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나온 《Axt 2019.9.10》서평 키워드가 ‘이혼‘이었는데 어김없이 나왔던 톨스토이『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말말말. ˝아무리 멍청한 녀석도 블라블라...˝ ㅋㅋㅋ 나보코프의 일침은 늘 짜릿해!

˝관능적인 불꽃이 없다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
나보코프의 『롤리타』, 『창백한 불꽃』 소설을 읽은 사람에게는 더 와닿을 말.





문학을 학파와 운동 중심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경멸하고, 문학을 사회 메시지의 전달 수단으로 취급하는 비평가들을 경멸했던 나보코프는 걸작이 어떻게 걸작이 되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교단에 서는 동안나는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세세한 부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세세한 부분들의 조합이 빚어내는 관능적인 불꽃이 없다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 담긴 전체적인 아이디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멍청한 녀석도 불륜에 대한 톨스토이의 태도에서 중요한 맥을 찾아내 흡수할 수는 있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예술을 즐기고 싶다면, 예를 들어 100년 전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사이를 달리던 야간열차의 객차 안 풍경을 눈으로 그려보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 이때 도표가 몹시 유용하다. 교단에 선 사람은 공연히 웅장하고 다채로운 척 우쭐거리는 각 장의 제목에만 계속 신경쓰지 말고, 더블린의 지도를 준비해서 블룸과 스티븐의 발길이 어떻게 얽히는지를 분명히 그려놓아야 한다. 『맨스필드 파크』에 나오는 낙엽송 미로를 시각적으로 그려보지 못한다면, 이 소설은 입체적인 매력을 일부 잃어버린다. 또한 지킬 박사의 집 외양이 독자의 마음속에 분명히 재현되지 않는다면 스티븐슨의 이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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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죽음의 에티켓 - 나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모든 것
롤란트 슐츠 지음, 노선정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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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올해 가장 많이 읽은 책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죽음이 너무 생생했을 때는 이런 책들을 펼쳐보기가 힘들었다. 차츰차츰 읽어나가며, 갑자기 몰아치는 슬픔에 대한 이해, 또 다른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에 대해 좀 더 마음의 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누구나 다 죽는 것이라고 죽음을 일반화로 재단할수록 슬픔의 암흑은 더욱 커진다. 섣부른 위로는 상대를 더욱 힘들게 할 뿐.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이다. 스스로 극복할 시간이 필요하다.

고인의 주검을 직접 접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장례를 빨리 해치우는 일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 좋지 못하다. 더우기 살해된 가족의 시신을 찾지 못한 유가족이나 세월호 유가족들은 더 아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장례 절차에 따라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데 독일 문화권 얘기라 한국에도 이런 과정을 구체적으로 담은 책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이를테면 독일은 관공서에서 출생증명서를 110년, 혼인 증명서는 80년, 사망증명서는 30년 동안 보관하는데 한국은? 이런 걸 인터넷 서핑으로 일일이 찾아봐야 하는 건지.

6.
무슬림들은 죽은 자들의 귀에 종교 고백을 낭송해 주며, 영혼이 이 낭송한 것의 의미대로 육체를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영혼이 얼마간 계속해서 자신들을 싸고 있던 껍데기에 머문다고 생각해서 어느 시간만큼은 시신을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둡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감지합니다. 어쩌면 그 모든 건 사람들의 상상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양측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게 있습니다.
누구든, 한 사람의 죽음 옆에 있는 혜택의 누릴 수 있다면
온 마음을 다해서 그 신비함을 맛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명확한 파악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합니다.
그 점에서는 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고 마니까요.
인간 역사가 시작된 순간부터 쭉 그래 왔습니다. 그들은 죽음 그 자체를 물리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지 못했으니까요.
죽음이란 무엇일까? 삶의 종결. 이 정의로는 뭔가 부족합니다.
삶은 무엇인가? 생명체를 생명체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일까?
그리고 언제 그런 생명의 특징들이 종결되는 것인가?
사람들은 그것에 의지해서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 질문을 세대를 거치며 계속 생각해 왔기에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대답들이 있기는 합니다. 죽어가는 과정처럼 죽고 난 다음의 상태 역시 하나의 과정입니다. 종교와 국가, 법이 이 과정을 다르게 할 뿐입니다. 각 분야마다 죽음의 과정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죽은 이를 두고 작업하는 의사들, 즉 법의학 의사들은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습니다. 곡선이 삶으로부터 아래로 우아하게 내려오다가 중간에서 뒤집히듯 방향을 바꾸어, 죽음으로 향하는 곡선이 됩니다.

