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시작되었다. 벌써부터 고속도로는 정체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너도나도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안달인 이 때, 꿋꿋이 서울에 남아 있다가 도심에 있는 종묘에 가보는 것도 좋겠다.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는 종묘대제가 봉행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5월 3일이다. 이 날 우리는 '공짜로'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실연되는 장면을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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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돌아간 조선의 왕과 왕후들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으뜸 사당[宗廟]'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종묘는 사직과 함께 ‘국가’라는 말로 대체될 만큼 과거에는 중요한 곳이었다.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국가의 안녕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따라서 종묘와 사직은 모두 국가에서 주관하는 제사를 시행하던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시대 국가 제사 중에서도 종묘와 사직의 제사는 모두 가장 중요한 대사(大祀)로 규정되었다고 한다.
종묘와 사직에 관해 본 책 중에는 이현진·강문식 공저로 나온 『종묘와 사직』(책과함께, 2011)이 가장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종묘 건축의 기능과 역사, 종묘 제례와 제례악의 내용과 절차 등을 알기 쉽게 서술했다. 딱딱하고 읽기 힘든 글이 아니라 친절하고 재미있는 글이었다. 종묘와 사직에 관한 재미있는 기록들도 많이 인용되었다. 예를 들면,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중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고 한다.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적들이 크게 놀라 서로 칼로 치다가 시력을 잃은 자가 즐비했고 죽은 자도 많았다. 그래서 평수가는 할 수 없이 남별궁으로 옮겼다. 이것은 한나라 고조의 영혼이 나라를 빼앗은 왕망에게 위엄을 보인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3일(임술)
왜적이 종묘를 불태웠다. 왜적이 처음 도성에 침입했을 때 궁궐은 모두 타버리고 종묘만 남아 있었다. 왜의 대장 평수가(平秀家, 다이라노 히데이에)가 그곳에 거처했는데, 밤중에 괴이한 일이 많이 일어났고 따르던 졸개 중에 갑자기 죽는 자도 생겼다. 어떤 사람이 ‘이곳은 조선의 종묘로서 신령이 있는 곳이다’라고 하자, 평수가가 두려워하여 마침내 종묘를 태워버리고 남방(南坊)으로 옮겨 거처했다. 남방은 바로 남별궁이다.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1일(경신)
나는 정말 저 용감한 '신병'들이 누구였는지 궁금하다. 종묘를 능욕한 왜군에 분개한 나머지 게릴라전을 펼친 의병이었을까, 아니면 왜군에 대한 적의로 똘똘 뭉친 하급무관이었을까. 왕실과 조정 대신들은 도성을 내팽개치고 신주 단지만 들고 북쪽으로 도망간 판국에 한양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대단하지만, 왜군들을 밤마다 기습하여 피해를 입히다니... 그 정도의 용맹과 담력이라면 절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참 이상한 게 이 나라는 위기를 맞으면 높으신 분들은 재빨리 백성은 내버려둔 채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가고, 이렇게 이름도 모를 이들이 온몸으로 나라에 닥친 위험들을 막아내려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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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대제에서는 제관들에 의해 제사가 엄수되고, 의식과 함께 제사 음악인 종묘제례악이 연주된다. 한두 번 종묘에 갔다가 들어본 일이 있었는데, 국악은 잘 몰라도 그 넓은 정전 앞마당에서 울려퍼지던 조화롭고 경건한 가락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종묘제례악 소개 동영상 (문화유산채널)
종묘제례악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춤과 기악과 노래가 어우러진 일종의 공연 예술이다. 세종이 처음 만든 이후 세조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한다. 조금 길지만 종묘제례악에 관해 설명된 내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종묘 제례악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기악[樂]·노래[歌]·춤[舞]을 갖추고 종묘 제례 의식에 맞추어 연행하는 음악이다.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선왕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제례 의식을 위한 춤인 일무(佾舞)를 춘다.
종묘 제례악은 세종대 연향악(宴享樂, 궁중의 잔치에서 연주하는 음악)으로 제정된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에 연원을 두고 있다. 보태평은 조선 역대 국왕의 학문과 덕망을 기리고, 정대업은 외적에 맞서 군사상의 공적을 세운 선왕들을 기리는 내용이다. 1464년(세조10)에 이르러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1곡을 처음으로 종묘 제례에 연주하면서 종묘 제례악으로 채택했다.
