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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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책을 죽 읽다 보면 전작들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이제껏 나온 그의 모든 소설을 읽어온 바 이번 소설은 그의 소설 중 가장 역동적이다.
(※ 국내 출판된 우엘벡 책 중 완독하지 못한 건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의 대담집 『공공의 적들』 뿐이다.)

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성, 일의 성취와 자발적 포기, 권태, 무기력, 은둔 등을 다루는데, 이 책 초반은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중산층 서구 엘리트의 모습으로 『투쟁 영역의 확장』, 『소립자』, 『지도와 영토』, 『복종』과 더 가깝고, 중반은 68세대가 추구했던 자유주의와 섹슈얼리즘, 과거 연인들과의 관계 고찰의 모습으로 『소립자』, 『어느 섬의 가능성』, 『플랫폼』과 닮았다. 후반부터 전개가 독특해진다. 직전의 전작 『복종』이 정치적 목소리가 강하긴 했지만 적극적인 저항까지 담지 못했다면 이번 『세로토닌』은 프랑스에서 실제 일어난 ‘노란 조끼 운동‘을 예견했다는 평을 들을만큼 사회 비판이 격렬하다. 점점 더 개판으로 돌아가는 세상 꼴을 보자니 당연했던 걸까. 물론 실패의 엔트로피로 향하지만. 자본주의 시대 ‘노동의 종말‘을 향하고 있는 지금이 어떤 꼴인지 자비 없이 보여준다.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벨 에포크(좋은 시절) 시대라고 말하지만 그건 먹고살기 좋았던 중상위층에게나 해당했다. 빈부 격차나 각종 차별이 더없이 치솟았던 시기이기도 했는데(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참조), 지금 우리도 그런 역사 속이다.


섹슈얼리즘을 문제적으로 다루는 솜씨는 조르주 바타유와 비슷하지만 바타유보다 우엘벡이 더 저돌적이다. 섹슈얼리즘과 계몽주의와 냉소주의가 뒤섞인 D. A. F. 드 사드가 20~21세기에 살았다면 미셸 우엘벡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곧 자살할 듯 말 듯 한 허무주의적이고 신랄한 문체는 에밀 시오랑이나 토마스 베른하르트와 비슷하다. 인종 차별과 여성 혐오를 많이 드러내는 미셸 우엘벡의 글이 불쾌한 부분이 많음(이번 소설엔 아동 관련 범죄까지...)에도 그의 글에 매료되는 건 절망의 끝까지 가보는 그의 적나라함이 폭력성과 환멸만으로 가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모든 것에 가차 없는 비판을 하는 한편 우리는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이고 굴레로 가득한 인생을 산다는 걸 비감히 고찰한다. 끝까지 조마조마하며 읽었는데 ‘사랑‘을 강조하며 끝나는(에로스적 사랑- 낭만적 사랑에 국한된 게 한계이지만 : 동성애를 혐오했던 바타유와 역시 닮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우엘벡답지 않아 더 뭉클했다. 그에게나 지금의 우리에게나 가장 지독한 상실은 ‘사랑‘이다


