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호. 나는 조연호의 두 번째 시집 『저녁의 기원』(랜덤하우스, 2007)이 황병승『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 2005), 김경주『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 2006)와 함께 놓여야 할 시집이라고 생각한다. 랜덤하우스에서 절판된 황병승과 김경주의 이 시집들이 문학과 지성 시인선 R로 재출간된 것에 반해 조연호의 『저녁의 기원』은 고려되지 않는 것 같아 매우 유감이다. 절판되었던 신영배 『기억이동장치』(문학판, 2006), 이민하 『환상수족』(문학판, 2005)도 재출간하면서 조연호 『저녁의 기원』은 왜 재출간되지 않는지? 단지 대중성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나는 또 한 번 문단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낸다. 장삿속으로 변질되긴 했지만, 이 시집의 가치를 아는 알라딘 중고샵의 어느 판매자는 십일만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책정하고 있다.

 

조연호 시가 사람들이 공감하기 쉬운 접근점을 제시하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다른 장르도 그런 경우가 왕왕 있지만 시는 특히나 "뭐 이렇게 어렵게 썼지.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 하며 쉽게 말하고 던져 버린다. 언어의 특수성으로 인해 철학이 모호하듯이, 시 언어는 하나의 창조로서 더 어려운 지점에 있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 편하게 쉬어가는 의자나 따뜻한 아랫목 정도로 시의 영역을 축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가 말했듯이 시인은 "언어에 대한 위반",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키며, 말을 원초적 상태로 복귀"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처럼 나 또한, 시는 독자를 이해시키려거나 동조를 바라며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세속의 온갖 잡다한 것을 시에게까지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그런 사회에 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하나의 시를 내보내기 위해 산통을 겪은 시인을 위해, 울면서 태어난 시를 위해, 독자도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내 짧은 글이, 조연호의 시와 마법사가 사라진 이 사회에 작은 친교 역할이 되길 바라며...

 

 

 ㅡAgalma

 

 

※ 16 페이지에 달하는 '근친의 집'은 시집이란 형태로 꼭 봐야 한다.

 

 

 

 

 

 단 한 계단

 

 

 

 거울은 나에게로 떠난다. 물에서 물로, 내가 숨기듯 조금씩 떼어 모았던 방. 그 방에서 나는 여러 개의 칫솔모를 닳게 하고 헬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제 지평선과 수평선으로 가득 찬 눈알을 아무에게도 안 보여줘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 헬마, 술래잡기는 그늘이 없어서 따분했고, 지금쯤이면 얼음땡이 더 즐거울까? 작은 것과 함께하는 산책이면 8월은 충분하다. 난 헬마의 하루가 긴 다리라고 생각한다. 전생보다 더 깨끗해지고, 더 많은 식물로 달이 우거지고, 껌 한 통을 다 씹을 때까지 헬마의 긴 다리는 아직도 달을 향해 길게 펼쳐지고 있었다.

 

 

 

 UFO를 찾으러 가자, 마당엔 콩이 우거졌고 우리의 목소리는 우리의 말투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7월이 맞다. 8월은 너무 짧았고 6월은 사위들이 들이닥치면 도망쳤으니까. 달의 분화구까지 단 한 번 여행한 적은 있지만 거긴 빈 뼛속의 음악만 행복한 곳이었다. 처음 장난감을 대하던 마음으로, 죽은 새를 대한다.

 

 

 

 헬마의 긴 다리는 아직 자신의 길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쁜 날씨는 아니지만, 물 밖으로 걸어나온 태양은 끌어안고 잠들기에는 너무 더러웠다. 고작해야 7, 8월에 수많은 영혼들을 담기 위해 묘지는 얼마나 깊이 땅밑을 걸어갈 수 있었겠니? 물소와 사슴은 모른 척 얼마나 많이 포식자 앞을 걸었겠니?

 

 

 

 내 눈은 사라져야 한다.

 

 

 

 휘파람 같은 헬마, 부서져 내리는 붉은 산에는 단지 아름다우니까 가는 것이다. 신세 지는 건 아니지만, 다음엔 좀 더 가까이에서 손발이 많은 바람을 즐기고 싶다. 안 그러니? 태어나 단 한 번만 허락되는 여행을 난 길고 긴 아홉 살로만 배웅할 거니까.