종묘 제례악은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각각의 절차에 따라 보태평과 정대업이 연주되는데, 연주 위치와 악기 편성에 따라 악대가 등가(登歌)와 헌가(軒架)로 나뉜다. 등가는 정전 앞 계단 위 월대에서 연주하는 악대이고, 헌가는 정전 앞 계단 아래 월대에서 연주하는 악대이다. 악기 편성은 시기에 따라 변화를 보였다.
종묘 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춤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진다. 문무는 역대 선왕들의 문덕을 기리는 춤으로,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에 맞추어 왼손에는 구멍이 세 개 뚫린 관악기인 약(籥)을, 오른손에는 긴 막대기에 꿩 깃털을 단 적(翟)을 들고 추는 춤이다. 무무는 선왕들의 무공을 칭송하는 춤으로, 아헌례와 종헌례 때 정대업지악(定大業之樂)에 맞추어 나무로 만든 칼과 창, 활과 화살을 손에 쥐고 춘다.
종묘 제례악은 편종과 편경, 방향과 같은 타악기의 선율과 여기에 당피리, 대금, 해금, 아쟁 등 관현악기의 장식적인 선율이 더해졌다. 또한 장구, 징, 태평소, 절고, 진고 등의 악기가 다양한 가락을 구사하고 노래가 중첩되면서 어떤 음악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중후함과 화려함을 준다. 특히 중간 중간에 울리는 박(拍) 소리는 종묘 제례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종묘 제례악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약화되었으나 광해군 때 복구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는 종묘 제례와 더불어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종묘와 사직』,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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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대제를 놓쳤다고 해서 너무 아쉬워할 것은 없다. 종묘에서 보아야 할 것이 제례와 제례악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묘는 건축으로도 매우 뛰어난 문화유산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많지 않는 평일에(다만 이 때는 자율관람이 아니라 해설사와 함께 다녀야 한다) 종묘 건축의 조형미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종묘 정전 공중 사진(출처: 국립고궁박물관 도록)
종묘 건축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 정전이다. '동양의 파르테논'이라고 부를만큼 뛰어난 건축미를 보여주는 가로 19칸짜리 건물이다. 많은 학자들의 극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유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종묘 건축은 정전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작되는 신향로(神香路)부터 종묘의 건축은 시작된다고 보아야 한다.
종묘에 마련된 길과 건물의 배치, 그리고 그 위로 나아가는 신관들의 의식 절차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묘 건축을 이해하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 종묘의 모든 길과 판위(版位), 그리고 정전과 영녕전 앞의 드넓은 월대(月臺)는 제례가 시작되고, 멈추었다가, 다시 진행되는 거대한 '무대'이다.
종묘 정전 월대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도록)
신향로는 돌아간 왕과 왕비의 넋과 제사를 치르기 위한 향(香)만이 지나는 길이다. 인간이 다니는 길이 아니다. 아이들이 무심코 신로를 따라 걷다가 관리인들의 약간 지나친 듯한 호통까지 듣게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방문객들도 잠깐 길을 가로질러 갈 때를 제외하고 신향로를 따라 걷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
승효상 선생은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컬처그라퍼, 2012)에서 정전의 월대는 그 '비어있음'에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오로지 의례만을 위해 비워낸 이 광활한 공간은 종묘 건축의 핵심 가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정전 월대의 크기는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종묘 정전의 건축적 가치에 대해 설명한 김동욱 선생의 글을 몇 줄 옮겨 본다.
