 이제 B와 나 사이에 ‘신’과 ‘정치·사회’에 대한 관심은 취향의 벽처럼 되어 버렸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2015) 목차에 나와 있던 “취향을 두고 논쟁하지 말라”가 우리의 인습에 대한 논증을 잘 펼쳐주었기를 바란다. 그럴 리 없겠지만 미진함이 느껴지면 쇼펜하우어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을 읽고 반격할 겁니다ㅎ
§§ 옹호와 합리성 사이
영국의 음악학자이자 음대 교수인 니콜라스 쿡 『음악이란 무엇인가』(동문선, 2004)는 의외의 내용이었다.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요즘 내가 고르는 책들은 거의 사회학 관련 책인데, 이 책도 내용상으로는 음악 사회학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본문 160여 페이지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쿡은 음악과 음악에 관한 사고방식에 스며있는 사회적·제도적 구조에 대해 고찰 해나가고 있다. 음악의 전통적인 보수성을 생각해 볼 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음악 전반에 대한 쿡의 비판 의식은 도전적이다.
■ 음악은 국가나 지역의 정체성 형성(외국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전통 음악에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경우)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 리듬앤블루스와 로큰롤이라는 음악 형식은 1960년대 청년 문화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p15)
니콜라스 쿡은 ‘음악’을 비축하고 축적할 수 있는 ‘미적 자본’으로 명명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영국의 교과 과정과 중등교육 수료 자격고시 요강이 기초를 두고 있는 ‘작곡하기·연주하기·감상하기’는 ‘생산·유통·소비’ 자본주의 모델과 닮았다. 이러한 ‘작곡하기·연주하기·감상하기’라는 구분은 구별을 영속화하고, 연대기적 순서를 만들어냄으로써 가치의 위계질서로 이어진다. 아무리 뛰어난 식견이 있다고 해도 작곡가나 연주가가 아니면 우리는 ‘음악가’도 ‘전문가’도 아니다. 청자는 소비자로서 “경제적으로 떠받치는 문화 과정에서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역할”(p30)을 수행할 뿐이다. 우리가 경외하는 음악이 “자연의 산물처럼 보이는 것은 음악의 특별한 성질 가운데 하나”이며, 음악은 인간이 만든 문화의 산물, 음악적 가치들은 “보편적이기는커녕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산물”(p31)이다.
19세기 초 중산계층(부르주아)이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영역을 장악한 시대의 예술은 “부르주아 주체성의 형성”의 발전이었고, “감정과 정서라는 내적 세계를 탐구하고 찬양”했다.
음악 문화에 스며든 권위의 관계 속에서 연주자는 작곡가의 의도(권위)에 따라 해석해야 했고, 이 권위주의는 지휘자와 관현악단 연주자들 간의 관계에서 오늘날에도 발견되고 있다.
음악적 활동에 있어서도 역사가 서술되는 방식에 의해 여성은 소외되었다. 쿡은 19세기 중반까지의 음악계의 여성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 ‥‥‥ 요점은 여성이 음악을 연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집에서 연주했다는 것이다. 오페라 하우스 같은 예외를 제하면 여성들은 아마추어로 돈이 아닌 친구들을 위해 연주했다. 그리고 작곡은 거의 하지 않았다. 심지어 경이적인 재능을 타고난 멘델스존의 손위누이인 파니 헨젤조차 몇 곡의 노래만 남겼는데(동생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들간의 편지를 보면 그녀가 당대의 사회적 기대 ㅡ 여기에서 작곡은 포함되지 않았다 ㅡ 에 순응하도록 압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두는 일종의 악순환을 낳았다.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작곡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질적으로, 심지어는 생물학적으로 그들이 작곡을 할 수 없다는 식의 본질론적인 가정을 만들어졌다. 작곡을 했던 소수의 여성들은 연주 기회를 얻기 위해 남성의 가명을 쓰는 예가 많았는데, 실실제 이름으로 발표하면 연주 기회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공개적으로 작곡을 한 더 소수의 여성들은 승산이 없는 상황이었다. 가령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생을 산 프랑스의 작곡가 세실 샤미나드의 음악에 대해 (남성)비평가들은 그녀의 음악이 남성들의 '사내다움(virility)'이 없다고 불평했고 혹시 그런 사내다움이 있다면 여성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또 불평했다. 이런 식으로 여성은 역사책이 무시한 영역(연주, 특히 아마추어 연주)에서 활동했고, 역사책이 인정한 영역(주로 작곡)에서 활동하려는 시도는 대개 좌절당했다.(p130~131).
현재까지도 자주 쓰이는 '여권신장'이란 말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누군가 인정을 해주지 않으면 권리가 없다는 소리처럼 들리는 단어. 여하간 니콜라스 쿡이 말한 그 시대나 최근 시대나 그리 나아진 것 같지 않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97년까지도 오케스트라에 여성을 제외했는데, 하프 주자만이 예외였다. 남성 하프 주자가 사실상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여성이 있을 곳은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주방이다”(p132)라는 발언은 권위주의를 넘어 성차별 이데올로기까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문장도 수정이 필요해 보이는데, 고급 주방도 남자 요리사들의 무대인 걸 감안하면, 카라얀은 “여성은 본인의 집 주방”이라고 했어야 더 정확했을 것 같다.
본문 중 아래 글은, 이데올로기적인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텍스트에 슈만이 곡을 붙인 연가곡집 《여인의 사랑과 생애》가 이런 경연장에서 어떤 효과를 가졌을지 한번 상상해 보자. 가사의 구성은 허구의 자서전 형식인데, 이상적인 남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여 그의 아이를 갖고 이어 남편이 죽자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잇지 못한 한 여인의 이야기다. 루스 솔리는 선견지명이 있는 논문에서 이 작품을 남성의 판타지, “남성 문화의 목소리로 여성을 인격화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녀는 이 곡이 19세기에 연주된 전형적인 상황을 묘사했다.
