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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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간이라는 점은 기적이면서도 같은 이유로 불행 같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고 사랑하면서도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경계와 이해할 수 없음으로 인한 벽도 나눠가진다. 1972년 발표한 『소망 없는 불행』(어머니의 자살로 인해 쓰게 된 「소망 없는 불행」과 아내의 가출로 인해 홀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담은 「아이 이야기」)과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여러모로 한 쌍을 이룬다. 그의 어머니는 자살하기 전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 편지를 보게 된 건 어머니가 사망한 뒤였다. 두 작품집이 동시에 쓰였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내의 이별 편지를 받고 그녀를 찾아 나서는 페트케의 심정ㅡ"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나의 체계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누군가의 자살뿐이다."(※페이지 표시는 종이책 기준, 129쪽)ㅡ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벌써 접한 듯한 상황이 느껴져서다. 소설로 쓰기 전 긴 회상 시기를 가지는 그의 작법 스타일로 봐서 가능한 얘기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에서 어머니는 아직 살아 있다. 한트케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머니가 자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의 심리 상태는 “누가 전화를 받든 괜찮아.”(34쪽)였기도 했다. 아내의 이별 편지를 받고 그녀가 있을 만한 곳에 전화를 걸어보면서도 그는 클레어와 시간을 보내며 아내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는다. “욕실로 들어가 나 자신보다 거울을 더 들여보”(14쪽)고 혼잣말을 반창고로 여기며 “제대로 전화하는 법을 배우는 날이 오기는 올까”(35쪽) 말하는 한트케의 ‘존재 불안과 소통 불능’ 딜레마는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에서도 강하게 드러났었다. 이것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가 클레어와 보내는 시간은 아내와 전혀 달랐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하지도 않았으며 나 또한 사람들이 그녀를 화제로 삼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생기 찬 모습은 별도의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주었다. 그래서 그녀와 나는 주로 나 자신 아니면 창밖의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이 우리가 애정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이었다.(62쪽)」

 

 

그와 아내 유디트가 함께 할 때는 서로를 적수로 여기고 비난과 조롱을 일삼으며 서로를 배제하는 괴물이 되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르는 것 투성이라 다른 사람과 춤을 추고 사랑하는 데도 서툴지만 “적절한 순간에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꺼내는 이별의 몸짓”(127쪽)도 어렵다.

 

「“그런 식으로라도 계속 살아갈 수는 있었을 거야.” 내가 말했다. “그 감정은 엽기적이면서도 달콤한 소외감이었지. 증오할 때는 그녀를 사물로 여기다가도, 긴장이 해소되면 존재라고 여기는 그런 적당한 거리감 같은 거. 나는 유디트도 나처럼 생각하리라 믿었어. 하지만 그녀는 그저 무관심했음을 곧 알아챘지.…(중략)…나는 그녀를 도와줄 수가 없었어. 증오심과 비열함에 짓물린 탓에 감각이 마비되어 누워 있기 일쑤였으니까. 나는 더 이상 여자와 함께 있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어.…(중략)… 한 번은 그녀가 몇 년 전에 궁색하게나마 조립한 서가를 보다가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어. 서가가 어디 한군데 망가지지도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놓여 있었기 때문이지. 그 순간 내가 그동안 유디트를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로 여겨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 그녀의 얼굴은 점점 사려 깊게 변해갔지만 정작 나는 사려 깊음을 읽어내지 못했던 거야. 그러니 이제 알겠지,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135~137쪽)」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것을 상대에게 행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상대는 이미 떠나고 없을 때가 많다. 우리 삶이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미궁으로 빠지는 이유 중 하나다. 이 소설에는 페터 한트케가 동질감을 느끼는 두 자전 소설이 계속 등장한다. 고트프리트 켈러 『녹색의 하인리히』, 칼 필립 모리츠 『안톤 라이저』에서 일인칭 서술자가 회상하는 형식과 성장 소설의 특징은 페터 한트케의 소설과 유사하다. 자전소설은 노란빛을 띤 회상과 문장을 통해 이 세계에 등장한다. 페터 한트케는 “글을 쓸 때는 난 반드시 옛날에 대해, 적어도 쓰고 있는 시간 동안은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 쓴다. 늘 그렇듯이 난 문학적으로 대상에 몰두하며 나 자신을 회상하고, 문장을 만드는 기계로 피상화시키고 객관화시킨다”라고 『소망 없는 불행』에서 밝힌 바 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에서 ‘회상’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여러 차례 거론된다.

