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주 선생님께 드립니다.
선생님의 제안과 반론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제게 주신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돌궐님의 리뷰에 대한 저자의 입장 (2014.8.25) http://blog.aladin.co.kr/704498193/7118752
2. 돌궐님께 제안합니다 (2014.11.22.) http://blog.aladin.co.kr/704498193/7214063
3. 돌궐님의 비판에 대한 반론(1) (2014.11.29.) http://blog.aladin.co.kr/704498193/7234347
* 이하 선생님의 위 글들은 차례대로 ‘입장글’, ‘제안글’, ‘반론글’로 지칭하겠습니다.
위 2,3번 글에 대해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저는 석굴암에 관한 기존 학설에 대한 선생님의 불공정한 평가(축소·과장의 두 측면에서)가 그 어떠한 검증도 없이 독단적으로 개진된 점에 대해 나름대로 항의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기존 학계의 의견을 모두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선생님의 글에서 보이는 억측과 논리적 비약, 그리고 논거의 부족 등을 지적한 것이지 무조건 기존 설들을 옹호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선생님 저서의 ‘진의와 문맥을 오도’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책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석굴암에 대한 일제의 식민사관 때문에 학자들과 일반인들이 석굴암의 제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이제는 그것을 되찾아야 할 때라는 것, 그리고 1960년대의 석굴암 복원공사는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으며 지금까지 석굴암이 보존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또한 학계에서 주장하는 ‘전실 개방구조설’은 석굴의 보존 측면에서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 이런 내용들이 선생님 주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걸 제가 모른다고 오해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다만 저는 선생님께서 그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논거가 부족하다거나 증거를 편향적으로 선택했거나, 비약이 있는 부분 등을 지적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제안글’에서 인용하신 제 글들은 그중 일부인데, 이 문장들을 거두절미하고 본다면 선생님 말씀처럼 ‘조롱조의 언사로 할퀴고’, 저자를 향해 날린 ‘화살’로 인식될 수도 있겠지요.
그 문장들이 저자이신 선생님께는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그때그때 생각나는 질문과 반박을 적어뒀다가 한꺼번에 옮겨 쓴 것이라 다소 거친 표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좀 더 정제된 표현을 쓰지 못한 점은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첫 서평(2014.8.9., http://blog.aladin.co.kr/dolkwol/7101680) 을 쓸 때는 감히 이렇게 저자와 맞대고 필담을 주고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며(이럴 줄 알았다면 저는 리뷰를 절대 쓰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남들처럼 칭찬과 동의로만 점철된 서평을 굳이 온라인 서재에 덧붙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더욱 냉정하게 반박한 면도 없진 않습니다. 그러니 제 글들이 선생님께는 ‘음해성의 독백’으로까지 비췄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인용하신 제 글들을 원문의 문맥 속에서 직접 살펴본다면 얘기가 또 다릅니다. 앞뒤 다 생략하고 비판조로 쓴 문장의 부분만 인용해서는 제 글의 본의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는 원문에서 인용문들의 앞뒤에다 선생님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던 이유와 논거들을 거의 빠짐없이 적었습니다. 그런 앞뒤의 문맥들은 생략한 채 선생님께서 불편하셨던 문장만 뽑아서 나열하신 것은 상당히 정치적이며 논점의 핵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조작입니다.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던 주요 논점들은 그저 ‘귀하의 주관적 판단이자 소신의 영역이므로, 저자로서 아쉽긴 해도 존중해 드릴 부분’(제안글)이라며 넘어가시고, 논점들과는 별 상관도 없는 표현의 문제들만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내용을 얘기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제 글의 어투를 문제 삼은 것이죠. 이것은 명백한 논점일탈입니다.
2.
저는 강교수님의 저서에 나오는 내용과 선생님께서 주장하시는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반론글’에서 강 교수님 저서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2012)에는 ‘일출신화이니 햇살담론, 아마테라스 오미가미, 그리고 식민사관 같은 어휘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일출신화-햇살담론-아마테라스 오미가미는 서로 같은 맥락으로 연결됩니다.
그 맥락이란 것은 결국 일본인들이 석굴암에서 동해(일본해)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자기네 나라를 숭배하고 찬양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일본인들의 시각이 한국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고요.