실제로는 남성의 감정을 전달하지만, 곡은 누군가의 집의 좁고 친밀한 방에서 한 여성에 의해 지인들이나 구혼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된다. 그녀는 직업적인 가수가 아니라 누군가의 딸이나 조카일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이 남성의 응시 아래 유순하고 정적인 것으로 놓이는 익숙한 문화적 수사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그녀가 마치 스스로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듯 자신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이런 판타지의 효과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이것은 수행적 의미의 극단을 보여준다. 가수는 가부장적 여성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상연하고 그렇게 되어간다. (실제로 그녀의 미래의 남편이 청중 속에 있다면, 연주는 약속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인의 사랑과 생애》를 부르는 것은 <아프리카에 축복을>을 부르는 것만큼이나 정치적 행위가 된다.
진정으로 ‘비판적인’ 음악학의 역할은 정치적 내용을 폭로하는 것, 슈만의 연가곡집의 연주처럼 순진하고 악의 없이 보이는 것이 실은 이데올로기를 감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비관하여 음악에서 철수하는 것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 반대로 음악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 그것은 음악의 세속성을 인정하는 개입이며, 그와 관련하여 해석자를 어떻게 위치시켜야 할지 알고 있는 개입이다. (p 150~150)
우리는 슈만 연가곡집 《여인의 사랑과 생애》과 관련하여 푸치니 오페라 《나비 부인》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러한 비판 해석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니콜라스 쿡의 지적처럼, 우리의 예술 이해 방식이 “미적 식민주의”가 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합리적 가치 판단에 임할 필요가 있다. 1990년 로렌스 크레이머의 새로운 음악학에 대한 주장도 새겨 들어볼 만하다.
■ 새로운 음악학의 주된 핵심은 음악이 세상으로부터 자율적이라는 주장, 특히 음악이 진리와 미의 절대적인 가치에 직접, 매개 없이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근거가 있다. 하나는 절대적인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모든 가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또 하나는 매개 없는 접근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개념과 믿음, 앞서 경험이 모두 우리의 지각에 관련된다.) 직접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며, 이때 음악은 이에 봉사하는 것으로 올려둔 것이다. 비판 이론처럼 이데올로기의 폭로를 최우선의 목료로 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음악학은 이제 음악이 사회적·정치적 의미로 가득하다는 것, 크레이머가 선호하는 용어를 사용하자면 돌이킬 수 없이 ‘세속적(worldly)’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p 139~140)
이 외에도 이 책에는 베토벤에 대한 여러 이야기(9번 교향곡에서 식자공이 잘못 인쇄한 악보를 보고 해석자들이 베토벤의 뛰어난 악상이라고 호평한 에피소드, 베토벤의 남성적인 음악적 특성은 ‘일종의 억압된 동성애 공포’로 보는 해석), 슈베르트의 동성애 설 등 비평가들 사이의 논쟁들, 클래식 음악을 상위에 두고 대중음악을 민속음악이라는 하위 범주에 포함하는 사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언급된 로렌스 크레이머
, 수잔 매클러리, 리처드 미들턴, 조지프 커만, 자크 아틀리 등의 새로운 음악학에 대한 책이 국내 출간이 되어 있지 않아 아쉬운데, 역자가 소개한 크리스토퍼 스몰 《뮤지킹 음악하기》(효형출판, 2004)는 챙겨봐야 할 저서일 거 같다.
새로운 음악학에 대한 논의는, 뛰어난 연주자이기도 했던 아도르노부터 해서 1980년대부터 활발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시류가 아들을 낳고도 남았을 30년이 지난 이 땅에서, 나는 오지 않을 엽서를 기다리는 형국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논증하고 비판할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다는 데도! 언어 공부를 해라는 계시가 매일 내려오는구나.
우리가 믿고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때, 객관적인 합리성도 당연 갖춰야 하겠지만 그 믿음에 대한 비판마저도 건네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 도취와 강요일 뿐이다. 논쟁의 긍정성은 그런 신뢰 속에 가능하다. 그러한 때, 깨달음이나 진실 같은 것이 반짝하다가 해지듯 가는 걸 본다.
ㅡ Agalma
헝가리 출신으로 1956년 러시아의 침공 후 서양으로 건너온 아방가르드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는 1973~4년에《샌프란시스코 다성음악》이라는 관현악 작품을 썼다. 비슷한 시기의 많은 그의 음악들처럼 이것 또한 밀도가 높고, 곤충이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선율 라인을 가진 작품이다. 그런데 리게키는 색다른 은유를 사용하여 자신이 불가해한 음 대 음 패턴의 음악을 어떻게 잘 정돈된 한계 내에 수용하려 애썼는지 설명하고 있다. "서랍 속에 난잡한 상태로 있는 여러 물건들을 상상할 수 있다……. 서랍 역시 제한된 형식을 갖고 있다. 그 안에는 혼돈이 지배하지만 그 자체는 분명히 제한된다."(p88)
시간을 종이처럼 접을 수는 없다. 앞에 나온 악절을 뒤의 것과 비교할 때, 실은 음악을 시간의 경과로부터 벗겨내어 시간적 경험을 상상적 대상으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악보가 필요한 이유다. 여기에는 음악의 기본적인 역설이 있다. 우리는 음악을 시간 속에서 경험하지만 이를 다루고, 심지어 이해하기 위해 시간으로부터 끌어내 왜곡(falsify)해야 한다.…… 상상적 대상과 경험을 혼동하는 것은 근절하기 어려울 만큼 일반화되어 있다.(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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