7.
시신 앞에 있다는 건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자연스런 일이죠. 죽음을 TV에서만 봤지, 실제 주검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요.
사랑하는 애인,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 사랑하는 자식, 오랜 친구, 그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고, 그 제스처와 시선과 향기가 기억에 아직 남아 있는데 참 기가 막히는 노릇입니다. 당황스럽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적어도 즉시, 빨리는 아닙니다.
이럴 때 도움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는 사체를 정말로 직접 만져 보는 것으로써 죽음을 인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보고 만지고 느끼는 거지요.

8.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 한 명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식을 잃었고,
아내를 잃었고,
남편을 잃었고,
아버지나 어머니, 가장 친한 친구, 어쩌면 식당의 요리사를,
가족의 기둥을, 유일한 경제적 주체를 사람을 잃었습니다.
또한 호칭을 잃었습니다. 자식이 없어진 부모가 여전히 부모인가요? 아내 없는 남편이 계속 남편으로 불릴 수 있나요?
아니면 그는 이제부터 즉시 자신을 홀아비로 이해해야 하나요?
그들은 당신이 일터에서 받던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고, 당신의 연금의 혜택, 어쩌면 아파트나 집, 친척들과의 연락, 당신의 사회적 네트워크, 당신의 인간관계와 당신의 지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가려진 상실들을 동반 손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당신을 단지 현재에서 잃을 뿐만 아니라 당신과의 미래를 함께 잃습니다. 학자들은 이 상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생의 역사가 책 한 권이라면 어느 한 페이지에서, 갑자기 어느 한 줄에서 모든 미래를 위한 장들은 찢겨 나가 중단되는 것’이라고요.
당신이 언젠가 갖게 되었을지 모르는 자식들, 어느 날 당신이 그들에게 선사해 주었을지도 모르는 손자들, 꿈, 여행, 곧 이뤄졌을지도 모르는 소망, 모든 것이 파괴됐습니다.
모든 게 사라졌습니다.

9.
누구든 그들을 도와주려거든 물어보기 전에 씻지도, 버리지도, 정리하지도 말라고요.
이 빈 와인 병, 이건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마셨던 그 와인이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구겨진 이부자리, 거기에는 그의 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지저분한 빨랫감, 거기에서 당신의 냄새가 나죠.
슬픔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남겨진 이들을 외롭게 만듭니다. 어쩌면 그들은 모든 이와 연락을 끊고 지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계속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신을 고립시킬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침묵만 하는 것이 고립시킬지도 모르고. 그것을 참아 낼 수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일상의 사람들, 수천 가지의 의미 없는 사소한 일들을, 세상을 텅 빈 눈으로 바라봅니다. 고통스러운 깨달음 속에서 죽음과 상실이 인생에 속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냐는 의미의 질문에 그들은 명확한 대답을 배웠죠.
이 명료한 깨달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행동들이 의미 없이 느껴지게 됩니다.
모든 게 중요할 것 없어 보이니까요. 모든 게 하찮아 보입니다.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과 나머지를 극단적으로 구분합니다. 이런 타협 없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충격을 주죠. 그러고 나면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그래서 위로하던 사람들은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완전히 자기 자신 안으로 숨어 들어갑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면 그들은 당신에게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이중적으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은 지독한 외로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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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죽음의 에티켓 - 나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모든 것
롤란트 슐츠 지음, 노선정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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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평생 자신이 반드시 죽는다는 걸 부인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이죠.

