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어준다면
게일 포먼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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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때로는 내가 선택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 선택이 나를 만들기도 하지”

(208)

 

책을 펼쳐들자마자, 한 순간에 빨려들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뭔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렸다고 할까? 예고된 비극에 앞선 밝고 자유로운 가족의 아침 풍경이 대비를 이루며, 뭔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뭔가 감미롭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예쁜 표지의 분위기가 이제야 가슴 속에 깊이 내리 박혔다. 어느새 ‘요요마’의 첼로 선율에 몸과 마음을 기대며, 잔잔한 호숫가를 거니는 것처럼,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이 가슴 벅차고, 포근하고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던 폭풍의 중심을 헤쳐 지나온 듯. 숨을 크게, 깊이 들이쉬었다.

 

‘죽는 건 쉽다. 사는 게 어렵지’라는 문구 하나가 인상적으로 다가와, 이 책을 명쾌하게 정의해 버렸다. 교통사고로 한 순간에 가족을 잃고 홀로 남겨진 열일곱 소녀, 그녀의 가혹한 운명과 그 삶을 오롯이 함께 나누고 싶다는 갈망을 느꼈다고 할까? 그렇게 홀로 남겨진 소녀의 기구한(?) 삶을 상상할 뿐이었다.

그런데 예상 밖에도 영혼이 혼수상태인 몸에서 빠져나와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가족과 친구들과의 행복했던 추억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야기 속 주인공 열일곱 소녀 ‘미아’에겐 한 가지 선택권이 주어졌다. 삶을 살아갈 것인가? 가족을 뒤따라 갈 것인가? 갈림길에 선 그녀는 자신의 삶을 오롯이 결정해야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미아가 살아주길 바라는 할머니 할아버지, 절친 킴, 그리고 남자친구 애덤의 간절함이 더해져, 다른 이들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나도 모르게 거칠고 버거운 삶이지만, 삶을 선택하기를 응원하였다. 눈시울을 붉히며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선택?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 선택에 있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주체적일까? 스스로 되물어보면, 솔직히 부끄러웠다. 미아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삶을 관장하는 그 누군가가 결정하기 바랐던 것처럼, 결정적 순간을 회피하고 싶어 하지 않았나? 그러게 우리가 맞서야 하는 ‘선택’이란 삶의 화두를 아주 섬세하고 부드럽게, 하지만 핵심을 찌르며 던지고 있다.

 

단짝친구 ‘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부모의 죽음과 어린 동생 ‘테디’의 부재(죽음) 속에서 차츰 싸울 힘을 잃어가는 미아에게 ‘너에겐 아직 가족이 있다’고 속삭여준다. '가족‘의 의미가 확대되면서, 다시금 가족의 진정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할아버지의 말할 수 없는 슬픔, 두 손은 꼭잡아주는 연인 ‘애덤’의 절절한 마음, 그 강한 사랑의 힘이 온 세상을 가득 메운 듯하다. 미아를 응원하는 모든 이들의 하나된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 울림은 좌절과 외로움, 분노 등 삶의 온갖 부정적이고 싫은 감정에 휘둘리는 많은 이에게 힘과 용기, 희망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 같다. 세상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과 아픔을 뒤로하고 살면서 괴롭고 더한 처참한 일을 겪게 되더라도, 당당히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고, ‘미아’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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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63
이경자 지음 / 사계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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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이 가져왔던 '전쟁' 위기론의 압박과 6·25전쟁 60주년!그리고 연평도 포격까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 '전쟁' 그 가상의 현실이 남다르게 느껴지던 요즘, 여섯 살 소녀의 순수함을 통해 전쟁의 상흔이 가슴 아리게 다가오는 이야기를 기대하였다. 봇몰 터진 듯 쏟아지는 그 어떤 전쟁 관련 다른 책들보다 '문학의 힘'으로 전쟁의 폐허와 그 속에서 피어난 희망을 엿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책을 들었다. 순이의 삶을 통해 질곡의 현대사를 몸소 느껴볼 수 있었다.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가 절로 떠오르며, <순이> 속 '순이' 또한 오래도록 가슴 속에 살아 숨쉬며 수없이 떠오를 듯하다. 순이의 순박함에 절로 가슴 한 가득 웃음꽃이 피다가도, 그녀의 두려움, 아픔, 불안 등에 함께 아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느덧 의젓해진 순이의 모습을 통해 밝은 희망의 빛을 느낄 수 있었다. 순이는 전쟁의 상흔 속에서 꽃 핀 순박함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될 듯하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오롯이 담아내며, 뜨문뜨문 들어왔던, 배골았던 그 시절의 풍경들이 내 속에서 더욱 생생해졌다. 그 누군가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눈시울을 붉히게 할 이야기이다.

