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건축사 세계건축의 역사 시리즈 4
이무희 외 / 세진사 / 199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도시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다 보면 국적불명의 집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한옥처럼 장중한 맛도 없고 양옥처럼 단아한 모습도 아닌 어정쩡한 그러면서도 왠지 익숙한 그런 집들을 보게 된다. 이른바 적산가옥, 또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지어진 집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한옥도 양옥도 아닌 어정쩡한 집에서 자란 기억이 있다. 이런 집의 특징은 벽장이 무척 낮게 위치해 있고 마루가 집안을 돌아가며 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겉만 보면 잘 모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영락없는 일본식 집 스타일의 집들. 지금도 이런 집들이 우리 주위에 꽤 있다는 사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호기심이 자연스레 이 책을 구입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상세한 내용에 놀라고 말았다. 우리는 경복궁을 복원하는데 제대로된 도면 조차 없어 사진을 참조한다느니 규장각 도서를 뒤져보아야 한다느니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사실은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한다.


여기서 일본의 건축 역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일반적인 이야기는 생략하고자 한다. 다만 그들의 건축은 우리의 양식을 받아들였지만 자신들의 사회.경제. 정치.자연의 상황에 맞춰 변형되었다는 사실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국의 집은 지역에 따라 일 자. 니은 자, 입구 자로 대별된다. 그리고 세부적으로 보면 행랑채, 안채, 사랑채로 나뉘어 진다. 그러나 일본의 집들은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식의 집을 고수하고 있다. 한 예로 호소가와細川가문의 저택 그림을 보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비스듬하게 가옥이 배치되어 있는 형식이다. 이런 집들이 한국에 건너와서 가운데 본채를 중심으로 좌우 양쪽 끝에 조그만 부속건물을 배치하는 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형태의 일반 주택은 거의 다 적산가옥이라고 보면 된다. 또 다른 일본 건물의 특색은 다다미라는 바닥 구조이다. 다다미는 방의 크기에 따라 다다미 수를 조정할 수 있으며 건물과 건물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구실을 한다. 전통적 일본 가옥은 미닫이 문의 개폐에 따라 방의 크기가 유동적으로 변한다.


이런 것 이외에도 이 책은 일본 건축의 대표적인 건물을 자세하게 해설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저자들은 이런 방식이 자신들의 문명적 우월성이라고 은근히 자랑을 하지만 그 원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일본인들의 책을 읽다 보면 언제나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것은 중국에서 받아들였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한국이란 나라가 자신들의 생각에는 아직도 작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란 일본인이 생각난다. 그는 조선의 단순미에 반한 일본인이었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무력으로 식민지화했을 때 부터 조선의 목공예품과 도자기에 대해 철저한 연구를 한 사람이었다. 그의 목적은 한국적인 미를 어떻게하면 일본이 이용할 수 있는가에 집중되었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한국을 잘 이해하는 일본인이란 칭호를 얻게하였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일본의 단순한 가구가 서구인들의 관심을 끌면서 일단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일본적인 것이라고 이해될 때 우리의 문화는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프랑스 파리의 중심가에 한국의 전통가옥을 지어놓았고, 옥스포드 대사전에 온돌이 on'dol이라는 고유명사로 기재된다고 하니 마음이 놓인다. 요즘처럼 침대를 일상화한 생활에서 한국적인 삶 자체는 불편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식.주에서 우리의 것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우리는 대한국인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켈트 이야기 - 코르토 말테제
휴고 프라트 지음, 홍은주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휴고 프라트Hugo Pratt를 만난 것은 인터넷 상에서였다. 어느 잡지에서 삽화로 나온 만화잡지의 제목을 보고 인터넷을 여행하던 가운데 그의 그림을 만났다. 처음 그의 그림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고우영화백의 서양판 그림인 것 처럼 느껴졌다. 굵직한 터치며 생략적인 화면 구성이 너무나 유사했다.  그리고 짧은 영어실력으로 읽어가는 도중에 코르토 말테제Corto Maltese란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선원모자를 쓴 단호한 얼굴의 모습. 그리고 얼마후.... 그의 만화를 만나게 되었다. 이런 만화를 접한다는 자체가 어찌보면 시대의 변화속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 하나가 아닐지.

처음 읽었던 책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시베리아 철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였지만 나를 사로잡은 인물은 폰 웅게른 슈테른베르크 남작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그의 일생은 한마디로 열정과 광기가 얽힌 삶이었다. 이런 사람을 알게해준 프라토에게 은총이 있기를...

그리고 나머지 책들을 다 구입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구입한 책이 바로 켈트 이야기였다. 신화와 현실, 가공의 세계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진 세계는 어찌보면 보르헤스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줄거리가 헐리우드로 건너갔을 때 얼마나 세속적으로 변모할 수 있는지.... 지금 한국의 만화시장은 일본의 감각적인 만화가 거의 장악하고 있다. 그 틈새에서 이런 만화가 생존하기란 솔직한 이야기로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만화도 서가에 진열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는 너무 호사스런 사치일까? 나머지 시리즈도 조만간 다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군중과 권력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강두식. 박병덕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선동을 통해 대중들에게 <원이 직선>임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는 대중의 속성을 가장 잘 이해한 정치가였다. 그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을 대중이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끔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였다.