2.
케이크와 꽃, 진심이 담긴 편지. 그들은 마치 자기 자신인 양 당신을 살뜰하게 보살핍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의에서 그러는 거라 해도 고집스럽게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게 좋습니다. 여기 이 문제가 오로지 너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문제, 죽음은 오로지 나 그리고 당신의 문제라는 사실을요.

3.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듣는 말 중 대부분은 세 가지 패턴 중 하나입니다.
첫째, 과소평가하기입니다. 그 지혜들 속에는 단 하나의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기’입니다.
두 번째는 스승 스타일로 교훈 주기입니다. 이들은 당신의 병을 귀중한 경험으로, 일종의 생존 훈련으로, 육체 외의 정신과 영혼을 위한 훈육으로 보는 겁니다. 모든 것에는 깊은 뜻이 있나니, 이제 좀 그것을 깨달으라는 식이죠.
세 번째는 해법 제시입니다.
당신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예견하고, 당신의 병을 고칠 요법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마인드컨트롤이나 기도문 같은 게 당신을 낫게 해 줄 거라면서 만약 그걸 시도하지 않으면 애석한 일이 될테고 치유는 오직 당신 손에 달렸다며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으니 결코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 중에는 이런 순간에 건강한 사람들이 자신 위에 올라 앉아 재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대화의 방향이 죽음과 얼마나 관련이 없는 곳까지 와 버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인 현상이 아닌가요? 죽음은 도처에 있잖아요. 매일 아침 신문에, 매일 저녁 TV 뉴스에, 하루 종일 인터넷에 있는데도 일상에서는 죽음을 거의 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사실 현대 문화는 명명백백한 죽음을 의식으로부터 밀어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오십 혹은 육십이 되어서 그들의 부모가 죽을 때에야 난생처음 시신을 보기도 하니까요.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변칙적인 현상입니다. 죽어가는 것과 죽음은 수천 년 넘게 감지 가능한 삶의 한 부분이었고 그것도 모든 연령대에서 일어나 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죽음은 무엇인가 추상적인 것이 돼 버렸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죽음을 마치 미지의 우주처럼 대합니다. 죽음은 의심할 나위 없지만 내가 걸을 일은 절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당신이 곧 죽을 거라는 사실에 그토록 부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4.
죽음의 첫 증상이 나타난 사람들은 이 쇠락을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면 도무지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이가 보인다고. 몸이 변화하고, 그 안에 살던 인간도 몸과 함께 변한다’고요.
슬픔이 생활에 침투합니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바다에 갔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산에 갔던 거예요.
일터에서 차를 운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잔 것도 마지막이었습니다.
마지막 눈.
식당에서 받은 마지막 영수증.
당신 머리 위로 뜬 마지막 달.
당신의 재능을 마지막으로 발휘한 것이에요.

5.
죽음이 가장 뚜렷하게 그려진 곳은 얼굴입니다.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지녔던 모습과의 유사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일생에서 한 번도 시신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금방 알아챌 것입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같은 날 같은 시에 죽은 당신의 ‘죽음쌍둥이들’이 세상 어딘가에서 함께 죽어갔습니다.
통계가 말해 주죠, 지구상에서 매초마다 두 명의 인간이 죽는다고 말입니다.
똑. 당신과 당신의 죽음쌍둥이.
딱. 예멘의 어느 갓난아기. 캐나다의 할아버지.
똑. 해변의 여자. 도시의 반대편에 사는 남자.
딱. 외로운 남자, 호주에 사는 아이의 엄마.
똑. 수도사와 여배우.
딱. 99세 고령할머니와 단 하루도 살지 못한 갓난아기.
똑. 갠지스 강가 농부의 아내와 안데스 산맥의 열쇠공.
딱. 여성 음악가와 지중해 어느 이름 없는 난민.
똑.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려던 두 사람.
딱. 시리아에서 두 명의 병사가 죽고,
똑. 사망 번호 21, 사망 번호 22,
딱. 사망 번호 23, 사망 번호 24,
벌써 이 사망자들의 목록을 읽는 시간 동안 삼사십 명이 더 죽었습니다. 1분마다 100여 명이 죽습니다. 시간당 거의 6,500명이 죽습니다. 하루에 15만 명이 죽습니다.
(중략)
죽음이란 건 완전히 일상적인 과정이고, 그래서 세상에 그보다 더 보편적인 현상도 없습니다. 탄생처럼 죽음의 순간에도 우연히 선택된 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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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관객모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6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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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트케의 다른 소설 <소망 없는 불행>과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오래전에 읽었는데, 그의 초기작 <관객 모독>부터 다시 읽기 시작.