 

<순이>를 통해 아련한 할머니와의 추억을 더욱 뚜렷해졌다. 순이와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투박하지만 거친 손길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잊고 있었던 진한 추억이 가슴 저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차올랐다. 시골 할머니집의 풍경들 속에서 순이는 이내 나 자신이었다. 순이를 향한 할머니의 다정다감한 눈길, 손길 하나하나가 타임머신이 되어, 추억 하나하나들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그리움이 짙어지는가 싶더니, 참으로 포근하고 정겨웠던 풍경은 오늘의 우리를 살찌우고 위로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순이의 이야기가 과연 전쟁의 상흔을 이야기하는 것인지조차 잊게 하였다. 전쟁이 남긴 상처와 불안, 공포 등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순이를 향한 할머니의 한없는 다사로움 때문이었다. 간첩이 되어 돌아온 분이의 아버지에 대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이웃과 사람 간의 정으로 확대되었다. 물론 그 속에서 불신과 경계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전쟁이 우리에게 남겨 지울 수 없고, 잊혀지지 않는 상처, 그늘인지도 모르겠다. 

 

오래 묵어 갈등의 골을 메울 수 없어 보였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은 이야기의 한 축이 되어, 끊임없이 여러 화두들을 던지곤 하였다. 돈의 이치를 알고 진취적으로 삶 속에 뛰어든 어머니와 전통과 옛 것의 습성을 고수했던 할머니와의 갈등,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갈등, 딸아이 순이에게 모질었던 어머니 등 여러 모순과 갈등, 차별과 폭력의 응어리를 이야기 속에 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슬픔의 덩어리들은 웃음 한 방에 봄눈처럼 녹기도 하며, 길고 깊었던 갈등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로 사그라졌다.

 

<순이>를 만나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함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어린 시절, 그리움의 물결이 온몸을 감싸안으며 할머니의 품처럼 다가왔다. 또한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순이처럼 어려움 속에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해맑은 미소처럼 가슴을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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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체 (양장) -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합체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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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저자 ‘박지리’는 말한다. 분명 작가의 소망대로 무척 재미있고 유쾌한 이야기에 단번에 사로잡혔다. 키득거리면서 발랄한 두 형제의 이야기에 홀딱 빠졌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작은 아쉬움이 번지는 가운데 가슴 속에 뭔가 뜨겁고도 한없이 기분 좋은 느낌을 방 안 가득 감돌았다. 오히려 벅찬 느낌이라고 할까! 그렇게 쌍둥이 형제 오체, 오합과 멋진 모험을 떠나, 그 시간들을 통해 한층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내 안에도 남모를 성취감,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처음 ‘합체’라는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구수한 인상의 두 소년의 표지가 눈에 들어오고 출판사 ‘사계절’이 눈에 띄었다. 최근 청소년소설, 성장소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관심을 갖고 읽다보니, 그 어떤 이야기보다 즐기게 되었다- ‘사계절 1318문고 청소년 시리즈’ 자체에도 호기심을 커졌다. 성장소설을 읽다보면, 학창시절로의 시간 여행이 단연 으뜸이다. 그리고 그 학창 시절의 즐거운 추억이 되살아나 마음이 촉촉해지고 따뜻해지는 그 감정들은 한층 마음을 풍요롭게 해준다. 더 나아가 지금의 어린 친구들의 고민을 살짝 엿보고 대화의 창을 열 수 있다는 점이 또한 청소년, 성장소설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책을 통해 세대를 뛰어넘어 함께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다분하니, 자꾸만 손에 쥐게 되었다.

