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몽골 세계제국 - 아시아총서 제7권
임대희 / 신서원 / 1999년 3월
평점 :
화포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최강의 군사력은 기마부대였다. 이 말은 기마부대를 기본으로 하는 유목민족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기마부대의 위력은 샤를마뉴가 이슬람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푸아티에 전투에서 자신의 기마병을 투입하여 승리한 사실은 유명하다. 그리고 이 기마병을 근간으로한 기사제도와 봉건제도가 확립된 사실은 중세의 상식이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기마병을 양성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실제로 중세 잉글랜드의 예를 들면 5하이드hide(대략 가로 세로 140m의 경지)의 경지를 가진 농민은 의무적으로 1명의 직업군인을 부양하도록 하였다. 이로볼 때 기마병의 양성은 더욱 힘든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이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자연적 환경 그 자체가 기마병 양성을 위한 최선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 중세의 군사력 우위는 당연히 농경 정주민보다는 유목 기마민이 우세하였다.
몽골의 원제국은 이런 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예에 불과하다. 물론 여기에는 징기스칸이라는 불세출의 전략가가 있었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지만.... 몽골의 세계제국은 방어적인 제국이 아니라 도전적이고 확장적인 제국이었다.몽골의 지배계급 역시 개방적인 인간들이었다. 일한국과 킵착크한국의 지배자들은 이슬람교도의 한가운데 그들의 통치영역이 있었다. 그들은 통치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을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부인은 네스토리우스교를 신봉했지만 말이다.
중국의 역사는 농경민족인 한민족의 왕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왕조의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한족이 중심이 된 송이나 명왕조는 확장을 포기하고 수세적인 위치로 돌아선 반면 당이나 원. 청은 공세적이고 대외확장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유목적 사고 발상의 자유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말이 곧 국력이던 시기에 고려는 탐라에 거대한 방목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원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지만 당시 고려는 최상의 말 공급지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명이 건국하자 조선에 엄청난 양의 말을 조공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생국가였던 명은 인접 국가에 양질의 말 생산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무척 신경이 쓰였음이 틀림없다. 이 결과 명은 태조 4년(1395)에 말 1만필을 가져갔고, 태종 원년(1401년)에는 네 차례에 걸쳐 1천필씩 모두 사천필의 말을 가져갔다.그후에도 명은 한번에 1천필씩 여러번 말을 징발해가고 세종 원년(1419년)에 또 다시 1만필의 말을 징발해 갔다. 이 결과 조선에는 양질의 말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유목국가였던 몽골이 고려 전국에 말사육을 장려하여 강력한 기마병단을 구성할 여력이 있었던 고려에 비해 조선은 건국 초기 명의 견제에 의해 기마병단을 구성할 양마 대신 번식성이 강하고 잡식성인 조랑말 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후 조선은 한번도 별도의 기마병단을 구성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에만도 기마병단과 보병군단의 적절한 구성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던 1등급 군사국가 역량에서 졸지에 2등급 군사국가 역량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고려시대 거란. 여진. 몽고의 삼개민족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우리는 단순히 한민족의 끈기와 저력으로 버텼다는 애매한 표현을 한다. 하지만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거란과 여진으로부터 우수한 말을 수입하고 별무반이란 부대 안에 신기군이란 독립적 기병군단을 구성하였던 국가였다. 실제로 몽고와의 30년 전쟁은 고려의 군사적 역량이 돋보인 전쟁이었다. 만약 무인정권이 국민적 화합을 이루었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되었을지도 모르는 역사적 아쉬움이 남는 전쟁이었다.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에게 밀리기 시작하는 계기는 화약의 발명에 따른 총포류의 발명이 진전되면서 부터이다. 실제로 아시아의 청 제국을 역사상 마지막 유목민 제국이라고 부른다. 청 이후 세계사 속에서 더 이상 유목민은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서지 못한다. 그것은 세계사의 흐름이 변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세계사는 육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건이 아니었다. 세계사의 무대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바다로 확장되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마민족의 슬픈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나치 독일의 기갑부대를 앞세운 전격전 앞에 폴란드군은 최후의 일전을 감행하였다. 포모르사케-폴란드 창기병대-라 부르는 부대가 철의 기갑사단 앞으로 육탄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비참함은 스키타이족이 초원에서 흥기한 이래 마지막으로 보여준 장렬한 기마 돌격이었다.
역사의 진실은 아무리 시스템이 좋아도 그것을 시대에 맞춰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진보의 커다란 짐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