81년 생소한 엘리아스 카네티가 노벨상을 받았고, 82년 그의 저서를 구입하였다. 제목은 <군중과 권력>이었다. 군중과 권력은 항상 파시즘을 연상시킨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선동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선동에 의해 군중들은 일사분란하게 외치거나 행동한다.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이 찍은 <의지의 승리>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가? 1934년 나치당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찰영한 이 영화는 엄청난 시각적 효과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거대한 공간에 질서정연하게 꽉 들어찬 대중들, 그리고 그 사이에 넓게 난 일직선의 공간,  여기를 단 세 사람의 인물이 행진한다. 그 압도적인 화면은 대중과 권력의 속성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다. 지도자에 대한 일사분란한 복종의 정신과 범접할 수 없는 신격화가 화면에 담겨있는 것이다.


이 책은 파시즘에 대한 보고서이지만 지금도 유효하다고 본다. 대중이란 어찌보면 너무나 단순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집합체인 대중은 욕구를 분출하기를 원하면서도 그 안에서는 인간적 평등을 갈구한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타인의 간격에 틈이 존재할 수 없을 만큼 좁혀지는 밀집을 사랑하며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중이 움직일 방향이 문제인 것이다. 대중은 어찌보면 레밍과 같은 존재일수도 있다. 선두 주자의 안내로 정해진 한 방향으로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단순성을 우리는 중국의 60년대 문화혁명에서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이성은 감성에 의해 소멸되는 하찮은 것일 뿐이다.


군중을 움직이는 권력의 속성은 폭력이다. 이 폭력은 물리적일 수도 있고 정신적일 수도 있다. 폭력을 수반한 권력은 언제나 속도를 중요시한다. 징기스칸은 늑대의 후손이었고, 파라오는 매였으며 로마황제는 독수리였다. 권력을 장악한 자에게 가장 성가신 존재는 신속함을 방해하는 세력인 것이다. 왜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에서 야당이 탄압을 받아왔는가는 이 속성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의 또 다른 속성은 질문이다. 질문의 긍국적인 목표는 분해이다. 한 인간을 또는 한 집단을 철저히 분해하므로서 그 자체를 완벽하게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의 가장 핵심은 비밀이다. 먹이를 사냥하는 사자를 보라. 그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은폐시킨다. 그러므로서 상대의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언제,어디서,어떻게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대에 대한 공포감. 비밀은 두려움과 연결되는 코드이다.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라는 책에서 "죽음은 결코 승리일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권력의 박해 속에서 수용소에 갖힌 사람 가운데 생존자만이 증언할 수 있다는 생존자들의 외침은 생존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권력은 자신의 약점과 치부를 감추기 위해 모든 증인을 압살하려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는 그 시대의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이로서 권력은 대중을 이용해 권력을 얻었지만 살아남은 생존자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심판자가 한 명일지라도 유효한 것이다. 바로 이점을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가들은 두려워해야만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우아 2004-09-2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꺼운 책은 두꺼운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두꺼운 책을 읽는 이의 열정은 가볍지 않다고 봅니다
풍부한 지식이 보여주는 삶의 통찰력!
책을 가볍게 읽는 사람들은 마땅히 두려워해야만 합니다
저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만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중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dohyosae 2004-09-25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다는것...고통이죠. 그러면서 서서히 중독되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방문 감사합니다.
 
연금술 이야기
앨리슨 쿠더트 / 민음사 / 1995년 7월
평점 :
절판


연금술은 우리가 아는 것 처럼 과학은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였고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鍊金術은 단순히 금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연금술은 신화의 세계와 맞닿아 있는 원초적인 신앙인 것이다. 서구 세계는 데카르트가 합리적인 이성의 세계를 제시한 이후 뉴턴의 만유인력으로 기계적 세계관이 확립되었다.  이후 이성을 거스르는 모든 학설은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결과 서구 세계는 과학을 얻었지만 신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칼 구스타프 융은 신화의 세계를 다시 서구인들의 눈 앞에 꺼내 놓았다.  인간 무의식의 세계는 性的인 환상이 아니라 신화적인 환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융은 밝혀냈던 것이다.


연금술은 일종의 종교적인 세계였다.  종교가 <완전한 제1자> 즉 신을 향한 여행이라면 연금술은 종교의 신에 해당하는 <현자의 돌>을 찾는 순례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들은 완전한 금을 찾기 위해 그 완전함을 구성하고 있는 완전의 돌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수많은 화학적 발견을 했다. 그 화학적발견은 부수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자의 돌을 찾기 위한 징검다리로 생각했던 연금술사들...