 

이번에 읽은 <합★체>이야기를 해볼까! 무척 발랄하고 유쾌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한 때 한 여대생의 ‘루저’ 발언으로 세상이 시끌벅적했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한때의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우리 사회에 팽배한 외모지상주의 풍토를 간과할 수는 없다. 한편으론 나역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모순을 인정하겠다. 그렇게 ‘키’에 대한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형제의 아주 색다른 여름방학 이야기가 시종일관 유쾌하게 전개된다. 책을 읽는 내내 ‘키’에 예민한 어린 한 친구가 떠올랐다. 뭐 한 친구뿐이겠는가! 나 역시 동생과 얼마나 키가 컸는가를 두고 한창 경쟁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청소년기의 또 하나의 지상최대의 과제가 ‘키’아니겠는가! 그런데 일란성 쌍둥이 ‘합’과 ‘체’는 쇼쟁이 난쟁이 아빠의 존재로 유전학적으로 그다지 키가 클 확률이 적은 환경에서 특히 ‘체’의 키에 대한 갈망을 하늘을 찌른다.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할아버지 ‘계도사’로부터 키가 클 수 있다는 비기를 전수받고 계롱산에서 여름방학동안 수련을 하게 된다. 그리고 형제동굴에서 “합체”를 외치는데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궁금증이 일어 몸 안의 모든 세포들이 들썩거린다.

 

일단 계도사란 인물이 어떤 예언가처럼 범상치 않아-노인의 입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 모순에 대한 일침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 숨은 속뜻이 왠지 속을 시원하게 해주기도 하였다-, 은근히 어떤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일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지는 간절함 때문일까?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과 과연 현실적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지 긴장감에 떨려왔다. <난쏘공>과의 절묘한 어울어짐(?)이 흥미롭고, 청소년 시절의 꿈, 희망과 좌절이란 기본 공식에 충실하면서도 무척 유쾌한 이야기가 오래도록 머릿속에 생생하게 살아갈 듯하다. 공부에 시달리면서도 어떤 돌파구를 찾기 힘든 시기에 이 한 권의 책 <합★체>는 진정 힘이 될 것이란 강한 믿음, 확신이 생겨 여러 친구들과 나눠 읽게 될 듯하다.

 

 

 

“... 전 이 두 다리로 멀쩡히 걸을 수 있어도 정상이 아니에요. 난쟁이. 난쟁이. 다 그렇게 부르는데요. 뭐.”

노인이 말했다.

“그런 말들에 흔들릴 것 없다. 누구 하나 제 모습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라. 문제는 다른 사람이 널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네가 너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그거 아니더냐.”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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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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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옛이야기가 왠지 모르게 그리운 요즘이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을 나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펼치는 순간 오롯이 달랠 수 있었다. 

