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의 이야기, 그 속의 등장인물들의 관계들이 결코 가공이 아닐 수 있다는
착각이 이정명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스스로 소설을 읽고 있다고
되새기면서도,
그 시간 속에 머물고 있었을 듯한
힘!
속지 않을, 거라면서 속을 수밖에
없어,
오히려 가혹했던 소설이 바로
<선한 이웃>(이정명,
은행나무)이었다.
작가는 말하고 있다.
<선한 이웃>의 이야기는 허구의 산물이고,
전적으로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나는 두려웠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는 현재 진행형은
아닐까?
아니,
우리의 세계의 단면이 아닐까?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짓과 속임으로 가득 찬 우리들의
현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오늘을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는 듯한 기시감에 마지막 책장을 덮는 데 꽤나 시간이 필요했다.
순간 뜨거운 무엇인가를 집은
듯,
홱 던져버리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이정명!
두말하면 잔소리인 작가다.
지나칠 수 없었다.
예약을 하고,
기다리던 설렘으로 내처 책을
펼쳤다.
그리고 신나게 읽다가,
멈칫,
멈칫.
더 이상 읽어낼 수가 없었다.
30년의 시간!
그 시간의 간격 사이에 숨어 있는 역사적
진실,
그리고 소설 속 허구.
하지만 그 간격 사이에서 오늘의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최민석,
이태주,
김진아,
김기준,
엘렉트라,
관리관,
최민석으로 이어지는 인물들!
각기 개별적인 인물들과,
그 사이 얽히고설킨 관계를 풀어가기 위해 각 인물들
하나하나에 집중하였다.
뭔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반전!
그것이 이정명의 이야기다.
그리고 관리관을 만나게 해달라는 전혀 예상 밖의 전개에 더는 읽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갈무리를 하면서,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흘렸다.
한 사람의 삶에 드리어진
가혹함?
그리고 애잔함?
안타까움?
처절함?
허망함?
처연함?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또다시 철저하게 <선한 이웃>(이정명,
은행나무)의 이야기가 그저 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의구심이 든다.
알면서도 몸서리 처지도록 온몸이
떨린다.
하나의 고백을 하자면,
현대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깊이 있게 헤아려본 적도
없었다.
어릴 적에 각인된 하나의
이미지,
복잡하고 어려워 한 문제는 그냥 틀리고 말겠다며
등한시해왔다.
역사의 큰 물결 속에,
온몸을 던져본 적도 없이,
그저 나는 나의 소심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을 살았던 죄,
눈앞의 삶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생각 없이 팔아넘긴
죄였다.
그렇게
생각하자.”(267). 30년,
그 시간 속의 언저리에 나의 삶이
있다.
내 눈앞의 삶을 위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고민하게 될까?
역사의 어느 장면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헤매던 거리가 기억의
산물이었든,
이정명이 풀어낸 이야기 속,
그 거리,
그 사람들이 또다시 생생하게 실제처럼 나의 기억에
오래 각인될 듯하다.
책 이야기는 필요 없을 듯하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단상들 몇 자 적고 말
뿐.
구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이정명의
<선한 이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