선생님께선
저들은 ‘일본해’에서 솟구치는 야마토의 태양을 영접하도록, 아침 햇살이 석굴암 본존불을 비추는 정경을 과장되게 묘사해 조선인을 ‘유인’한 것이다. (56-57쪽)
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강 교수님의 책에도
(일본인들의 경주 여행) 안내문 중에 토함산에 올라 석굴암에서 바라보면 ‘일본해’가 보인다고 적은 것과 석굴암 본존불을 ‘신라 조각 중 유수의 것으로 重寶’라고 높이 평가한 것이 있어 주목된다. 동해가 보인다는 것은 석굴암을 통해 이른바 일본과 조선이 같은 뿌리라는 ‘일선동조’의 사상을 강조하고 일본과의 관련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일본인들이 심심찮게 언급했던 것이다. (230-231)
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햇살’ 또는 ‘일출’이란 단어는 아니지만 석굴암에서 바라보는 ‘일본해’에 대한 저들의 인식은 강 교수의 저서에서도 분명히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햇살’이나 ‘일출’이란 낱말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얘기라고 보아야 할까요? 방점을 둔 곳은 다르지만 토함산에 올라 동해를 바라본 ‘일본인의 시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결국 같은 얘기입니다.
식민사관을 다루면서 선생님께선 ‘햇살신화’에 집중하여 매우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설명하셨다고 한다면, 강희정 선생은 일제 식민사관의 배경과 그 과정, 그리고 한국인들이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과정까지 종합적이고 실증적으로 다루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문제는 다음입니다.
선생님께선 “식민사관이란 낱말이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뭔가 착오가 있으셨던 거 같습니다.
강교수의 저서 뒷쪽의 <찾아보기> 307쪽만 보셔도 이 ‘식민사관’이란 말이 31쪽, 32쪽, 94쪽, 189쪽, 202쪽, 220쪽, 225쪽에 거듭하여 나온다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꼭 ‘식민사관’이란 말이 아니어도 ‘식민지’, ‘식민지배’, ‘오리엔탈리즘’ 등등 식민사관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말들은 강 교수님의 저서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단어들입니다.
아래에 강 교수님의 저서에서 몇몇 선생님 저서에 나오는 주장과 유사한 맥락의 대목들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밑줄로 제가 강조한 부분은 선생님 저서의 논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입니다.
문화유산 석굴암은 일본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할 식민지 조선의 미술로 ‘재발견’됨으로써 조선 사람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의미로 다가서게 되었다. 하지만 ‘재발견’된 석굴암은 김대성이 처음 건축했을 때의 종교적 맥락을 잃어버린 채, 감상의 대상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문화유산으로 인식되었다. 이때 문화유산의 개념과 내용 역시 ‘국가’, ‘민족’이라는 근대적 개념과 함께 서구로부터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이식되었다. (19-20)
(일본의) 공식적인 고적조사가 조선 강점 이후인 1916년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단지 ‘식민사관의 증명 및 이의 정당화’에 있다고 본다면 지나친 단순화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32)
이 책의 목적은 석굴암 연구의 전제가 되었던 ‘인식’ 내지 생각의 틀, 이른바 ‘석굴암 패러다임’이 존재한다고 보고 이를 정면으로 검토하는 데 있다. (61)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기 이전에 식민지 경영의 전초로서 조선 곳곳의 유적과 지리·물산을 조사했던 일본인에 의해 석굴암은 다시 발견되었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석굴암에 관한 인식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일본인에 의한 재발견이라는 전제조건이야말로 석굴암에 대해 그들이 개념을 부여하고 성격을 규정하게 만든 원인이다. (88)
… 몇몇 묵객을 제외하면 아무도 석굴암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선의 선비들도 단지 ‘석굴에 올랐다’, ‘장관이다’라는 정도의 간단한 언급을 남긴 정도에 불과하다. 역사 속에, 미술사 속에 석굴암을 위치지은 것은 일본인이다. 석굴암에 관한 기본적인 인식은 일본인에 의해 형성되었고, 조선인은 이미 그들에 의해 형성된 ‘석굴암관’을 교육받았던 것이다. …
… 어떤 의미로든 일제의 식민정책과 관련된 석굴암의 재발견은 조선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선문화의 성격에 대한 규정이 자생적으로, 스스로의 힘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이때 외부가 식민 본국, 즉 제국 일본이라는 사실은 석굴암을 바라보는 관점이 정치적인 시선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88-89)
… 서구의 타자였던 일본에게 타자가 되었던 것은 식민지 조선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조선의 미술을 전근대적 성격을 의미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성숙하지 못한 아동으로 치부하거나 여성에 비유하는 것이었다. 식민지와 그 문화를 아동이나 여성에 비유하는 것은 대표적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들은 약자로서 스스로의 판단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인’이며 ‘남성’인 제국주의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일본인이 석굴암 십일면관음을 여성에 비유한 내용) 석굴암의 보살상들을 여성에 비유하여 나약하고, 자립할 힘이 없는 이미지로 부각시킨 것은 식민지의 전근대적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리엔탈리즘의 언설에 불과하다. (126)
… 일제강점기에 주입된 조선미술사의 가치관과 역사관은 개별 유물과 유적이 원래 제작되고, 자리매김되었던 맥락에서 벗어나 탈맥락화·재맥락화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석굴암은 그 자체로서 존재했고, 그 물질적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가 주체가 되어 만들어낸 인식틀은 마치 창건 당시부터 지속된 고정불변의 것인 양 ‘상상’되었다. 독립 이후 60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석굴암에 대한 우리 인식의 일부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패러다임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인식의 기본 틀은 당시 일본이 어떤 개념에서, 어떤 식으로 사고의 틀을 형성하려고 노력했는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고, 이로써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인식의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33-134)