박완서! 이름 석 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못 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 미련을 떨치지 못해 스스로 상처를 주곤했던 내겐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제목은 신선하고, 또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글쎄 작가는 언제나 푸릇푸릇한 청춘처럼 맑은 느낌이라,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설사 작가의 이력을 확인하고 나이를 읽었다지만, 그 순간 잊혀졌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박완서, 지금껏 ‘할머니’의 인상은 아니었다. 그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달콤하게 내 기억, 추억과 어우러지며 오히려 이야기에 공감하며 동질감을 느꼈다고 할까? 내 가슴 속 깊이 자리하는 아련한 추억들을 되새김질하며, 그렇게 나도 모르게 가슴 시리도록 따뜻한 작가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따스함이 곧 할머니 품이란 사실을 새삼 깨친 듯! 신선함이 준 충격으로 마냥 기쁘고 설렜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손에 쥔 오늘은 할머니의 품 안에 포근히 잠긴 듯, 정겨움으로 가득 찼다. 넉넉한 품 안에 마음껏 살결을 비비고, 솟구치는 눈물을 훔치며, 마냥 위로 받고, 사랑 받으며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할머니를 떠올려본다. 책과 함께 하는 내내 나는 할머니가 무척이나 그립고 보고 싶어져, 마음 한 구석이 아렸다. 또한 할머니의 따스한 눈길, 손길에 온 마음 구석구석이 햇살로 가득 차는 느낌으로 충만했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감사와 애정, 그리움이 이야기 곳곳에서 묻어나며,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시선을 모았다.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도 잠시, 삶에 대한 무한한 따뜻한 시선 속엔 담긴 저자의 수많은 이야기와 마주하면서 나는 온갖 그리움들을 달랠 수 있었다. 그리고 깊이 있는 성찰과 그의 고백-나는 비겁한 데가 있는 인간이다. … 나는 전력투구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슬쩍 발을 배고 뒤로 물러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170), 넘치는 것보다 조금 모라자는 듯할 때 편안한 게 나라는 인간의 그릇의 한계이다. (174)-을 통해 자책으로 상처를 주곤 했던 못난 마음들을 안아줄 수 있었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요즘, 무더운 여름의 기억이 무색하도록 갑작스런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와 함께 따끈따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소박하면서 정갈한 이야기 속에 서서히 젖어들어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리고 한 겹의 홑옷이 주는 따스함조차 더없이 감사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작가의 표현-작가의 어느 ‘시’에 대한 이야기-을 빌려 표현하자면,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가 나의 아무렇지도 않은 시간과 만나서 빛을 발하며 나의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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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 대하여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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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누군가의 죽음에 그저 무덤덤하니, 어떤 느낌조차 없이 어떤 아픔을 느껴본 기억조차 없다. 숱하게 보았던 뉴스 속 대형사건, 사고 속 아수라장의 혼란, 애끓는 눈물들조차 순간의 이미지처럼 나 몰라라 도망쳐버리고 흩어져버렸다. 그렇게 아무리 아픔을 토해내는 열띤 목소리에도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될 뿐, 나 그저 여전히 밥 잘 먹고 열심히 떠들었다. 그런데 이젠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꾸역꾸역 슬픔, 애처로움이 차올라 눈시울을 붉히며 굵은 눈물 방울방울을 툭툭 떨어뜨리게 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척이나 무뎌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 어떤 계기가 있어 이렇게 마음의 변화를 겪게 된 것인지 모르겟다. 막연하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 서서히 옥죄어오는 죽음의 실체 때문일까? ‘요시모토 바나나’의 이번 신작 <그녀에 대하여>는 그렇게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것도 갑작스럽게, 예고도 없이 찾아든 죽음이란 소재를 신비하면서도 미스터리하게, 흥미진진하면서 진중하게 은근 슬쩍(?) 던지고 있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치유’와 ‘위안’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게 하는 특별한 이야기에 신비함이라는 비장의 무기로 무장한 작가다. 이젠 결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녀의 또 다른 이야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요즈음 그녀에 대한 나의 맹목이 잠시 주춤했다. <그녀에 대하여>를 통해 더욱 시들해지나 싶은 순간, 놀라운 반전으로 예상치 못한 죽음처럼 예상치 못한 반전이 숨어있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사랑스럽게 끝날 거란 우려는 우려에 지나지 않았다. 뭔가 새롭고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무척 새롭가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찰라지만 그녀에게 품은 반감은 왜일까? <그녀에 대하여>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들떠 책을 들게 되었지만, <왕국>과 <키친>속 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되었다. 가족의 죽음(또는 헤어짐)과 뜻밖의 인연으로 치유의 과정이라는 기본 맥락-상실과 치유는 그의 오랜 주제임에도-이 반복되는 탓에 다소 식상해진 것일까? 아니면, 그녀(유미코)의 트라우마의 실체를 확인하고픈 호기심과 미스터리한 전개 구조에 정신을 빼앗기기도 잠시, 예상치 못한 반전에 흡사 ‘요시모토 바나나’가 유미코의 엄마(마녀 학교 출신으로 강령회를 진해하다 뭔가에 씌어 남편을 찔러 죽이고 자살한다)처럼 어떤 오컬트적인 힘으로 나를 잠식해 들어온 것같은 석연찮음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두려움에 휩쓸린 탓일까? 그만큼 그녀(유미코)에 대한 이야기 <그녀에 대하여>는 강했다.

 

주인공 유미코는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찾아 떠난 여행을 통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사촌 쇼이치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진실! 그래서 그렇게 애타게 떠돌 수밖에 없었던 방랑자의 삶, 그것은 우리의 또 다른 자화상은 아닐까? 진실을 거부한 채 변두리만을 헤매는 떠돌이같은 인생! 참으로 암담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차분하면서도 무척 특별한 관계를 통해 인물들이 각자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보듬어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듯해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지고, 행복감이 몰려드는 묘한 마력을 지녔다. 그것이 여전히 ‘요시모토 바나나’의 이야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평범한 나의 일상이 그네들의 일상에 감도는 기분 좋은 활력과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도록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렇게 뭔가 내 안에 숨어있던 어떤 상처와 아픔을 이내 씻어버렸다. 그리고 그 누구도 빗겨갈 수 없는 숱한 죽음 -특히, 천안함 사건 같은 애잔하고 애처로운-들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그들의 명복을 빌어본다. 저 세상에서 마음의 안식과 평안을 얻기를 간절히 바란다.

 

 

문득, <어쩌자고 우린 열일곱>(이옥수, 비룡소)의 책이 떠오른다. 예기치 못한 죽음이 가져온 혼란과 상처 그리고 치유라는 공통된 소재가 어쩐지 하나로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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