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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이란 무엇인가 ㅣ 컨템포러리 총서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11월
평점 :
§
책에 대한 종합적 정리는 연휴 끝나고 올려야 될 것 같다.
우리 언어 속 잠식들에 대해 얼마나 치열한 책인가.
언어를 통해 우리는 얼마나 구별짓기에 탐닉해 있는지,
'페미니즘'과 '호모 새끼'는 언어를 통할 때 얼마나 가까운지.
어제 김태훈 씨 페미니즘 논란 글에 나는 생각을 좀 더 차분히 정리하고 말하자, 말하자 하면서도 그만 말을 뱉고 말았으니...
내가 "쓰레기"란 단어를 내뱉을 줄이야. 그렇다. 나는 그랬다. 돌이킬 수 없다.
이 책의 피에르 부르디외 「'인민적'이라고 말했나요?」는 어제 섣부른 내 감정적 발화를 뼈아프게 반성하게 했다. 얼마나 냉철하게 이 문제의 핵심을 말하고 있는지!
김태훈 씨가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한다.
IS로 간 소년은 돌아올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자신을 이해할 기회가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쓰는 것조차 나는 서투르고 섣부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논란을 나중에 다시 불거지게 하기 보다 지금 시점에서 이 책을 모두에게 소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ㅡAgalma
p45 ~ 47
모든 언어의 척도인 '표준' 언어를 '인민적' 언어와 대립시키려 하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의 효과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언어적 생산의 모델로 되돌아가서 그 안에서 언어적 아비투스들의, 그리고 시장들의 여러 계급 사이에 가능한 다양한 조합으로부터 나오는 말투들의 극단적 다양성의 원리를 재발견해야 한다. … (중략) …
적법한 말하는 양식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포하는 복종과 온순함에 대한 가장 눈에 띄는 거부가 나타나는 곳은 바로 물론 남자, 그리고 그중에서도 이민가정 출신 청소년과 같이 가장 젊고, 현재 특히 잠재적으로 경제적 · 사회적 질서에 가장 덜 통합된 사람들이다. 폭력과 오토바이, 술이나 마약같이 거의 자살 놀이 ㅡ 이 안에서 미래로부터 기대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의 미래와의 관계가 확인된다 ㅡ 를 숭배하는 것에서 완수되는 힘의 도덕은 아마도 하기 싫지만 할 수 밖에 없는 일을 자진해서 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일 것이다. 현실주의와 견유주의를 드러내는 편견, 여성적이거나 여자 같은 감상에 동일시되는 감정과 감성에 대한 거부, 천민 귀족주의라는 절망적인 과감성으로 이어지는, 자신이나 타자에 대해 냉혹하게 구는 일종의 의무, 이것들은 도덕성과 감성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빈곤과 정글의 법칙, 차별과 폭력에 의해 지배되는 출구 없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한 방식이다(* 이민가정 출신인 '거친' 청소년들은 그들이 학교에 의해 그리고 또한 일상적 인종주의에 의해 상징되는 '프랑스' 사회에 대한 완전한 거부까지 밀고 나가는 것 안에서 아마도 한계를 표상한다.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장 헐벗은 가정 출신 청소년들의 봉기의 원리는 종종 학교교육에서의 어려움, 실망 또는 실패에서 발견된다). 위반을 의무로 구성하는 도덕은 특히 집단의 끊임없는 지원을 받는 청소년들에게 언어적이든 다른 것이든 공식적 규범들에 대한 과시된 저항 ㅡ 엄청난 긴장을 대가로만 항상적으로 지탱될 수 있는 ㅡ 을 강제한다. 기회에 희망을 맞추는 일을 전제하고 생산하는 인민적 현실주의처럼, 이 도덕은 방어와 생존의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즉, 다른 사람들이 합법성의 테두리 안에서 얻는 만족을 얻기 위해서 법을 위반해야 하는 사람들은 봉기의 대가를 너무나 잘 안다. 폴 윌리스Paul E. Willis가 잘 봤듯이, 허세(예를 들어 공권력과 특히 경찰에 대한)의 자세들과 태도들은 단지 성별뿐만 아니라 위계 관계를 건드리는 모든 것에 아주 부합하게 공존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적 존중이 강제하는 과시적인 거칢은 연대에 대한, 게다가 애정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 이 노스탤지어는 무리 안의 고도로 검열되는 상호작용echange들에 의해 충족되는 동시에 억압되기 때문에 포기의 순간에 표현되거나 드러난다. 은어는, 그리고 여기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계층'의 테두리를 넘어 은어가 유포되는 이유 중 하나인 상징적 강제의 효과를 가진 은어는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자본을 가장 덜 가진 남자들이 거칢이라는 기호 아래 전적으로 위치한 그들의 사나이다운 정체성과 사회 체계에 대해 가진 시각 ㅡ 본질적으로 여성적(또는 여자 같은) '연약함'과 '복종'에 맞서 조성된 ㅡ 의 모범적이고 말하자면 이상적인 표현 중 하나 ㅡ 엄밀히 정치적인 표현은 이것을 고려하고 나아가 이것과 함께 조합돼야 할 것이다 ㅡ를 구성한다.
"어린아이는 인민의 대변자이다. 아니, 그게 아니다. 어린아이는 변형되기 이전, 자신의 타고난 진실 안에서 저속함 없는 인민, 인민 그 자체이다." 미슐레의 이 말은 비웃음을 살 수 있지만, 우리가 인민적인 것(언어) 또는 포퓰리즘적인 것(담론)에 대해 말할 때, 거기에는 일종의 의심과 혐오가 있지 않은가? (서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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