 

 

 

조연호 『저녁의 기원』 p56~57

 

 

 

 

 

 

 

 

  변신 이야기

 

 

 

 서로를 향하는 동안만 구름에겐 이별이 생긴다. 사랑한 후에는 작은 꺾쇠로. 차별받은 후에는 농담의 사전으로. 넌 제비를 뽑았다.

 향기 많은 꽃들이 네 머리만큼 자라 벌들을 통에서 꺼내기 시작하면 주방 아줌마는 물이 가득한 욕조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렸다. 첨벙거리며 후회 없이 바닥을 다 훑고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동물로 숲이 가득 채워지는 날. 여름은 당근의 붉은 뿌리처럼 하나씩 뽑히며 사라지고 있었다. 구석에 서서 작은 귀를 흔드는 것으로 나의 은신술은 완성된다. 여기까지는 내 몸이 기생식물이었을 때의 길. 이제부터의 길은 내가 숙주(宿主)일 때를 향해 열린 곳.

 아이들은 분말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렸다. 색종이접기를 가르쳐주었지만 그애들은 이제야 겨우 시든 튤립을 접기 시작한다. 8자놀이하는 아이들의 7시, 술래는 강을 건너지 못한다. 여자애는 흡혈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자기 피를 빠는 단꿈을 꾸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를 잊고 싶지 않아. 나 혼자서 바람에게 그렇게 말해본다. 그날은 왼손잡이용 글러브처럼 오른쪽으로 날아오는 것들과 마주하던 일요일. 우월의 표시로, 연대의 표시로 너는 모자를 벗고 세계관이 없는 제비를 하나 뽑았다. 겨울의 지하에서 여름의 지상으로. 수레처럼.

 

 

 

 

 

 

 

조연호 『저녁의 기원』 p58~59

 

 

 

 

 

 

 

  행복한 난청

 

 

 

 

 엄마가 누나에게 죽을 떠먹일 때, 11월이 왔을 때, 누나의 쌍둥이 딸년들보다 아름다운 책은 없었다. 푸른 단풍나무 붉은 가지가 시린 혈청의 구름을 부른다. 오늘 내가 버린 수첩의 가장 가까운 미래부터 인과가 하나 둘 사라졌다. 왜 별자리 이름엔 식물이 없을까, 중얼거리며 단풍의 붉은가지좌(座)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태양이 지기 전까진 부끄러움도 숨기 좋은 방이었다. 이곳에 도착하지 않은 많은 것 때문에 아이들의 주사위는 기뻤다. 붉은 물을 토하고 누나가 쌍둥이 딸년의 운명선에 머리를 베고 손금처럼 얇게 잠든다. 모두 먼 길을 걸어왔을 때, 11월이 왔을 때, 오지 않은 12월보다 완벽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연호 『저녁의 기원』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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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3 0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돌궐 2015-03-13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뭐랄까... 뭔 얘긴지는 모르겠는데 시어들의 조합이 관념과 이미지와 리듬이 뒤섞인 모습이랄까요.
시에서 꼭 의미나 줄거리를 찾을 필요는 없는 거 같아요.

AgalmA 2015-03-14 05:52   좋아요 0 | URL
돌궐님은 무심히 알고 계시는 게 많아 멋지십니다~

에르고숨 2015-03-13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옮겨주신 부분만 봐도 매우 집중하여 읽게 되네요. 글에 긴장하고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랑한 후에는 작은 꺾쇠로. 차별받은 후에는 농담의 사전으로.`에 눈이 한참 머물렀습니다. 문학과지성사 시인선R이 `호명`되어 뜨끔하겠네요, 저도 함께 재출간을 기다려봅니다. `근친의 집`도 무척 궁금하고요. (오랜만에 댓글 달려고 하니 알라딘 서버가 투 비지... 제대로 올라갈지;)

AgalmA 2015-03-14 05:54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볼 땐 그리 인상깊게 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에르고숨님 말씀하신 부분을 오래 반복해 보게 되더군요. 알라딘 서재와서 제가 참 별거별거 다 한다 싶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