실제 연극 무대에서는 각색에 따라 어쩔지 모르겠으나, 번역 순화 때문인지 한트케가 찰진 욕을 못해서 그런지 불쾌한 것 없이 무덤덤했다-_- (((( 모독 어딨어 )))) e book 듣기로 읽어서 종이책보다는 연극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이 책을 통해 서사보다 언어 중심, 구조주의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에 경도됐던 한트케의 창작 기조를 엿볼 수 있다. 향후 그의 소설에서도 이 점을 눈여겨 볼 것이다.

1.
우리는 말만 하기 때문에 그리고 허구적인 것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치 않거나 모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기 때문에, 이곳에 두 차원 혹은 여러 차원은 존재할 수 없고 연극 속 연극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몸짓도 하지 않고,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고, 아무런 연기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단지 말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이 지닌 다양한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 이미 언급한 죽음의 표정과 몸짓으로 지금 현재 통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교의 몸짓과 표정을 동시에 보여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중 의미를 지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중 의미를 지닌 채 연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세상에서 떼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문학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최면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허상을 보여 주며 믿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거짓 싸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 자연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연극을 보는 것은 최면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눈을 뜬 채 꿈꿀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꿈의 비논리로 무대의 논리를 대하도록 강요받지도 않습니다. 무한히 펼쳐질 수 있는 여러분의 꿈은 좁은 무대 위에서 제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조리한 여러분의 꿈은 무대의 현실적인 규칙에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도 현실도 상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에 대해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사회에 대해서도 개인에 대해서도, 자연에 대해서도 초자연에 대해서도, 쾌락에 대해서도 고통에 대해서도, 현실에 대해서도 연극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우리에게서 어떤 비가(悲歌)도 불러내지 못합니다.

2.
이 작품은 일종의 머리말입니다. 다른 작품에 대한 머리말이 아니라 여러분이 과거에 했던 것과, 지금 하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할 것에 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은 주제입니다. 이 작품은 주제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의 관습과 도덕에 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의 행위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의 무위(無爲)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이 누워 있는 것, 앉아 있는 것, 서 있는 것, 걸어가는 것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이것은 삶의 진지함과 유희적인 면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할 연극 관람에 대한 머리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모든 머리말들을 위한 머리말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세계극입니다.

3.
˝여기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서술 불능이 독일 문학을 지배하고 있다.(무언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적어도 서술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창조성과 성찰도 부족하며, 이러한 산문은 무미건조하고 어리석다. 그리고 무미건조하고 어리석기는 비평도 마찬가지며, 비평의 방법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낡은 서술 문학에서 성장한 것이어서 모든 다른 종류의 문학에 대해서는 그저 비난이나 하고 지루함이나 퍼뜨릴 뿐이다.˝(1966년 5월 6일, 《디 차이트》)
ㅡ 페터 한트케

4.
전쟁 중에 태어나긴 했지만 자라면서 독일과는 다른 적대국의 문학과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고 문학의 꿈을 키운 첫 세대로서 47그룹보다 이십 년 늦게 문단에 등장한 한트케는 “문학이란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지 그 언어로 서술된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47그룹 작가들의 문학적 가치와 서술 방법들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이들을 “서술 불능자”로 비난하면서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화해될 수 없는 논쟁이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자.”라는 47그룹의 주장은, “컴퓨터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라면 47그룹 작가보다 백과사전이 훨씬 뛰어나다.”라는 한트케의 냉소적인 공격을 발단으로 1967년에 사라진다.

