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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법정에 서다 - 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얼굴을 찾아서
성낙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4년 6월
평점 :
(저자라는 이가 자기 책의 서평란에 거친 글을 올리게 된 불가피한 사정에 대해 다른 독자분들의 이해를 바랍니다)
돌궐님의 비판에 대한 반론(1)
-강희정 교수의 논문 문제(①)
귀하의 ‘리뷰’(8/9)는 저에 대한 도덕적 파산선고로 시작됩니다.
“글쓴이가 전개하는 주장의 기본 아이디어가 근래에 강희정이 발표한 몇몇 ‘석굴암 재발견’ 연구에 힘입고 있음을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책의 말미에서 잠깐 소개할 뿐이다. 물론 이 경우도 강희정 연구의 내용과 이 책에 끼친 영향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2부 앞머리에서도 ‘90년대 말부터’ 계속되어 온 강교수의 작업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같은 비판을 반복합니다. 요컨대 제가, 강교수가 아주 오래 전부터 공들여온 작업을 통째로 베껴먹고도 마지못해 뒷쪽에 요식적으로 밝혔다는 투입니다.
양쪽 작업을 모르는 이들은 그런 사정이 있었어? 하고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데, 결코 정당한 비판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1.
귀하의 비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일단 양측의 “기본 아이디어”가 같아야 합니다.
먼저 제 책을 관통하는 “기본 아이디어”는, 지난 1세기 동안 우리를 매혹시킨 소위 ‘햇살 담론’, 곧 동해의 아침 햇살이 본존불 이마의 백호를 비춘다는 등의 환상적인 이야기가 일본 고래의 태양숭배사상(아마테라스 오미가미 신앙)에서 비롯된 저들의 달콤한 문화식민사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학계의 주류가 이른바 ‘원형논쟁’ 과정에서 확대재생산해 석굴암의 실체적 진실을 오도해 왔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예를 들어 동지 일출 지점 문제, 부다가야 대탑 문제 등을 들고 나와 전실전각이 처음부터 없었다든가, 혹은 주실 돔 지붕 앞쪽에 광창이 있었다든가, 혹은 주실 입구 쌍석주 위의 홍예석을 철거하라는 등의 주장들이 대표적입니다.
저는 그런 주장들을 ‘햇살담론’에 매몰된 반종교적이며, 비학문적인 망견으로 비판했는데, 다음은 이 책의 1부와 2부 목차입니다.
제1부 햇살 신화
1 동해의 아침 햇살
2 달을 품어 안은 산
3 햇살 신화의 탄생
4 기억의 집단화
5 인도 부다가야대탑의 주불
6 햇살 신화의 사생아, 광창
7 석굴암 건축의 꽃, 홍예석
8 석굴암은 석굴사원이다
제2부 석굴암의 20세기
1 구한말의 석굴암
2 총독부의 개축공사
3 총독부 공사의 명암
4 박제된 고대유적
5 문화재관리국의 복원공사
6 원형논쟁의 점화
7 원형과 개방구조
8 원형논쟁과 학문윤리
9 오독의 예들
10 철거지상주의
11 희생양 메커니즘
반면, 강교수는 저와 비슷한 주장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한 것이 강교수는 근대에 접어들어 석굴암이 조선민족의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출신화이니 햇살담론, 혹은 아마테라스 오미가미, 그리고 식민사관 같은 어휘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강교수가 2007년 이래의 작업을 갈무리한 <나라의 표상, 조선의 정화>의 목차를 보면 확연한 일입니다.
