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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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는『철학사전』(1764)에 '죽음'이란 항목을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한다(국내에 원문 번역으로 출간된 책이 없어서 직접 확인하긴 어려웠다). 백과전서(百科全書) 운동을 도모한 철학자가 그러했다는 것은, 대단히 신중하고 윤리적인 자세였다. 그러나 철학자가 아닌 평범한 삶과 사유 속의 개인이 그런 평형을 유지하긴 힘들다. 우리는 매일매일 많은 것들에 대해 강박적으로 말하고 있다. 여러가지로 치환하고 있지만 그 말들 속엔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오래된 물음이 정확히 담겨 있다.

(p58) 그에게는 죽음과 신에 관한 야바위나 천국이라는 낡은 공상이 통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이었다. 태어나서 우리에 앞서 살다 죽어간 몸들이 결정한 조건에 따라 살고 죽는 몸. 그가 그 자신을 위한 철학적 틈새를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틈새였다. 그는 일찌감치 직관적으로 그 철학과 마주쳤으며, 그것이 아무리 초보적이라 해도 그에게는 그게 전부였다. 만에 하나 자서전을 쓰는 일이 생긴다면, 그 제목은 『남성 육체의 삶과 죽음』이라고 부를 터였다. 그러나 그는 퇴직 후에 작가가 아니라 화가가 되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일련의 추상화에 그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저지 턴파이크(유료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있는 황폐한 공동묘지의 어머니 곁에 묻히는 날에는 그가 무엇을 믿느냐 또는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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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는 『에브리맨』에서 볼테르 같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생각한다. (p162)"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는 작가의 과도한 감정이입처럼 느껴졌지만ㅡ청년기를 넘겨버린 인간이라면 누가 감정이입을 안 할 수 있을까ㅡ무게추를 놓치지 않으려는 필립 로스도 느껴졌다.

(p86)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서서 일을 하러 간다.

(p89) 그녀의 그림이 반의 다른 누구의 그림과도 달랐던 것은 단지 스타일이 달라서가 아니라 사물을 느끼고 인식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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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몰입 속에 있는 자에게는 정신도, 이성도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 몰입에는 삶이라고 죽음이라고 말할 대상도, 장소도, 정서도 없다. 삶을 말할 때 우리는 비켜서서 조금 더 비겁해지고, 죽음을 말할 때 우리는 머리를 조아리며 조금 더 비굴해진다. 우리의 감정은 늘 현재로만 작동한다. 그리고 우리가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것, 과거들.

최근 정치들이 가져오는 과거들, 한국영화들이 가져오는 과거들, 소설들이 가져오는 과거들, 말들이 가져오는 과거들이, 겹겹이 죽음을 부르는 것을 보며 나는 자주 생각한다. 문제는 과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에 끌어들이고 대입하는 우리의 인식과 태도다. 적당한 과거란 없다. 과거를 순리대로 처리 못 해 우리는 삐뚤어진 세계를 만들고 있다. 그걸 누가 모르나. 모르는 것보다 너무 빨리 잊어서 과거가 더 빨리 순환되고 있다.

 

(p65~66)  흙을 다 옮기는 데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친척이나 친구들 가운데 나이가 들어 삽질을 할 수 없는 사람은 흙을 몇 줌 집어다 관에 뿌렸다. 그 자신도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결국 힘든 노동은 하위와 하위의 네 아들과 그의 두 아들에게 돌아갔다. 여섯 아들은 모두 이십대 후반과 삼십대 초반의 다부진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흙더미 옆에 서서 한 삽씩 흙을 구덩이로 옮겼다. 몇 분마다 다른 팀과 교대를 했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그는 이 일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중략) … 내 아버지의 얼굴을 흙 속에 묻지마! 그러나 그들은, 그 튼튼한 청년들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들은 멈출 수도 없었고, 멈추려 하지도 않았다. 설사 그가 묘혈 안에 몸을 던져 매장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해도 소용없었다. 이제는 어떤 것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냥 계속해나갈 터였다.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그도 묻어버릴 태세였다. 하위는 옆으로 물러나 이마에 땀범벅이 된 채 사촌형제 사이인 젊은 남자 여섯 명이 운동선수처럼 일을 마무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끝이 눈에 보이자 엄청난 속도로 삽질을 하고 있었다. 고래(古來)의 제의를 담당하는 조객이 아니라 용광로에 연료를 퍼 넣는 구식 일꾼들 같았다.  

 

 (p72)  해안에 간 처음 몇 달 동안은 딸과 딸의 자식들이 테러 공격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러나 일단 해안으로 가자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은 사라졌으며, 그 엄청난 참사가 모든 사람의 안정감을 뒤집어버리고 일상생활에 지울 수 없는 불확실성을 끌어들인 이후로 매일 그에게 붙어다니던 느낌, 무의미하게 위험을 무릅쓰며 살아간다는 느낌도 사라졌다. 그는 그저 살아 있기 위해 그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뿐이었다. 늘 그랬지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도 대부분 그렇겠지만, 그는 종말이 꼭 와야 하는 순간보다 일 분이라도 더 일찍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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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서 필요한 것이 정말 거창한 원리, 원칙, 자유 그런 것들일까.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아주 작은 것들, 어느 순간 절실히 필요한 마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심장 가까이 품고 다니던 보석감정 도구들과 루페,

그의 왼쪽 가슴 가까이 심어놓은 제세동기,

그의 딸 낸시가 조건 없이 베푸는 선함,

그가 그림 수업을 시작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원한 다른 사람과의 접촉,

이런 것들을 우리는 어처구니없이, 간단히 짓뭉개기도 한다.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자신 내의 문제다.

