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시전집 - 1953-1992
이연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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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국에서 이런 시가 나오긴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다행일까. 적당한 관계, 적당한 관조, 적당한 환멸, 적당한 어휘 타협을 하는 시절로 우리는 진화해왔으니. 어쩌면 최선일까. 홍상수의 첫 영화와 지금 영화의 온도 차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연주와 달리 그가 남성이었다는 게 도움이 안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시집은 이연주 시인(1953~1992)의 첫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1991)과 1992년 10월 12일 타계 후 출간된 『속죄양, 유다』(1993)와 동인지 발표 시들 묶음이다. 책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그녀의 시들은 깊은 장막 속에 있다. 유복했다면 사랑으로 충만했다면 그녀의 삶과 시는 달랐을까. 자살하지 않았을까. 다를 수 있었을지라도 결과는 우리 앞에 이렇다.

 

 

「풀어진 길」

 

 

구급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해갔다.

사이렌 소리가 공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내 몸에서 어떤 핏톨들이 튀어올랐다.

나는 음습한 구석으로 가서

담벼락을 향해 오줌줄기를 뿌리며

무지개, 무지개…… 그렇게 중얼거린다.

구급차가 남긴 경적을 마신 공기들은

더욱 차갑고 쓸쓸하다.

모든 별들이 하늘 뒤에 숨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세상의 많은 것을 움직인다.

나는 다만 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기쁨조차 갖고 있지를 않으나ㅡ

벌써 오래 전부터 일이다, 한꺼번에 많은 것들이

한 실체에서 다른 실체로 변형을 이루며 살아간다.

나는 외투를 추켜올린다.

내 앞을 걸어가던 사내 하나가

어두운 골목길 저쪽으로 사라진다.

어깨에 쌓인 슬픔의 무거운 짐을

저 사내도 감추며 살아가는 걸까.

 

 

또 한 대의 구급차가 지나간다. 경적소리는 남는다.

무지개, 무지개…… 내가 중얼거린다.

의미 없는 낱말들이 차바퀴를 쫓아가 달라붙는다.

치유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나도 가고 싶다.

그러나 먼저, 유배지로 가는 내 방문의 열쇠를

누가 받아 간직해 주겠는가.

모든 별들은 하늘 뒤에서 빛난다.

나는 밤의 둥근 공기들을 육모, 팔모로 깎는다.

킥, 킥 웃음소리를 내며 모가 난 공기들이 나를 찌른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연주의 하늘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지, 하늘, 시컴하기는……”(「커피를 마시는 쓰디쓴 시간」) 하는 먹장 하늘이고, 생활공간은 “월셋집 문간 담벼락 아래/당신 구두 발길질 아래”(「잡초」) 쥐와 거미와 바퀴벌레들을 지켜보는 곳이다. “0.8평 감옥에서 농촌에서 학교에서 도시에서 시큼한 냄새를 피우고 죽어가는”(「죽음을 소재로 한 두 가지의 개성 2」) 배고픔과 죽음이 등치인 위험한 시절이다. 살아간다 한들 의미 없는 비와 불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바람 속에 살면서 “오늘 오후엔 뭘 하지?” (「우리는 끊임없이 주절거림을 완성한다」) 주절거리며 일상도 빈곤하다. 이 시집의 여러 진료실에서는 “아가야, 태 안에서 죽으렴”(「성 마리아의 분만기」)이라고 말하며 사산한 아이만 낳길 원한다. 불모의 시간만을 겪는 이연주는 “오늘도, 자살골의 시를 남기면서”(「연애에 있어서」) 백지 위로 투신하는 것 외에는 선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관이란 다만 허식에 불과할 뿐”(「구덩이 속 아이들의 희미한 느낌」) 세상은 이미 파놓은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삶이나 사랑이나 우리가 살아 있을 때나 유효하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시간 아래 삶과 죽음은 대척점에 있지 않다. 그렇게 보는 것은 우리의 초점일 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죽이고 죽는 일은 쉼 없이 일어난다.