연금술은 어찌보면 합리적 세계관에 몰입되어 있던 서구 세계의 이단적인 발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단적인 발상의 부수물은 서구인의 합리성에 가속도를 붙게하는 추진제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역사의 우연성을 생각나게 한다. 고전적 세계관은 유클리드의 3차원 절대 공간이 절대 시간과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절대 세계와도 독립되어 있으며, 시간은 어디서나 일률적으로 흘러간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부처가 <과거나 미래, 공간이나 개별적인 사물들은 다만 이름 뿐이며, 사유의 형상이고, 일상적인 관용어이며, 피상적 실재에 불과하다>고 설파하였다. 연금술의 세계는 기계적인 세계관에 대한 반발이었다. 모든 것이 시공간 속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자신의 본질을 유지한 채로 독립성을 유지할 뿐이다. 더 이상의 융합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연금술사들은 이런 세계를 부정하고 융합의 세계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서구는 이들의 사상은 거부한채 이들의 열매만을 흡수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런 세계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부서지게 된다. 닐스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는 연금술사들의 최종적인 승리를 확인하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골 세계제국 - 아시아총서 제7권
임대희 / 신서원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화포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최강의 군사력은 기마부대였다. 이 말은 기마부대를 기본으로 하는 유목민족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기마부대의 위력은 샤를마뉴가 이슬람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푸아티에 전투에서 자신의 기마병을 투입하여 승리한 사실은 유명하다. 그리고 이 기마병을 근간으로한 기사제도와 봉건제도가 확립된 사실은 중세의 상식이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기마병을 양성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실제로 중세 잉글랜드의 예를 들면 5하이드hide(대략 가로 세로 140m의 경지)의 경지를 가진 농민은 의무적으로 1명의 직업군인을 부양하도록 하였다. 이로볼 때 기마병의 양성은 더욱 힘든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이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자연적 환경 그 자체가 기마병 양성을 위한 최선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 중세의 군사력 우위는 당연히 농경 정주민보다는 유목 기마민이 우세하였다.


몽골의 원제국은 이런 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예에 불과하다. 물론 여기에는 징기스칸이라는 불세출의 전략가가 있었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지만.... 몽골의 세계제국은 방어적인 제국이 아니라 도전적이고 확장적인 제국이었다.몽골의 지배계급 역시 개방적인 인간들이었다. 일한국과 킵착크한국의 지배자들은 이슬람교도의 한가운데 그들의 통치영역이 있었다. 그들은 통치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을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부인은 네스토리우스교를 신봉했지만 말이다.


중국의 역사는 농경민족인 한민족의 왕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왕조의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한족이 중심이 된 송이나 명왕조는 확장을 포기하고 수세적인 위치로 돌아선 반면 당이나 원. 청은 공세적이고 대외확장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유목적 사고 발상의 자유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말이 곧 국력이던 시기에 고려는 탐라에 거대한 방목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원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지만 당시 고려는 최상의 말 공급지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명이 건국하자 조선에 엄청난 양의 말을 조공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생국가였던 명은 인접 국가에 양질의 말 생산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무척 신경이 쓰였음이 틀림없다. 이 결과 명은 태조 4년(1395)에 말 1만필을 가져갔고, 태종 원년(1401년)에는 네 차례에 걸쳐 1천필씩 모두 사천필의 말을 가져갔다.그후에도 명은 한번에 1천필씩 여러번 말을 징발해가고 세종 원년(1419년)에 또 다시 1만필의 말을 징발해 갔다. 이 결과 조선에는 양질의 말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유목국가였던 몽골이 고려 전국에 말사육을 장려하여 강력한 기마병단을 구성할 여력이 있었던 고려에 비해 조선은 건국 초기 명의 견제에 의해 기마병단을 구성할 양마 대신 번식성이 강하고 잡식성인 조랑말 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후 조선은 한번도 별도의 기마병단을 구성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에만도 기마병단과 보병군단의 적절한 구성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던 1등급 군사국가 역량에서 졸지에 2등급 군사국가 역량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고려시대 거란. 여진. 몽고의 삼개민족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우리는 단순히 한민족의 끈기와 저력으로 버텼다는 애매한 표현을 한다. 하지만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거란과 여진으로부터 우수한 말을 수입하고 별무반이란 부대 안에 신기군이란 독립적 기병군단을 구성하였던 국가였다. 실제로 몽고와의 30년 전쟁은 고려의 군사적 역량이 돋보인 전쟁이었다. 만약 무인정권이 국민적 화합을 이루었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되었을지도 모르는 역사적 아쉬움이 남는 전쟁이었다.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에게 밀리기 시작하는 계기는 화약의 발명에 따른 총포류의 발명이 진전되면서 부터이다. 실제로 아시아의 청 제국을 역사상 마지막 유목민 제국이라고 부른다. 청 이후 세계사 속에서 더 이상 유목민은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서지 못한다. 그것은 세계사의 흐름이 변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세계사는 육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건이 아니었다.  세계사의 무대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바다로 확장되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마민족의 슬픈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나치 독일의 기갑부대를 앞세운  전격전 앞에 폴란드군은 최후의 일전을 감행하였다. 포모르사케-폴란드 창기병대-라 부르는 부대가 철의 기갑사단 앞으로 육탄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비참함은 스키타이족이 초원에서 흥기한 이래 마지막으로 보여준 장렬한 기마 돌격이었다.


역사의 진실은 아무리 시스템이 좋아도 그것을 시대에 맞춰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진보의 커다란 짐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