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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평점 :
헤겔은 역사의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은 반복된다고 말했고, 마르크스는 역사가 한 번은 비극,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거대담론의 정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데,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이 아니어도 인생에서는 많은 것이 반복되고, 삶은 비극과 희극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순간의 지리멸렬한 반복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루키 단편집 『일인칭 단수』의 표제작이자 마지막 단편이었던 「일인칭 단수」를 읽은 뒤에도 그랬다. 하루키는 연례 행사처럼 평소 입지 않는 슈트를 입고 산책을 즐겼고 낯선 바에 가서 책을 읽었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다가 문득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에서도 말했듯이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면 거울에 비친 자신은 이곳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는 중에 모르는 여자가 다가와 삼 년 전에 여자의 친구에게 그가 몹쓸 짓을 했다고 비난을 쏟아냈다. 터무니없는 오해와 불쾌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기분 좋고 평화로웠던 저녁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부끄러운 줄 알아요”라는 여자의 마지막 말을 나도 들은 적 있다. 내가 누군지 확인도 없이 대뜸 긴 장문의 비난을 쏟아낸 이가 있었다. 사연에 대해 물으니 답은 돌아오지 않아서 혼자 억울하기만 했다. 이 외에도 시시때때로 불쾌한 일을 당하는데 살면서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왜 하필 이렇게 께름칙한 뒷맛의 단편을 마지막에 배치했을까 한참 생각했다. 이 단편집에는 달콤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많지만, 우리가 사는 삶은 달콤하지만 날카롭게 찌르는 맛의 보드카 김렛 같은 맛이 더 많다는 걸 시사하려던 걸까. 모종의 악의는 「크림」에서도 등장하는데, 열여덟 살의 하루키는 친하지 않던 소녀의 초대장을 받고 찾아갔다가 불쾌한 경험을 했다. 그때 우연히 만난 노인이 선문답 같은 인생 지침을 선물했다.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처럼 설명도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으면서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을 겪을 때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것이 쉽지 않아서 우리는 다른 것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어떤 것인지 대충 알겠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더 깊이 생각하다 보면 다시 알 수 없어졌다. 그러기를 되풀이한다. 아마 그것은 구체적인 도형으로서의 원이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원일 것이다. (중략) 이를테면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무언가에 깊은 연민을 느끼거나, 이 세상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거나, 신앙(혹은 신앙 비슷한 것)을 발견하거나 할 때,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게 그 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게 아닐까.” 하루키의 ‘크림’은 글쓰기 작업으로 되었고 우리는 공감하며 읽게 되었다. 세계의 일들과 하루키라는 작가와 독자로서의 우리가 만들어내는 서클은 정말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 같다.
하루키 단편집이 대체로 그렇지만 이 단편집도 편안했다. 책상에 각 잡고 앉아 읽는 게 아니라 소파에 파묻혀서 앨범을 넘겨보듯이 그렇게 읽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추억과 감각들, 그리고 나를 간간이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잊고 지낼 사람들도 떠올렸다. 자기만의 짝사랑 속에서 살며 자비출판으로 단카短歌 가집을 출간한 「돌베개에」의 그녀도 꼭 내가 아는 사람 같았다. 좋아하는 재즈 뮤지션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를 읽을 때 나는 찰리 파커의 음악을 틀었다. 비틀스 열풍이던 시절엔 비틀스 음악이 벽지壁紙처럼 둘러싸이게 놔두고 앨범으로 듣게 되는 건 한참 나중 일이었던 일화나 기억 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은 소녀, 첫 여자 친구와의 이별과 나중에 황망히 듣게 되는 죽음, 누군가의 기묘한 병 등등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에 나오는 이야기도 내게 오버랩 되는 게 많았다. 