… (하마다 고사쿠가 석굴암을) 당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말 자체가 야나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타율적인 역사를 강조하는 식민사관의 일환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시라토리의 제자였던 하마다 고사쿠가 타율적인 석굴암 건축론에 동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필자가 이 대목을 식민사관이라고 강조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당에서 온 장인이 당이 아니라 신라의 마음과 미를 표현했다는 모순된 기술이 반복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기만 하다. 이 점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식민사관의 타율성을 강조하려는 이성과 신라 미술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적 찬탄 사이에서 이들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220-221)
야나기가 발표한 석굴암론은 상세하게 논의되지 않고 그대로 후대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구축된 일본미술사의 연장선상에서 석굴암을 우리 미술의 정점으로, 조선시대 미술을 쇠락한 것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오카쿠라 덴신이 일본미술사를 전개한 방식과 상통하며, ‘東洋’의 창안자이자 식민사관의 이론가였던 시라토리 구라키치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225)
이렇듯 강교수의 저서에는 ‘식민사관’이란 말의 기본 개념, 그리고 그것이 석굴암 등에 적용되는 과정과 그 주체, 또한 식민사관의 연원이 되었던 일본인 학맥까지 매우 상세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이런 엄연한 사실과 다르게 '식민사관'이란 낱말이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선생님께선 제가 책도 제대로 안 읽고 왜곡을 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왜곡하고 있는 분은 오히려 선생님 아닌가요?
저는 이 시점에서 문득 선생님께선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의 일부분만 발췌해서 보신 게 아닌가, 그리하여 선생님께서 ‘식민사관’이란 말이 여러 차례 거듭하여 나오는 강희정 선생의 책을 고의로 인용하지 않은 게 아니라 (식민사관을 다루고 있는 내용을 읽지 못하셨기 때문에) 인용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처음에 선생님께서 고의로 이 책을 인용하지 않았다고 단정한 것은 확실하지 않은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저는 책을 모두 읽은 사람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강 교수님 저서의 마지막 장 결론 부분을 보면
축조된 이후 거의 1200여 년 동안 석굴암은 나라를 상징하거나, 또는 조선을 표상하거나, 또는 어떤 의미 있는 기념비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요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때로는 경전을 읽고 절을 하는 예배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이다. 달리 무엇이 있었겠는가? 바로 이것이 근대 이전, 일본에 의해 조선미술사의 한 장을 차지하게 되기 전, 문화재로 복원·수리되어 보호되기 이전 석굴암의 원래 맥락이다. 일제강점기에 탈맥락화된 이후, 석굴암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예배 공간으로서의 역할, 성스러운 종교의 현장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시되어야 할 석굴암의 원래 맥락(original context)이었다. (288)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부분은 그대로 선생님 저서로 옮겨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문장입니다. 선생님 역시 저서에서 석굴암의 예불과 참배 기능을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 교수의 이러한 논지는 2011년에 학술지『미술사와 시각문화』142-165쪽에 발표된 논문 「예경과 선업을 위하여: 요잡을 위한 탑과 상」에서도 이미 개진된 바 있습니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저는
두 분의 저서가 석굴암에 관한 일제시대의 ‘식민사관’을 다루고 있으며 이제는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리까지도 유사하므로 둘 중에서 뒤에 출판된 선생님의 저서에서는 반드시 선행 연구를 언급하고 넘어가야 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께는 그렇게도 모욕적 발언이 되는 건가요? 선생님 연구의 독자성을 음해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선행 연구를 인용한다고 해서 후행 연구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절한 안내에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선 '반론글'에서 전실 전각에 대한 두 분의 입장 차이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강 교수의 저서에서 전실 전각의 유무 문제는 매우 지엽적인 사항입니다.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에는
(1737년 임필대의 글에서) “고개를 넘어가니 작은 암자가 나온다. 정오에 석굴을 보기 시작했다. 목조건물의 형체를 갖추지 않은 것으로 돌을 쌓아 굴을 이루었다.”라고 써서 역시 암자에서 석굴까지 얼마간 거리가 있었으며 그가 양자를 별개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이에 의하면 석굴암 앞에 오늘날과 같은 목조가구는 없었고 굴은 노출되었던 상태라고 생각한다. (139)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글에서 강 교수는 임필대의 글에 따르면 당시에 석굴이 노출되었던 상태라고 본 것이지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실이 계속 노출된 상태라고 단정한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선 왜 제가 밑줄 친 ‘이에 의하면’을 빼고 인용하셨는지요?