5.
˝내 첫 희곡들의 작법은 (……) 연극 진행을 단어들로만 한정한 것이었다. 단어들의 서로 다른 의미는 사건 진행이나 개별 이야기를 방해했다. 연극이 어떤 구체적인 상(想)을 그리지도 않고,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로 착각하게끔 하지도 않으며, 오직 현실에서 쓰이는 단어와 문장으로만 구성된다는 점, 그것이 이 작법의 핵심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방법들에 대한 거부가 내 첫 희곡의 작법이었다.˝
ㅡ 페터 한트케

 
사건이나 개인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서술해서 어떤 상(想)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단어와 문장만으로 작품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내용은 없고 단어나 문장이 비트 음악처럼 반복되는 연극인 것이다. 이것을 한트케는 언어극이라 부른다. 한트케가 거부한 기존의 연극은 구체적으로 현실을 서술하며, 언어극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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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2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2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병철 이전에 에리히 프롬이 적확히 지적했다. 그 이전엔 또 누가?

1.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발성을 통제되지 않은 충동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지만 자발성과 자발적 활동은 자유와 자기 존재의 특징이다.

2.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프랑스인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한다. 프랑스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했던 전략과 전술로 전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 세대 혹은 지난 세기의 윤리 문제를 되돌아보고 과거의 악덕과 죄를 바라보며 우리가 이 악덕과 죄를 뛰어넘어서 기쁘다고 단언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윤리 문제도 대부분 해결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지금도 과거와 모습만 다를 뿐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은 윤리 문제에 봉착해 있다.

19세기의 악덕은 무엇이었을까? 첫째가 권위주의, 즉 맹목적 복종의 요구이다. 특히 아이들, 여성, 노동자들에게 권위의 명령에 고민하거나 질문을 제기하지 말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라고 요구하였다. 불복종은 그 자체가 죄였다.

두 번째 악덕은 착취, 정확히 말해 야만적인 착취다. 우리는 19세기 직전까지도 상류층의 신사 숙녀들이 노예무역으로 돈을 벌고 콩고의 흑인들을 거리낌 없이 착취하였으며,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어린아이들을 공장에서 부려먹었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란다. 이러한 19세기의 윤리 문제와 악덕은 거의 잊고 살았기에 되돌아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19세기의 세 번째 악덕은 성과 인종차별이다. 모두들 이런 불평등에 확실한 근거가 있고 신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에 신의 말씀과 인간 차별 사이에 존재하는 확연한 모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세기의 네 번째 악덕은 탐욕과 축재다. 중산층에게는 저축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아끼고 절약하여 돈을 모으고 절대 쓰지 않으면 부자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덕목으로 꼽히지 않지만 19세기에는 덕목이었다.

19세기의 마지막 악덕은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이다. 전형적인 사례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관련한 프로이트의 말이다.

“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가? 그게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어떻게 그 요구를 달성할 것인가? … 내 가족은 모두 내 사랑을 자기들을 좋아한다는 증거로 알고 소중히 여기는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내 가족과 동등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내 가족에게 부당한 처사이다.”

프로이트는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어도 절감하던 사실을 용감하게 발설하였다. “나의 집은 나의 성이다. 나는 나다. 낯선 이여! 조심해라!”