 

「하늘만 칠했던 여자의 손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의 손은 색이 없는 어둠 속에도 노란 빛깔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금방 기억해낼 수 있는 색깔이 바로 노란색이죠.” 남자가 말했다. “노란색은 오래 들여다보면 볼수록 기억할 수 없는 먼 옛날까지 떠오르게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계기가 됩니다. 사람들이 그 앞에 서서 꿈을 꾸는 것이죠.” “바로 황금의 시절을 말이에요.”하고 갑자기 여자가 끼어들었다. 방 안의 불은 꺼졌지만 그대로 눈부시게 남아 있는 잔상을 우리는 바라보았다.(145쪽)」

「유디트에 대한 첫인상, 그것을 왜 나는 더 이상 회상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떠올려보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나를 들뜨게 하면서 새털처럼 가볍게 만들어주던 그것이야말로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절대적인 척도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런 다음부터 우리는 늘 찡그린 얼굴로 서로를 뜯어볼 수밖에 없었다.(191쪽)」

                                       

「“나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라고 할 때면 난 왠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존 포드가 대답했다. “나만의 경험이라고 해봐야 아직은 회상할 만큼 오래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차라리 사람들이 내가 보는 앞에서 겪었던 일들을 말하길 좋아합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나는 내가 직접 경험했던 일보다는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이나 미처 가보지 못했던 곳에 대한 향수가 큽니다.(197쪽)」

 

회상은 의식의 흐름 성질을 가지고 있어 인과율로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이나 그 표현도 “본모습을 숨기려는 강박관념”(21쪽) 속에서 비유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페터 한트케의 회상은 다르다. 페터 한트케의 회상은 존 포드가 말하는 회상(“내가 직접 경험했던 일보다는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이나 미처 가보지 못했던 곳에 대한 향수”)에 가깝다. 한트케는 데뷔 때부터 전통적 소설 방식을 완강히 거부해왔다. 『관객 모독』은 전통적 희곡 양식을 철저히 배제해 전위성을 극대화했다. 이후 소설에서 전통적 서사 방식을 가져오면서도 기대에 부응하려 하지 않았다. 살인자 블로흐의 부조리한 내면 심리극 같았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전기(傳記)와 에세이, 소설이 혼합된 『소망 없는 불행』도 전통적 플롯 구성의 소설과 달랐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도 사실과 허구가 묘하게 섞여 있다. 이 부분을 이야기하자면 다른 얘기를 좀 해야겠다.

현대에서 ‘아내 상실’은 주목되는 메타포다. 빔 벤더스는 페터 한트케와 1987년 《베를린 천사의 시》 대본을 공동 작업하고 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전 작품인 샘 셰퍼드 각본으로 《파리, 텍사스(Paris, Texas)》를 찍어 1984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트레비스는 기억을 잃고 실어증까지 걸린 상황에서도 가출한 아내를 찾아 사막을 방황하며 악전고투했다. 트래비스는 환락가에서 아내를 발견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직접 대면할 수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태엽 감는 새』도 아내의 가출이 소설을 끌고 가는 주요 사건이었다. 와타나베 도오루는 현실에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하루키는 판타지적 시공간을 통과한 뒤에야 서로를 성찰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구성했다. 2010년 크리스토퍼 놀란 《인셉션》에서도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내 맬(마리오 코티아르)을 꿈의 공간 림보로 인해 잃으면서 모든 상황이 꼬였다. 인 가구 시대가 점점 늘어나는 세태에서 보면 '아내 상실'은 가장 가까운 이와도 소통할 수 없는 인간 고독의 딜레마가 강하게 드러나는 모티프다. 예전에는 결과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 모티프를 많이 썼다면 최근 동향은 앞서 소개한 작품들처럼 공간을 아예 바꾸는 추세가 많다. 페터 한트케의 이 소설 2부 시작에는 이런 제사(題詞)가 붙어 있다.