(p126)  "뭐든지 견딜 수 있어." 피비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설령 신뢰가 깨져도 말이야. 솔직하게 말만 한다면. 그때는 다른 방식으로 인생의 파트너가 되겠지만, 그래도 파트너로 남는 건 가능하단 말이야. 하지만 거짓말……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거야. 다른 사람이 수모를 겪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거짓말은 아주 흔하지만, 당하는 쪽이 되어보면, 그건 정말 경악스러운 거야. 당신 같은 거짓말쟁이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은 수모를 겪게 돼. 그러다 보면 마침내 당신도 그 사람들을 전보다 하찮게 여길 수밖에 없어, 안 그래? 당신처럼 능숙하고 집요하고 사악한 거짓말쟁이들은 언젠가는 틀림없이 자신에게 심각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짓말을 하는 상대한테 그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아마 스스로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조차 못할 거야. 거짓말이 섹스도 안 하는 가여운 짝의 감정을 고려해 주는 친절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겠지. 자기 거짓말이 미덕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얼간이를 향한 관용의 행동이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이건 그냥 이거야. 빌어먹을 거짓말이라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빌어먹을 거짓말이란 말이야. 아, 이런 짓을 계속할 필요가 뭐가 있어. 이런 일은 다 너무 잘 알려진 거잖아." 피비는 말했다. "남자는 결혼생활을 이어갈 뜨거운 마음이 식어버렸는데, 그런 뜨거움이 없으면 살 수가 없지. 아내는 실용적이지. 현실적이야. 그래, 뜨거움은 사라졌어. 아내도 나이가 들어 예전의 그 여자가 아니거든. 하지만 아내는 육체적 애정이 있는 걸로 충분해. 그냥 침대에 남편과 함께 있는 거. 아내는 남편을 안고, 남편은 아내를 안고. 육체적 애정, 부드러운 태도, 동지애, 친밀함…… 하지만 남편은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남자는 없으면 살 수가 없거든. 그래. 하지만 이봐요, 당신은 이제 진짜로 없이 살게 될 거예요. 많은 것 없이 살게 될 거야. 없이 산다는 게 도대체 뭔지 제대로 알게 될 거야! 아, 제발 나한테서 떠나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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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과 죽음이 왜 외로움이고 두려움인가. 그 감정은 시간의 당위보다 우리가 잊고 버렸던 것들의 결과다. 왜 뼈 속에 갇혀 떨기만 하는가.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보석처럼 바다처럼 태양처럼 모든 것이 함께 일 텐데. 죽음이 오든 안 오든 사실 아무렇지도 않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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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내게 보내는 편지로, 여기 남겨둔다.

Nat King Cole - Smile도 잊지마.  

 

 

ㅡAgalma

 

(p81~82)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부모가 자식에게 얼마나 비참하게 실망할 수 있는지 알고는 깜짝 놀랐다. 사실 다름 아닌 그 자신의 두 아들의 경우가 그랬는데, 그들은 계속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이 다른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는 전무후무한 일인 것처럼 굴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모로 보나 최고인 자식이 있다니. 때로는 낸시를 제외한 모든 게 실수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딸 걱정을 했다. 지금도 여자 옷 가게를 지날 때면 늘 딸이 떠올라 안에 들어가 딸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찾아보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생각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아. 또 이런 생각도 했다. 어딘가에서는 선한 것이 생길 수밖에 없어. 바로 그애에게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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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1-0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짧고 강렬한...
문제는 과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에 끌어들이고
대입하는 우리의 인식과 태도라는 글에 동의합니다...

AgalmA 2015-01-05 23:03   좋아요 0 | URL
공감 말씀 감사드립니다.
사실 제게도 과거가 정말 큰 문제인데요. 잘 아시겠지만 순간이 지나버리면 이 하나로 모일 것 같던 생각들이 모두 파편화되어 사라져버린다는 겁니다. 정말 끔찍하고 절망스럽게요. 그래서 이 글도 얼개만 대충 잡은 정도지 설득력까진 담보하고 있진 못하죠.
저는 여전히 우주 속을 유영하고 있는데요. 입자들이 서로의 중력으로 합병되어 하나의 행성으로 커져가는 광경을 보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건데! 하며 탄식하는 와중입니다.
이 책과 우주를 함께 보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인간이 자식을 낳는 건 종족 보존이라는 시니컬한 생물학적 논점보다 입자들이 모여 서로 합병되었다가 떨어져 나가면서도 서로를 돌며 우주를 구성해가듯 그런 것이겠구나...하는 것. 그 속에서 필연적인 진리를 찾겠다고 하는 우리의 인식과 행동들이 오히려 우연들을 더 만들어내는 작동기제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