3.
일단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비합리적 권위는 항상 공포와 감정적 복종에 바탕을 둔 압력 행사를 동반한다. 전제 국가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는 맹목적 복종의 권위이다. 이에 반하는 합리적 권위도 있다. 합리적 권위는 능력과 지식에 근거하며 비판을 허용하고, 그 본질상 감소하는 경향이 있으며, 복종과 마조히즘 같은 감정적 요인보다는 직업 능력처럼 한 인간의 능력에 대한 현실적 인정에 바탕을 둔 모든 종류의 권위를 말한다.
능력 있는 의사를 찾아갈 경우에 나는 그의 합리적 권위를 인정한다. 그가 자기 분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그의 처방에 따라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는 전혀 다른 동기에서 시작되고 전혀 다른 기능과 결과를 낳는 비합리적 권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권위이다.
또 한 가지, 공개적으로 행사하는 권위와 익명의 권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둘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개적 권위란 예를 들어 아버지가 조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마라.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도 알잖니.” 익명의 권위는 엄마가 조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엄마는 네가 그걸 하고 싶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단다.” 조니는 엄마의 목소리 톤에서 엄마가 무엇을 원하고 원치 않는지를 알아차린다. 조니는 엄마의 슬픔, 절망, 공포 등을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 때문에 엄마가 암묵적으로 그에게 암시한 말을 따르지 않을 경우 흠씬 두들겨 맞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가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첫 번째의 권위는 공개적이고 솔직하다. 두 번째의 권위는 익명이다. 관용과 양보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게임의 규칙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대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잘 안다. 우리는 무조건 공개적 권위를 택해야 한다. 그래야 권위의 요구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저항했다. 공개적 권위는 대결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익명의 권위는 난공불락의 철벽이며 배후에서 작용하기에 누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게 만든다. 게임 규칙은 드러나 있지 않아서 감으로 느끼지만 확신할 근거는 없다. 19세기와 현대는 바로 이런 두 가지 종류의 권위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익명의 권위는 어떤 모습일까? 익명의 권위는 시장이요, 여론이며, 건강한 인간 이성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고 싶다는 소망, 무리에서 벗어나다가는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모두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착각한다.
우리는 착취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아주 많이 변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 마땅하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19세기에 존재하던 의미의 착취가 실제로 끝났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뿐 아니라,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야만적인 착취의 대상이던 식민지 주민들과 관련해서도 착취는 끝이 났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물질적 형태의 착취는 아직 완전히 사라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급격한 감소 추세로 미루어 볼 때 다음 세대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19세기에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4.
프랑스어 이름 — ennui, malaise, la maladie du siècle(세기의 질병) — 은 이미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프랑스인들은 그것에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가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신경증’이라 부른다.
(중략)
무엇을 질병으로 불러도 되는지를 주입당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분해서 죽겠다고, 삶이 무의미해서 죽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불면에 시달린다고, 아내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할 수 없어 괴롭다고, 술을 마시고 싶어 미치겠다고, 직장이 불만스럽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허용되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질병의 표현 형태로 가능한 온갖 것들을 들먹인다.
그럼에도 불면과 음주와 직장에 대한 불만 토로는 세기의 질병의 다양한 측면에 불과할 뿐이다. 세기의 질병, 즉 인생의 무의미함은 인간이 사물로 변한 데 그 원인이 있다.

5.
이제 불평등이라는 세 번째 악덕과 그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몇 세대만 지나면 미국의 인종차별은 완전히 철폐될 것이다. 성차별 역시 철폐될 것이다. 물론 새로운 차별이 등장하겠지만 10년 전에 남편이 아내에게 당연히 요구하던 것들을 지금은 어떤 남편도 아내에게 요구할 수 없다. 오늘날의 공장에 10년 전만 해도 당연했던 말투와 대우로 노동자들을 대하는 공장장은 없다. 이런 의미의 차별은 실제로 폐지되었고, 그런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달성한 동등권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평등은 이런 종류의 동등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평등의 개념은 계몽주의 철학에서 절대주의 국가에 저항하며 발전하였다. 이마누엘 칸트의 말대로 모든 인간은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한에서 서로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목적이지 결코 수단이 아니며, 그 어떤 인간도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계몽주의 철학과 인문주의에서 말하는 평등의 의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평등을 동일하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같다는 것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등한 권리를 원한다면 타인들과 동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강요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진다.
비획일주의자들에게 넓은 여지를 허용하는 것이 미국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비획일주의자들에게 일부러 높은 자리를 마련해주지는 않더라도 풍부한 활동의 여지는 주어진다. 이들이 감옥에 갈 위험도, 굶어죽을 위험도 없다. 그럼에도 타인과 같아지려는 경향은 사회적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인간은 자신을, 자신의 확신,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자기 고유의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인들과 구분되지 않을 때 자신과 일치한다고 느낀다. 타인들과 순응하지 못하면 끔찍한 고독이 닥칠 것이며 집단에서 추방될 위험에 처할 것이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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