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와 마틴 루터 킹에게서 배우는 비폭력
마리 아네스 꽁브끄. 귀 들뢰리 지음, 이재형 옮김 / 삼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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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0년대 공산주의가 몰락하자 지구촌의 사람들은 이제 핵공포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하였다. 이제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온 세상은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고, 창을 녹여 낫을 만들게'되는 날이 왔다고 즐거워하고  '양과 사자가 한 울타리에서 놀고... 계곡이 솟아오르고, 산이 무너져 평지가 되는' 시대의 첫장이 열렸다고 기뻐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런 생각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검은 테러, 백색 테러에 의해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 세계는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문턱에서 오히려 더욱더 심한 대립의 장으로 함몰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왜 이런 악순환이 계속 되어야 하는가. 무엇이 문제이기에 세계는 점점 더 혼미한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가. '위대한 영혼' 간디는 이런 사회는 '원칙이 없는 정치, 노동이 없는 부, 의식이 없는 쾌락, 인간이 없는 지식, 도덕관념이 없는 거래, 인류가 없는 과학, 희생이 없는 신앙'이 범람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간디는 이런 '일곱가지 사회적 악'에 우리는 반기를 들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 책은 비폭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비폭력이란 무엇인지를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의 삶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두 사람의 삶은 평범한 삶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이 삶을 택하기 까지의 삶은 정말로 평범하였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어느 한 순간 의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변모하였다. 마치 이 모습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어느날 한 순간에 모둔 것을 버리고 신에게 귀의한 것과 같은 전환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간디와 킹 두 선구자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비폭력이지만 이것은 손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비폭력은 비굴, 열등, 순종이 아니라 당당함이며 평등함이고 도전이란 사실이다. 이를 얻기 위한 방법은 온 몸으로 부딪히면서 싸워나가는 것이어야만 했다. 그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승부가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포기해서는 안되는 싸움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쟁취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싸움에는 무기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개개인의 '불굴의 용기'뿐이다. 이 용기는 포용이라는 거대한 샘에서 솟아나오는 불사의 넥타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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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고 싶은 사나이
루디야드 키플링 지음, 김정우 옮김 / 함께읽는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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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야드 키플링의 소설  '왕이 되고 싶은 사나이'의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식민지 통치하의 인도에서 별볼일없이 떠돌던 영국인 건달 피치 카나한과 다니엘 드라보트가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한 오지 카피리스탄으로 가서 왕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왕이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술하면서  키플링은 영국 제국주의의 위대함을 은근히 자랑한다.  피치 카나한과 다니엘 드라보트가 20정의 소총을 가지고 산속 오지의 주민들을 무력화시키며 나아가는 과정은 제국주의가 어떤 방식을 통해 타지역으 점령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교본이라고 생각된다.  총을 이용해 최초의 부락을 자신의 수하로 만들고 이들을 이용해 다른 부족을 점령해 나가는 그들의 행위는 정말 영악스러울 정도이다. 그리고 이들이 많은 부락을 점령한 다음 한 일은 위원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부락의 장로를 위원회에 편입시키고 이를 통해 부락을 재조직하고 통솔하면서 그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자신들은 왕으로 행세한다. 그 다음 이들의 꿈은 무엇인가. 자신의 왕국을 빅토리아 여왕에게 바치고 그 댓가로 대영제국의 정식 귀족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피는 극소화하고 타인의 피를 극대화하면서 이룬 결과가  이 정도라면 정말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런 사례가 키플링의 소설에서나 가능하다고 본다면 큰 오산이다. 목사의 아들인 세실 로즈가 로디지아를 건설한 이야기는 당시 모험가들에 의한 식민지 영역의 확장이 결코 장난이 아니었음을 실증하는 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니엘 드라보트와 피치 카나한의 이야기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이 비극의 시작은 너무도 인간적인 이유로 인한 것이었다면 믿어질까. 이것은 피가 흐르는 감정으로 제국을 경영하면 파멸을 맞는다는 은근한 비유일까. 실제로 끝까지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던 피치 카나한이 살아남는 것은 이런 생각에 무게를 실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1975년 존 휴스톤이 감독하고 숀 코네리-다니엘 드라보트-와 마이클 케인-피치 카나한-그리고 크리스토퍼 플럼머-소설속의 화자인 키플링-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를 통해서였다. 물론 소설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한 이 영화는 소설의 빈 공백을 훌륭하게 메워줄 보조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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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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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이란 말이 있다.  컴퓨터가 일상화된 작금의 세상에서 느리다는 것은 어쩌면 죄악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활의 모든 리듬을 알레그로에 맞추고 있다. 그러기에 느림이란 어찌보면 시대의 뒤켠에 있는 낡은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낡은 것과 느리다는 것이 동일시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 반대편의 빠르다는 것과 진보가 동일시되는 것과 같은 사고의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영복 선생은 이성과 마음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로 質과 量으로 대비하였습니다. 선생은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추종할 때 우리의 설자리가 척박해 진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프로스트가 시에서 읊조리지 않았더라도 여러 갈래의 길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있습니다.  그 길 가운데 우리가 가야할 길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어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은 이 길은 택한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늦을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은 금새 잡초에 덮이고 조만간 길이었다는 흔적마저 사라지게 합니다. 그 뒤에 오는 사람은 다시 그 없어진 길을 더듬으며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느림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느림의 길은 진보일까요, 수구일까요. 이런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선생의 글을 읽는다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먼저 읽는 것이 도리이겠지요. 하지만 나는 순서를 바꿔 이 글부터 읽었습니다. 앞의 책이 선생의 뼈와 골수라면 이 책은 살과 피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선생의 글이 가깝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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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찰스 펜 지음, 김기태 옮김 / 자인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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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는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만 할까. 그리고 그 자질은 어떤 상황에서 빛을 발휘하는 것일까.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국민을 자신의 부모 형제 자식으로 생각하던 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손때 묻은 지팡이와 평생을 사용한 타자기 그리고 옷 몇가지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어떤 누구도 가볍게 대하지 못하는 무게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죽은 육신은 가벼웠지만 영혼은 전 세계를 짓누를 정도로 엄청난 사나이였다. 