˝우리가 생의 단 한순간도 어떤 신이 됐든 신의 개입이나 존재조차 느껴본 적이 없으면서도, 심지어 우리가 신의 호의적인 개입을 특별히 누릴 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삶에 누적된 허물과 과오들을 고려할 때 다른 이들보다도 더 자격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바라는 어떤 것˝이 있는 게 인간의 삶이다. ˝지상에서 소유한 모든 것이 달랑 여행가방 하나로 압축˝되고 ˝인간관계를 맺는 시기는 이제 만기˝가 되었으며 이제부터는 ˝폐를 끼친 일에 사과하는˝ 일만 가득할 거라고 판단한 46살의 플로랑클로드는 같은 나이에 죽은 네르발과 보들레르를 떠올리며 결코 쉬운 나이가 아니라고 자조한다. 그는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이미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아무런 추억도, 다가올 기적에 아무런 기대도 없는 감정의 동절기로 조금씩 진입하고 있었고, 이 무력감은 직무 영역에서도 무산되는 사업이 늘어감에 따라 배가되었다.˝ 똑같은 한 주 한 주가 반복되면서 ˝우리가 대단한 일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조용히 자리 잡았고˝, 직업인의 삶은 ‘아무런 쾌락도 선사하지 않는 창녀‘처럼 생각되었다. 윗세대부터 우리 세대까지 파괴된 것을 재건하는데 철저히 무능했으므로 인류 문명에 대한 희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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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래가 활짝 열려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유일한 시절. 이후로 펼쳐지는 성인의 삶, 직업인의 삶은 느리고 점진적인 정체와 다름없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젊은 날의 우정, 학창시절에 맺었던 유일하게 진실한 우정은 성인의 삶의 문턱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우리의 좌절된 꿈의 산증인들, 명명백백한 추락의 산증인들과 대면하지 않기 위해 젊은 날의 친구들과의 재회를 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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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간단하나 실질적으로는 이제 더는 그렇지 않으며, 바로 그렇게 인류 문명은 요란하지 않게, 위험도 비극도 없이, 아주 미미한 유린만으로 거꾸러진단. 문명은 무기력과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으로 거꾸러진다. 사회민주주의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무것도 없고, 혹여 있다면 오직 영원한 그리움과 망각에의 호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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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도 불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조수간만은 살아오는 동안 흔치 않은 경험이었고, 육지를 뒤덮으러 조용히 밀려 올라오는 저 거대한 액체를 느껴보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토크쇼 <우린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가 왁자하게 흘러나왔고 느리게 밀려오는 대양과 기묘한 대조를 이뤘다. 패널이 너무 많았고 다들 너무 크게 떠들었다. 이 오락 프로의 볼륨이 전체적으로 과도하게 높았다. 나는 텔레비전을 껐으나 이내 후회했다. 현실세계에서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었고 이야기 밖으로 밀려난 기분이었다. 내게 부족한 것은 어쩌면 핵심적인 것인지도 몰랐다. 게스트들의 캐스팅은 완벽했고 스튜디오엔 소위 중요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창밖을 보니 바닷물이 이제는 불안할 정도로 더한층 가까워진 듯 보였다. 다음엔 우리가 바다에 잠길 차례인가? 그 경우라면 약간의 기분전환이 되리라. 결국 나는 커튼을 닫고서 텔레비전을 다시 켠 뒤 볼륨을 죽였다. 이내 탁월한 선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딱 좋았다. 오락 프로그램의 왁자지껄함은 그대로인 채로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즐거움이 더해졌다. 약간 정신 나간 듯하면서도 재밌는 미디어 인형들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할까. 그것들이 분명 나를 잠들게 해줄 터였다.˝



현재의 일본인 연인 유주는 집단 성교에 빠져 있고 플로랑클로드의 의미는 그녀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파트너일 뿐이다. 그녀를 죽일까도 생각하다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세계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필사적 노력을 끊고 자발적 실종을 택한 플로랑클로드는 인생을 결산하려는 의지 속에 의미 있었던 과거의 인연들을 찾아가지만 어떤 해답도 찾지 못한다. 과거 연인 클레르는 알콜 중독에 빠져 있고 유산으로 받은 부동산이 남은 희망이다. 유일한 친구 에메릭을 찾아간 플로랑클로드는 그와 마찬가지 처지인 에메릭의 몰락을 목도한다. 그는 ˝정말이지 우리가 다른 이들의 삶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정도 연민도 정신분석도 이성적인 판단도 전혀 유용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낸 뒤 의미를 최대한 부풀˝려 질병 같은 그 메커니즘 속에서 죽음까지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와 같았던 카미유를 찾아가 몰래 훔쳐보기만 하다가 미혼모로 사는 것 같은 그녀에게 자신보다 아들이 더 중요할 거란 생각에 관계 회복을 포기한다. 세로토닌이 든 캅토릭스 부작용인 발기 부전은 남성으로서의 사형 선고였지만 그에겐 사형 선고의 추가 사항이었을 뿐이다. 사회적 관계는 모두 끝장났고 풍족할 줄 알았던 재산으로는 물가 상승으로 10년 밖에 버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자살을 계획한다. 그가 고골 『죽은 혼』이나 토마스 만 『마의 산』을 읽듯이ㅡ365일이 다 그렇겠지만ㅡ 특히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와 미셸 우엘벡 『세로토닌』을 읽는다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인생이 잘 안 풀렸다고 생각하는 40대 중후반이라면 엄청난 공감과 더 치명적일 것.

관계를 원하고 사람을 필요로 하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망치기 일쑤여서 도덕과 윤리, 법이라는 가이드라인을 끝없이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행복은 결코 거기서 오지 못한다. 경계를 허무는 사랑을 생각해보라.

실패한 인생을 반추하는 주인공보다 주인을 잃고 전날부터 먹이도 먹지 못한 채 울고 있는 젖소들이 더 마음 아팠다ㅜㅜ

전 세계 공통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외로운 자는 구강기로 퇴화해 요리에 열광하는 탐닉형 비만자, 약에 의존하는 건강염려증자, 흡연과 알콜중독 같은 중독자가 되기 십상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화려한 요리, 항우울제 캅토릭스 약도 아닌 플로랑클로드가 시종일관 마시는 칼바도스가 마시고 싶었다. 온갖 실망 속에 사람보다 사랑보다 그의 우울이 더 가깝게 느껴져서다. 정말이지 인간은 다양한 증상의 병리 병동이 되어가는 것 같다.