제1장 석굴암의 근대
제2장 일제의 조선 고적조사와 석굴암의 '재발견'
1. 문명과 야만: 일제 조선 고적조사의 배경
2. 조선 고적조사와 조선미술사의 구축
3. 석굴암의 근대적 재발견
제3장 석굴암, 나라의 정화(精華): 발견에서 복원으로, 복원에서 신화로
1. 석굴암과 조선 불교유적의 복원과 평가
2. 세키노의 조선미술사와 석굴암,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3. 조선 후기의 석굴암과 석굴사원으로서의 석굴암
4. 석굴사원 개념의 도입과 석굴암 '재발견'의 세계사적 의의
5. '석굴 패러다임'의 성립과 그 의미
제4장 조선의 표상(表象): 석굴암의 공론화
1. 야나기 무네요시의 「석굴암론」: 석굴암 인식론의 기초
2. 1920년대의 석굴암론: 과거의 영광, 영화로운 유산
3. 1920년대의 석굴암론: 세계의 자랑, 민족의 영예
제5장 다시 고대로 돌아가서: 의례도량으로서의 석굴암
정리하면, 학계를 넘어 일반에까지 ‘학문적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햇살담론’이 일제의 아마테라스 오미가미 신앙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저만의 독창적인 해석, 곧 누구한테도 빚을 지지 않은 온전히 저의 아이디어입니다.
2.
저의 이 책이 강교수의 작업에 빚을 지고 있다는 귀하의 주장을 확대하면, 두 사람의 논지 가운데 어느 정도는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을 발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 책의 핵심 제재는 문화재관리국의 1960년대 석굴암 복원공사입니다. 당시 공사에 대해 부실졸속공사라는 것이 주류학계의 입장이나, 저는 일제의 전리품으로 전락해 있던 석굴암을 비로소 종교성전의 정체성과 기능을 회복시킨,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대광정의 기록으로 재평가한 것입니다.
그 중심에 전실전각 문제가 있습니다. 주류학계는 원래부터 전각이 없었다는 쪽이나 저는 전각은 당연히 있었으며, 있어야 한다는 점을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강조한 것입니다.
마침 귀하는 ‘리뷰’의 첫 문장에서 이 책의 전체 주제를 다음처럼 규정했습니다.
“목조전실의, 목조전실에 의한, 목조전실을 위한 책이라고 할까. 모든 논리는 목조전실의 정당성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강교수도 목조전실에 관해 저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가까운 입장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강교수는 기존학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석굴암 앞에 오늘날과 같은 목조가구는 없었고 굴은 노출된 상태라고 생각한다.”(강희정, 『나라의 정화(精華), 조선의 표상(表象)』, 서강대출판부, 2012, p.139)
소위 개방구조설에 지지를 표하신 셈인데, 이 문장은 이 책의 주(註)(p.399)에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저와 강교수는, 원형논쟁의 가장 큰 쟁점인 전실전각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상반됩니다.
3.
저는 ‘저자의 입장’(8/25)에서,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사적인 뒷이야기까지 소상하게 밝혀 귀하의 비판이 학계의 동향을 헤아리지 못한 데서 나온 것임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는 거기에 붙인 ‘댓글’(9/21)에서 저의 고유한 작업을 여전히 강교수에 옭아맸습니다.
“선생님께서 강희정 교수님의 연구 주제와 내용이 선생님의 연구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점은 동의하기 힘듭니다. 다루는 내용과 표현, 방법에 조금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석굴암에 반영된 `식민사관`을 연구하는 기본적 접근 방향은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 접근 방향’은 다르지 않다?
일제 때의 석굴암을 다루면, 누가 무슨 내용을 어떻게 썼든 모두 ‘기본적 접근 방향’이 같은 것이고, '기본 아이디어'를 베낀 것입니까?
유치한 예를 들겠습니다. 6.25남북전쟁을 연구테마로 잡으면 내용이 아무리 판이해도 “기본 아이디어”도 같고, “기본적 접근 방향”도 동일한 것입니까?
일차 결론을 맺겠습니다.
강교수와 저의 작업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으며, 귀하가 저를 향해 던진 조롱조의 비판은 모략, 악의적인 음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귀하는 강교수의 논저도 제 책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혹 읽었다면 고의로 왜곡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용도 다르고 논지가 다른 책들을 놓고 영향 운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이러한 지적이 부당하다면,
“동의하기 힘들다.”, 혹은 “다르지 않다고 본다.”는 식의 막연한 추정으로 얼버무리지 말고 두 책에서 어떤 부분이 어떻게 같은지 구체적인 대목들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명쾌하게 입증해주기 바랍니다.
2014. 11. 29.
성낙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