그는 죽음이 가까웠지만 결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신념이 있었다. '愚公移山'과 같은 믿음이 있었다. 자신은 죽지만 자신이 길러낸 훌륭한 자식들이 조국의 분단을 끝낼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만약 욕심을 부렸다면 더 많은 피와 더 긴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에게 모든 영예가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모든 영예는 죽은 그에게로 받쳐졌다. 그래도 산자들은 이를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검소하게 살았고 초라한 대나무 침상 위에는 손때 절은 茶山의 牧民心書가 놓여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지도 못한 조선의 불우한 학자가 유배지에서 쓴 지도자의 수양서를 읽으며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갈 마음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닦고 닦았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정치에 있어서 지도자는 무엇일까. 아니 지도자에게 정치는 무엇일까라고 물어야하나?


지금도 자동차 폐타이어를 보면 호지명 샌달이 생각난다. 그것은 60년대 우리의 가난과 궁핍함의 상징이자 저 먼나라의 저항의 유물이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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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클라우스 뮐러 / 가서원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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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에 "아무리 굳건하게 닫힌 문도 황금으로 두드리면 열린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돈의 위력이 어떠한지를 잘 드러낸 말이라 하겠다. 돈이란 과연 무엇이기에 인간에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까.


우리가 배운 경제상식에 따르면 돈의 역사는 물물교환에서 시작하여 물품화폐를 거쳐서 동전, 지폐, 전자화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배운다. 그리고 앞으로 돈이 어떻게 자신의 모습을 변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책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돈이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면서 우리의 모든 면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보면 돈이란 정말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경제적 거래를 위해서는 담배에서 튜울립에 이르기까지 모습을 바꿔가며 시대 속에서 생존해 나가는 모습을 볼 때 돈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둘 이상이 모이게 되면 정치와 경제를 논하고 그에 걸맞는 체제를 만들어내려는 '정치. 경제적인 동물'이다.  시베리아의 사냥꾼은 모피의 가치로 다른 물건의 가치를 가늠하고,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소금의 양으로 물건의 가치를 가늠하기도 했다. 물론 튜울립 뿌리처럼 투기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던 특별한 화폐도 있었다. 이처럼 돈은 자신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괴도 루팡처럼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돈은 항상 자신의 덩치를 불리는 곳으로 굴러가고 있다. 이것은 돈의 변화무쌍한 모습과는 대비되는 잔혹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은 언제든지 자신의 덩치를 더 크게 불릴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재빨리 이동한다. 이 이동에는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오로지 이익만이 존재한다. 그 이익의 끝이 황금만능주의와 물신주의라고 할지라도 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돈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88년 들불에서 처음 나온 후 1994년 가서원에서 다시 나왔다. 2004년 이마고에서 돈과 인간의 역사란 제목으로 이 책을 다시 출간했다. 책의 원제목은 Wo das Geld die Welt regiert이다.  원제목을 그대로 옮긴다면 '돈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이다.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88년도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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