앞뒤 문맥 빼고 편의대로 인용하고 해석하는 것은 인용 중에서도 원문의 본의를 왜곡하는 잘못된 인용 방식입니다.
무엇보다도, 강 교수의 책에서 전실전각 유무의 문제는 주요 논의의 전개와 크게 관계가 없는 사항입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강 교수님은 전실이 개방되었건 그렇지 않았건 어쨌든 식민사관은 있었다는 취지이고, 선생님의 주장은 전실 개방설 자체가 식민사관이라는 취지입니다.
선생님께선 일제의 식민사관의 핵심이 ‘햇살담론’과 ‘일출신화’에 담겨 있다고 설명하셨기 때문에 (햇살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전실의 개방과 전각의 유무 문제가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였지만, 강 교수님은 식민사관을 얘기할 때 반드시 ‘햇빛’과 연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두 분 주장의 차이점입니다. 그렇지만 똑같이 ‘식민사관’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결국 일맥상통한다고 보았고. 저는 리뷰에서 이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강 교수님 책에서 전실의 밀폐형/개방형 논란은 주요 사안이 아닌 부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주장의 핵심 논거는 석굴암 전실 형태에서 오는 것인데, 저는 그게 확실한 건 아니지 않은가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제가 계속 중언부언한다고 하신다면, 더 이상 저는 할 얘기가 없습니다.
3.
제가 선생님 저서에 대해 비판한 내용을 모두 떠나서, 저는 선생님의 석굴암에 대한 시각을 또 하나의 해석, 그리고 역사적 가치 평가로서 인정합니다. 무시하거나 폄하하지 않습니다.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쓸 이유와 여력이 저는 없습니다.
다만 선생님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가지려면 제가 지적했던 부분에 대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근거들을 제시하셔야 합니다. 말의 어조로만 주장하지 마시고, 실질적 근거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선 ‘제안글’에서 제 실명과 전공을 확실히 하고 논의에 임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 요구에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 생각과 달리 실명과 간판이 발언의 신뢰도가 높이는 게 아니라 글에 담아내는 논리가 신뢰도를 높인다고 생각합니다.
익명이 보장된 인터넷 공간에서 실명과 전공부터 밝히라는 말씀은 대단히 권위적이며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 정보까지 밝히면서 개인 블로그에서 소모적인 논의를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선생님의 저서에 대해 개인 공간에 서평을 썼으니 선생님의 실명이 공개된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며, 이는 선생님뿐만 아니라 알라딘에서 판매되는 책의 모든 저자들이 공통으로 감내해야 할 일입니다.
개인의 의견을 쓰는 사적 공간에서 제가 읽은 책에 대해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그건 제 자유입니다.
독자들은 그렇게 이해관계 없이 자유롭게 쓴 리뷰를 보고 나름대로 구매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실명을 밝히지 않아서 정 신뢰가 안되신다면, 그냥 무시하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는 알라딘에서 영향력 있는 리뷰어도 아닙니다.
제가 실명과 전공 등을 선생님께 알리는 순간 이것은 순수한 학술 논의와는 상관 없는 또 다른 방향으로 이용될 것이 자명하므로 앞으로도 저는 이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선생님께 개인적으로라도 제 실명 등을 밝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 글은 선생님께 드리는 제 마지막 글입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제 답변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선생님 말씀처럼 '올곧은 지식과 정보가 소통되어야 하는 공적 공간'(제안글)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사견을 올릴 수 있는 사적 공간이며, 그 공간이 알라딘 독자들에게 노출되는 것뿐입니다.
하실 말씀이 있다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학계에서 하십시오. 저도 앞으로는 그리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 글 이후에 더 이상 선생님의 저서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합당한 이유와 근거를 대면서 글을 쓰더라도 그것이 선생님께는 죄다 ‘조롱조의 비판, 모략, 악의적인 음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선생님 저서에 대해 리뷰를 쓴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