 

「장소 하나 바꾸는 것이,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치 꿈을 잊는 것처럼 깨끗이 잊어버리게 만드는 데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한다면, 그거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ㅡ 칼 필립 모리츠 『안톤 라이저』(111쪽)」

 

한트케는 존 포드라는 실제 인물을 픽션에 등장시켰다. 작가는 “자기만의 독특함”(196쪽)을 강조하는 ‘나’ 중심의 유럽이 아니라 ‘우리’ 중심의 미국을 성찰의 장소로 설정했다. '팍스 아메리카나' , '반지성주의' 등등 많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미국을 과연 그런 희망적인 공간으로 볼 수 있나 싶지만 한트케에게는 미국이 무언가 바꿀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미국에 오면서 그는 “불안과 동경이 다시 도지고”(99쪽) 자신의 오래된 결핍과 과잉들을 되돌아봐야 했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미국인과 인디언의 추격전이 펼쳐지는 존 포드의 서부극처럼 자신과 유디트에게 서로를 추적하는 역할극을 주었다. 유디트가 그가 어디에 있든 엽서를 보내고, 전기 충격기가 든 소포를 보내며, 소년 갱단을 시켜 그가 강도 당하도록 모의하고, 호텔 수도꼭지에 산 성분을 몰래 설치해 테러를 가하려 했으며, 총을 들고 그를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 모두를 당신은 사실이라고 믿는가. 유디트가 연극배우이긴 하지만 FBI 첩보요원은 아니다. 한트케와 유디트가 존 포드의 저택으로 가 인터뷰를 하고 서로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당신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세세한 미국 관찰기, 자신의 트라우마와 고백, 다양한 인물들과 실측백나무를 통해 얻는 깨달음 등은 상당수 사실이지만 나는 유디트와의 저 스토리는 거의 픽션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트케의 미국행은 아내와 이혼 후였다. ‘사실’과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사 기법으로 한트케는 파괴적인 이별이 아니라 아름다운 화해를 도모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서른에 완성한 이 소설은 그가 직접 밝혔다시피 “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그 희망을 서술하려” 한 노력이었다.

 

「“예전에는 단지 고통스러운 기억만 떠올렸지만 이제야 활력이 넘치는 추억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 내가 말했다. “기억을 되살려서 경험 전체를 반복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만 내가 느꼈던 최초의 작은 희망을 다시 몽상 같은 것으로 폄하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가령 아잇적에 나는 물건들을 묻어서 감추어놓고는 나중에 다시 파보았을 때 그것들이 보물로 변해 있기를 바라곤 했지. 지금 나는 그런 일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곤 했던 예전과는 달라. 그런 일을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유치한 장난으로 여기지 않아. 오히려 일부러라도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려고 하는 편이지. 사물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 결코 타고난 내 본성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감각이 둔감해진 탓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 순간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임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야. 마술사인 척하고 놀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기억해보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어. 그 당시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든다든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했다기보다는 마법으로나 스스로를 변신시키기를 원했지. 그래서 나는 고리를 돌리는가 하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쪼그리고 앉아서 나 자신이 사라지거나 둔갑하도록 주문을 외워대곤 했어. 물론 이불을 걷어냈을 때 원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우습기야 하지. 하지만 기억을 떠올릴 때 더 중요한 건 실제로 그곳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고 믿었던 짧디짧은 한순간이지. 그리고 지금 나는 그런 감정을 단순히 사라지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기쁨으로 해석하고자 해. 그 미래 속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나와는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어. 매일같이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단 하루일지언정 얼른 더 나이가 들어서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난 정말이지 시간이 흘러 얼른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어.” (80~81쪽)」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별은 만남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사실일까, 환상의 도취가 끝나고 우리가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일까. 편지는 진실을 말하는 허구의 기호일까, 환상을 겨우 전달하는 현실의 기호일까. 한트케에게 현실과 환상의 요소들은 ‘나’에서 ‘우리’로 넘어갈 정도로 치유와 극복의 재료들로 날로 바뀌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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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11-10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찍은 아갈마님의 이 감각 보셔요 햐...

AgalmA 2019-11-13 16:17   좋아요 1 | URL
격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