˝지난날 일어난 모든 일들은 영원히 일어난 것이고, 이제야 나는 그것을 알았으나, 그것은 닫힌 영원, 닿을수 없는 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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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20-07-28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앞부분을 며칠 전에 미리 보기로 읽었습니다. 앞부분만 읽었을 때는 이 작가의 자가복제(혐오와 환멸만 늘어가는 서구 엘리트 남성의 넋두리)가 갈수록 심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구매를 보류했는데 아갈마님의 리뷰를 읽으니 반드시 사야겠다는 판단이 서네요.
우엘벡은 확실히 호불호가 갈릴 만한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가에 대해서 험을 잡자면 한도 끝도 없겠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 나라에 이런 글쟁이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ㅡ기껏해야 왕년의 장정일 정도만이 생각나네요ㅡ도 아쉽게 느껴집니다. ‘누가 뭐라고 하건 간에 내가 하고픈 얘기를 다 하겠다‘보다는 ‘나는 윤리적, 정치적으로 아주아주 올바른 사람이다‘라는 강박을 몇몇 소설가의 글을 볼 때마다 느껴지고는 합니다.

AgalmA 2020-07-28 13:35   좋아요 1 | URL
책날개에 (골초라 더 그랬을) 폭삭 늙어버린 우엘벡 사진에 먼저 심란해지죠. 그 인상이 퍽 강해 주인공 46세 플로랑클로드에 바로 겹치더군요. 초반은 수다맨님처럼 ‘또 이 상태냐-_-...에효‘ 하며 읽기 시작했는데요. 스릴러적인 게 있어서 초반 넘어가면 늘어지게 느껴지지 않아요. 재미 면에서도 메시지 면에서도 좋은 소설입니다.
이쯤 되면 우엘벡은 ‘서구 백인 엘리트 남성 넋두리‘ 대표 주자로 그게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도 같고요;

장정일, 마광수가 그럴 수 있었던 건 그런 문화가 한국에 들어오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고 봐요. 두 사람 다 작품이 세련되지 못해서 더 그랬던 거 같지만 대중은 받아들일 준비조차 안 되어 있었죠. 지금 자본주의와 엮여서 팔릴 만 하니까 파는 거지 문단의 경직성과 배타성, 한국 대중 문화 경향은 크게 달라진 거 없다고 생각합니다. 풍부한 교양이 뒷받침되어야하고 좀 세련되어야 하는데, 한국 작가들에게 이게 참 부족해요. 등단과 작법에 몰두하고 등단하면 밥벌이로 글을 쓰니 뭐가 제대로 나오기 힘들죠. 나이 들면 지치고. 이제야 퀴어 문학도 관심을 좀 받나 했는데 거기도 악재가 겹치고...

한국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문화가 강해서 내면적으로 외부적으로도 자기검열이 심하죠. 요즘처럼 속사포 공격받기 쉬운 환경에서는 더 몸사리게 되고요. 상과 상금이라는 물질적 욕심도 더러 보이고요. 전업작가로 먹고살기도 힘든데 대중의 눈밖에 나면 작가 생명 끝나니 눈치 안 볼 수 없죠. 장정일도 다른 쪽으로 방향 틀어 겨우 기사회생 했고, 마광수는 철저히 몰락.
작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문화의 문제라고 봐야죠. 역량 있는 작가들의 싹을 한국 문화 전체가 자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일본 경우, 다니자키 준이치로 같은 작가들의 외설적인 소설이 저는 작품적으로 크게 뛰어나다고 보지 않거든요. 하지만 일본 문화는 그런 걸 다 품는 건 한국과 비교됩니다.

수다맨 2020-07-28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단의 경직성과 배타성, 한국 대중 문화 경향은 크게 달라진 거 없다‘는 말씀에 크게 공감합니다. 등단과 작법에 몰두하지만 교양의 풍부함과 작품의 세련미는 부족하다는 지적에도 역시나 동의하는 바가 큽니다. 결국에는 한국 문화 전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이 변화를 이끌 만한 근본적인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창작 주체는 물론이고 이들을 인정(문단)하고 소비(독자)하는 집단에게도 나름대로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난망하네요.