 

 

「긴다리거미의 주검」

 

 

간단한 일이었다

허공을 향해 헛발길질 몇 번

볼품없이 긴, 그것을 다리라고 할 수 있었을까, 발이라고……

쭉, 뻗어 누웠다

그랬다

스프레이 에프킬라 한 방으로

죽였다

 

 

숨이 다 끊어지는 동안 아주 짧은 몇초

흉한 것을 곁눈질로 보듯

시큼한 토사물 곁을 못 본 척 비켜가듯

죽음을 맞는 그놈에 대한

내가 차린 예우였다

 

 

에미의 생식낭에서 부화하고 나와

허망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단순한 종교적 삶

절망은 유물을 남기지 않는다, 하찮은 거미 한 마리의 주검엔

그래서인지

그놈에게선 부패의 냄새가 없다

 

 

나는 두루마리화장지를 조금 풀었다

머리카락 한 올을 집어내듯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그게 끝이다

삶과 죽음 사이가 실은

이토록 쉽고 간단한 것을……

 

 

 

첫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이 치욕적인 삶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속죄양, 유다』는 처연한 실의(失意)가 가득하다.

 

 

 

「겨울나무가 내 속에서」

- 위험한 시절의 진료실·2

 

 

겨울날이었을 게야.

털 빠진 살가죽 외투를 추켜올리며

좁은 골목길 걸어 너를 만나러 가던 해질녘,

나는 보았지.

햇살 방울을 공중에 흩뿌리는 겨울나무에서

그 종소리ㅡ

페허의 사원을 기웃거리는 것을.

 

 

나는 생각했네.

먹잇감과 살 터를 찾아 눈먼, 인간 에어리언들의 공중전과

그 버팀목이 되는 가슴 없는 세계.

 

 

햇살 방울들이 갈등이 심한 공중으로부터

지상으로 추락하며 흔적 없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리번거리면서 나는, 아마,

다시 한 번 살가죽을 끌어올려 목을 움츠렸을 게야.

너를 만나러 가던 좁은 골목길.

 

 

내 숨소리의 저장소, 그 밑바닥에서

암종의 살점들 터지고 있는지 툭,툭, 소리 들렸네.

나무가 내 속으로 들어온 것이었을까?

겨울날이었을 게야, 종소리였지.

초록빛 종소리.

 

 

유다가 홀로 완성되지 않듯이(「속죄양, 유다, 그리고 외계인-위험한 시절의 진료실·8」 우리 삶도 그렇다. “자꾸 잊어버려서 그렇지 어떤 책자를 들여다보면/아직도 그것은 진리로 쓰이고 있”(「성자의 권리·6」)듯이 이연주의 시에서도 진실들이 있다. 우리의 “반항과 복종”, “도망치는 보상 없는 내 하루”(「독재자」)에 대해서. “아프지 않고 견디기란 어렵”(「무덤에서의 기침」)고 기쁨이 아니라 “살아남는 조건은 슬픔뿐”(「무정부주의적 미립자의 고뇌」)이지만 “제대로 살고 싶다는 치욕이어도 좋을 용기”(「점·선·면」를 갖고 싶은 삶에 대해서. 삶을 앓는 병자들의 세계라 이연주의 시의 음정은 으시시하게 하강만을 향한다. 신께 속죄양을 바치던 시절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속죄양만 계속 바뀌고 있다. 과연 ‘제자리’가 현실에 존재한 적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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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2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02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12-0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죄양 유다, 이 시집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집 앞으로 나오기 힘들죠...

AgalmA 2019-12-11 21:39   좋아요 0 | URL
시전집 나오고 또 품절되어서 아쉽더니 다시 정상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이런 시집은 사라지지 말아야죠.

추풍오장원 2019-12-11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측의농간 출판사 참 좋습니다. 이런 re-issue 출판사 좀 많아지면 좋겠어요...

AgalmA 2019-12-11 22:18   좋아요 0 | URL
네. 달출판사, 읻다출판사 시집도 희귀성 있으면서 그들만의 색깔을 가져서 좋아합니다^^
읻다출판사가 죄다 절판 상태인 프랑시스 퐁주 시집을 내줘서 얼릉 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