사람 삶의 패턴과 확률은 비슷해 이런 우연의 일치가 놀라울 것도 없지만 하루키의 단편은 이해가 바로 되어서 거리 두기가 어렵다. 비틀스 음악에 대해서라면 故 신해철의 표현을 가장 인상적으로 생각한다. 라디오를 틀면 언제나 만나게 되는 비틀스 음악을 구닥다리 선곡으로만 여길 게 아니라 누군가에겐 처음 듣는 명곡일 수 있다는 걸 생각하자고. 연예인 중 내가 유일하게 덕질 했던 신해철처럼 어느 때의 우리는 누군가의 팬이다. 하루키가 좋아하는 진구 구장에서 야구를 보다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듯이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하루키가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팬으로 남기는 글이다. 자비출판으로 정말 이런 시집을 냈던 걸까. 가상의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음반이 있었다는 단편을 읽고 난 뒤라서 이걸 믿어야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어쨌거나 약체 팀이었던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구단 창설 이십구 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을 달성하고 일본시리즈도 제패한 1978년은 하루키가 스물아홉 살에 처음으로 소설을 완성하고 소설가가 된 해이기도 했다. 이런 우연들이 겹치면 깊은 인연으로 발전한다. 야쿠르트 스왈로스는 여전히 건재하고 하루키의 소설 쓰기도 그의 인기도 건재하다. 「사육제」는 하루키 소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묘한 매력을 지닌 인물을 만나 그 가면과 민낯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 단편에서는 인물보다 음악 이야기에 더 교감했는데, “우리는 피아노곡을 좋아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물론 오페라도 듣고, 교향곡도 듣고, 실내악도 듣는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피아노 독주곡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특히 애호하는 작품이, 신기할 만큼 정확히 겹쳤다. 우리 둘 다 쇼팽의 음악에는 그다지 항구적인 열의를 품지 못했다. 적어도 아침에 눈뜨자마자 듣고 싶어지는 음악은 아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소나타는 아름답고 차밍하지만, 솔직히 말해 너무 많이 들어서 질렸다. 바흐의 평균율은 근사한 작품이지만 집중해서 듣기에는 너무 길다. 컨디션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는 가끔 너무 빤한 대목이 거슬린다. 해석도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브람스의 피아노곡은 가끔 들으면 멋지지만, 매일 듣다가는 피곤해진다. 가끔은 따분하기도 하다. 드뷔시와 라벨의 피아노곡은 감상하는 시간과 상황을 잘못 고르면 영 와닿지 않는다. 우리가 이의를 제기할 바 없이 훌륭한, 이른바 궁극의 피아노곡으로 선택한 것은 슈베르트의 피아노소나타 몇 곡과 슈만의 피아노 작품이었다. 그중에서도 한 곡만 남긴다면 뭐가 좋을까?” 대목에서 내 마음도 맞장구 물개 손뼉을 쳤다. 슈만의 '사육제'를 들으며 이 단편을 읽으니 더욱 좋았다. 못생긴 여자와 훌륭한 취향의 간극처럼 그녀의 드러난 삶과 드러내지 않았던 삶의 위태한 균형은 슈만의 ‘종잡을 수 없는 몽상적인’ 색채와 잘 어울렸다. 하루키 소설에서 인간 외 생물이 등장하지 않으면 섭섭하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일본 민간 설화의 현대판 구성이다. 온천마을에 들러 어렵게 숙박하게 된 온천 료칸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원숭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 원숭이는 연모하는 인간 여자들의 이름을 훔치고 다녔다고 고백한다. 흔히 잃어버린 것을 한참 못 찾다가 다시 발견하게 되는 건 정령들의 장난이라는 괴담도 있듯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까지 잊어버리는 건망증을 하루키는 이렇게 소설로 풀어놓았다.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에서도 사요코의 오빠가 단기기억 상실증이라는 설정이 있었는데, 이런 소재를 자주 쓰는 건 하루키가 나이가 들어가니 기억 퇴화에 관심이 많아져서 일까. 이 단편집이 60~70년 대 청춘에 대한 회고성 단편이 많은 것도 그렇고 하루키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정리하고픈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도 덩달아 정리를 하게 되고.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이 소설을 읽는 중에 맥주도 많이 마셨고 스파게티도 해먹었다.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 자동적으로 하게 되는 습관인지 우연인지 나도 이젠 모르겠다. 읽는 내내 달콤 씁쓸했고, 한참 지난 뒤 하루키 수제 크림이 토핑 된 도넛과 커피처럼 이 책을 또 읽으리란 건 안다. 이 반복은 언제나 독자로서의 기쁨이다. 하루키 소설을 접할 때 늘 드는 마음인데, 엄청난 작품이 아니어도 된다. 하루키 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