프랑스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지만 우엘벡과 같은 (여기저기에서 돌팔매 맞기 딱 좋은) 작가를 그럼에도 인정하고 소비하는 경향이 저쪽에는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복종˝을 우엘벡의 작품군에서 가장 밀도가 떨어지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책을 읽고 나니까 이런저런 걱정도 들더군요. ‘이런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가는 작가가 테러 당하는 거 아닌가‘ 헌데 우엘벡은 ‘정의‘나 ‘옳음‘ 같은 것들을 재인식시키는 소설보다는 ‘반동‘의 혐의가 붙는다고 하더라도 도발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작가 같습니다. 바로 이 점이 저로 하여금 지갑을 열게 만들고요.

AgalmA 2020-08-01 00:04   좋아요 2 | URL
‘정의와 옳음‘을 말하는 소설은 많고 많아서 아예 그게 소설의 주제이자 지향점으로 굳어진 경향이 있죠. 미디어가 발달하기 전까진 글이 큰 사회적인 (고발) 목소리가 되어 왔으니까요. 지금 언론이고 미디어고 기레기 수준이니 <도가니>, <82년생 김지영>처럼 문학은 여전히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작가들이 당면한 좁은 틀은 섬세하게 잘 다루지만 넓은 스펙트럼으로 작품을 구축하고 있는가 하면... 글쎄요. 그런 소재 자체가 희박하고 감상적인 애국주의로 마무리되는 거 같거든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프랑스 경우였다면 김봉곤 작가 일이 그의 모든 책 절판 처리되는 데까지 가지 않았을 겁니다. 미셸 우엘벡이 실존인물을 가져다 죽이고 살리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는 데도 다른 걸로는 소송까지 갔지만 명예훼손 소송까지 가지는 않았죠. 김봉곤 작가를 두둔하는 게 아니라 각 나라의 포용성에 대해 저는 말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 한국의 대중문화의 큰 줄기는 두 가지로 볼 수 있겠는데요.
1. 미투 운동, 페미니즘
요즘 보면 프랑스 공포정치 분위깁니다. 기존 남성질서의 반성 없음과 권력 선점을 뺏기지 않겠다는 저항이 커서 더 그렇죠. 아무도 지지 않으려는 싸움이죠.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취지와 활동에 동의하나 이 움직임에 이성보다 감정이 더 실린 거 같아 우려가 많이 됩니다. 그만큼 남성들과 반목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니 갈등은 더 커지겠죠.

2. 인터넷 문화, 반지성주의
온통 몰려다니기 바쁜 sns 파이터, 유튜브 & 검색엔진 순례자 모습으로는 교양지식인은 커녕 나은 발전을 기대하긴 어려울 거 같은데 디지털문화가 앉은 채로 교양인 만들어 줄 거처럼 생각하는 거 같아 한숨이 절로 납니다. 배우려는 노력이 너무나 부족하죠. 먹고살기 바빠 책 볼 시간이 없다 말하는 건 지금 세대에겐 면피거리가 못 됩니다. 책이 편한 휴식거리로만 소비되어선 안 되는데 소비자, 출판사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진화처럼 변화도 느리게라도 진행되는 거겠으나 ‘모두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저도 모르겠네요.

수다맨 2020-07-28 14:52   좋아요 1 | URL
아갈마님의 고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요즈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고 심란했는데 달아주신 댓글을 읽으니 마음이 조금 든든하기도 합니다.
이 블로그에 ThanksTo를 누르고 ˝세로토닌˝을 구매했습니다. 아갈마님 블로그에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AgalmA 2020-07-29 12:17   좋아요 1 | URL
제 부족함을 알아서 ‘고견‘이라 하실 만한 건 아닌 거 같고요^^; 덕분에 저도 이런저런 생각 정리 기회를 가지게 돼 고마웠습니다. thanks to도 감사하고요!
저 때문에 기대하셨다가 실망하시면 어쩌나 살짝 걱정도 되지만 우엘벡 작가 좋아하는 독자라면 큰 실망없이 읽을 책이라 생각합니다. 수다맨님 경우 <복종>보다는 좋아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추풍오장원 2020-07-31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분의 대화만 봐도 배울 점이 많군요..^^
김봉곤 전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것 같지만, 국가권력도 아닌 시장에 의해 책이 절판당하는 사회는 뭔가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AgalmA 2020-08-01 00:43   좋아요 1 | URL
사회가 기준을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과정이고 숙의를 모은다면 좋은 결과도 낳겠지요. 장단점이 있겠습니다만 요즘 돌아가는 모양새가 여론 형성으로 거칠고 빠르게 해결하는 것 같아 많이 답답합니다. 페미니즘이 피해자의 위치에서의 접근법이 되는 거 같아 그 또한 우려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