종묘건물은 건물을 단순히 옆으로 늘리기만 한 것이 아니고 증축에 의해 생기는 건축 전체의 분위기를 적절히 조정하여 하나의 장대한 제사공간을 만들어 냈다. 여기에서 종묘의 뛰어난 조형성을 찾을 수 있다. 이 건물의 한 칸 한 칸은 지극히 단순한 구성을 한다. 아무 장식을 가미하지 않은 간결 소박한 조형이다. 각 칸의 평면구성은 전면 반 칸을 기둥만 세운 개방된 공간으로 꾸며 제사 때 헌관이 제례를 치르는 공간으로 이용하고 그 뒤에 육중한 판자로 된 문이 설치되고 실내에는 간소한 탁자가 하나 놓여 그 위에 위패를 모신 작은 상자를 둔다. 이런 간결한 조형이 옆으로 길게 반복되면서 하나의 엄숙한 경관을 만들어낸다. 특히 건물 전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독립해서 서 있는 20개의 굵은 기둥의 도열은 숨 막힐 정도의 압도적 힘을 느끼게 한다. 엄청난 크기나 요란한 장식이 아닌 가장 단순한 요소의 반복이 주는 조형의 힘이 여기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19칸의 긴 건물은 앞으로 돌출한 좌우 월랑 덕분에 공간적 짜임새를 갖춘다. 특히 동쪽의 벽이 없는 월랑은 동쪽 문으로 들어오는 참배자들에게 네모난 액자 속에 구성해 놓은 그림과 같은 정전의 장대한 경관을 보여준다. 건물 앞에 마련한 넓은 월대도 제사공간의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북돋아준다. 월대에는 박석이라고 하는 거칠게 다듬은 얇은 돌판이 넓디넓은 바닥 전면에 깔린다. 하나하나의 크기나 모양이 다른 박석을 의도적으로 불규칙하게 바닥에 깔아 화강석 석재의 친근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잘 나타낸다. 또 월대 전체는 가운데를 약간 볼록하게 곡면으로 만들어 주는 시각적인 조정도 빼 놓지 않았다. 화강석을 다루는데 있어 달관한 경지에 이른 석공의 솜씨를 발견할 수 있다. 종묘 정전은 중국의 건축형식을 한반도의 토착적인 건축미학으로 새롭게 다듬어 낸 조선시대 대표적인 건축의 하나로 평가된다.
- 김동욱, 『한국건축의 역사』, 기문당, 189쪽
모든 제례는 왕과 왕후의 신주를 봉안한 정전으로 귀결되었다. 기둥과 그 위 지붕 밑으로 보이는 서까래 끝부분들은 서월랑 쪽을 향해 이어지면서 그림에서나 볼 듯한 소실점을 이루고 있다. 하늘로 치솟은 빌딩들과 그 마천루가 만들어내는 허공 속의 소실점에만 익숙하던 우리들에게 종묘 정전은 가로로 길게 뻗은 목조건물이 만들어내는 낯선 소실점을 보여준다. 이런 긴 건물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희귀하고 색다른 경험인가. 옛 건물이 주는 고풍스러움과 그 특유의 향취 같은 걸 느끼지도 못할 만큼 정전은 이미 우리의 눈을 압도한다.
종묘 정전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정전 회랑은 어둡고 단순하다. 기둥은 끝없이 반복된다. 장식이나 꾸밈이 없이 오로지 기둥과 벽면과 서까래로 되풀이되는 선과 면이 시야에 가득 찬다. 이것을 한 눈에 담기 위해서 정전이 한꺼번에 보일 것 같은 위치로 발길을 옮긴다. 공신당 앞으로 지나 남신문 앞에 서면 정전은 이제 겨우 그 검은 지붕과 붉은 기둥들을 눈앞에 온전히 드러낸다. 하늘은 변화무쌍하나 정전은 변하지 않고 고요하다. 가운데로 곧게 뻗은 신로(神路)와 검푸른 지붕, 붉은 기둥들이 지어내는 색과 인공의 선들은 하늘과 구름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선들과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정전은 신과 인간이 만나고,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고궁박물관 도록에 실린 <종묘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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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왼쪽의 재궁은 왕과 세자가 목욕제계하며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종묘에서 치뤄지는 모든 의례에는 남성들만 참여했으며 제사 음식의 준비도 모두 남자들이 했다고 한다.
제사 음식에 바칠 희생을 잡을 때도 격식을 갖추었다. '난도(鑾刀)'라고 부르는 칼은 희생의 목숨을 끊기 전에 아름다운 방울 소리를 듣게 하려는 뜻을 담은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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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 건축과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다면 임진왜란 때 왜군을 내쫓았던 神兵의 화신 너구리라도 찾아 보자. 몇 년 전 영녕전에서 만났던 너구리가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궁금하다.
그 때 내가 가까이 가서 사진에 크게 담으려고 하자 그 너구리는 정말 너구리처럼 스리슬쩍 도망가더라.
그 어떤 조급함도 보이지 않고.
한 밤에 야음을 틈타 왜병 막사에 침투한 뒤
병사 몇을 베고 유유히 사라졌던
그 때 그 신출귀몰했던 병사처럼.
이상교 글, 김동성 그림 <종묘 너구리네>라는 책이 있던데, 한 번 찾아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