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세계 현대지성신서 2
프리드리히 헤르 지음, 김기찬 옮김 / 현대지성사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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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헤르가 바라보는 중세의 세계는 1100년에서 1350년까지의 기간으로 12세기에서부터 14세기 중반까지의 역사이다. 헤르가 보는 이 시기는 제1차 십자군 운동으로 시작되어  백년전쟁의 시작에서 끝을 맺는다.  즉 헤르는 아랍과 유럽의 접촉에서 시작하여 귀족계급이 몰락하기 시작하는 초입에서 이 책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헤르가 다루고 있는 시대는 중세문명이 결실을 맺는 최전성기를 기술하고 있는 셈이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중세의 전성기를 시작하는 사건은 십자군 운동이라는 전쟁을 통해서였다. 이 십자군 전쟁은 교회의 권위와 교황권의 위력이 살아있음으로서 가능한 종교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중세의 전성기가 마감하는 것 역시 교회와 국가와의 갈등에서 교황권이 왕권의 조력자로 전락하면서 막을 내린다. 실제로 로마의 교황청은 1309년에서 1377년까지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와 있었다(아비뇽 유수). 이는 교황이 프랑스왕의 세력권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실제로 이 기간 동안 교황은 프랑스인이 선출되었다. 이후 교회는 속세의 권력보다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더 노력한다.


그렇다면 헤르가 바라보는 절정기의 중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치적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시칠리아에 이르는 곳에서 아랍의 세력이 점차 유럽의 공세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십자군의 원정으로 팔레스티나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 지역에 십자군 제후들의 왕국이 건설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도시와 길드가 번성하였다. 기사도라는 새로운 규범이 나와 귀족사회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종교에서는 교황권이 최절정기에 달하면서 교회가 중세의 정신적인 지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왕권이 강화되고, 잉글랜드에서는 의회정치의 발전으로 입헌군주제의 틀이 다져진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이 처음 출현하고 아랍의 학문이 유럽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이 시기는 유럽이 몸을 부풀리는 시기였다. 유럽은 그동안의 후진성을 만회하고자 하듯이 모든 것을 왕성하게 흡수하고 있었다. 그 왕성한 흡수력은 교회의 적절한 제어로 한계를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이제 유럽은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완벽한 자신들만의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 시스템은 이제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아랍의 시스템과 겨루어야만 할 운명이었다. 여기서 승리하는 자들이 지중해세계와 아프리카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 시작이 바로 이 시기였던 것이다.


헤르는 이 시기의 왕성한 사회적 발전에 대해 전 분야를 섭렵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헤르가 관용적이고 탄력적인 그리스도교 세계라고 묘사했던 12세기의 상황은 14세기에 들어오면서 불관용과 경직된 제도로 변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된 것을 헤르는 신앙의 조항들이 하나의 교리로 규정된 것에 원인을 두고 있다. 물론 이 시기에 헤르의 지적뿐만 아니라 페스트와 같은 질병에 의한 유럽의 인구 감소와 이에 따른 성직자들의 질적함량 미달과 같은 요소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종교적 완고성은 그동안 개방적이었던 유럽사회를 닫힌 사회로 몰고가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것은 종교에 의해 촉발된 또 다른 퇴보였다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두 주인공이었던 라틴어권과 게르만어권의 움직임은 사뭇 달랐다. 라틴어권들이 대양으로 자신들의 눈을 돌린 반면 게르만어권은 슬라브족이 살고 있는 동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결과 유럽은 이 시기에 동쪽의 유럽과 서쪽의 유럽이 형성되었다는 점도 헤르는 말하고 있다. 즉 헤르에게 중세의 전성기는 이후 유럽세계를 규정짓는 모든 것이 형성된 시대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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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빛과 그림자 - 그림과 함께 떠나는 중세 여행
페르디난트 자입트 지음, 차용구 옮김 / 까치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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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중세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스테인드글라스stainedglass>라고 생각한다. 그 오묘한 빛의 조합과 작은 유리 조각 하나 하나가 합쳐저 하나의 주제를 완성해 나가는 그 과정이 중세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스테인드글라스는 중세가 추구했던 세계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물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이란 매개물이 있어야만 제대로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다. 이 빛은 중세에는 누가 뭐라해도 <神>이었다.  신의 은총이 허락하지 않는한 그 어떤 것도 스스로 광채를 발휘할 수 없다는 상징으로서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드러난 중세의 자화상인 것이다.

중세를 따라 가다보면 자신의 고정관념이 부서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세와 암흑이라는 등식이다. 사실 중세가 암흑이라는 논지를 펼친 사람들은 인문학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중세를 암흑으로 표현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어둠을 뚫고 새로움이 탄생하는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 그 전단계를 암흑이라고 불러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자입트 교수는 중세의 빛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그 빛은 중세가 확장되어 가는 영광의 순간이다. 사방으로 뻗쳐나가는 그리스도의 깃발을 통해 중세는 자신들의 신앙이 절대적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이것이 빛이라면 그 확신을 너무나도 신봉한 나머지 결코 타협하지 않은 고집스런 모습은 어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대비적인 중세의 역사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분명 빛의 영광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 이면에는 잔인함의 어둠이 자리잡고 있는 중세.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힘차게 동방으로 전진해 나가던 십자군의 영광 뒤에는 예루살렘의 대학살이란 어둠이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서구 유럽의 중세는 모순의 역사였다. 새로운 기술을 통한 농업혁명으로 모두가 부자가 될 것만 같았던 시대에도 사회에서 추방되고 격리된 소외된 계층이 엄연히 존재했다는 사실. 유럽 산업발달에 커다란 공헌을 한 도제제도와 무역동맹의 배타적 고립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종교가 일상생활을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견고함에 대한 확신성을 버리고 마녀재판을 선택한 지배계층의 결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중세는 수도원의 시대라고도 한다. 수많은 선구자들이 종교적 열정으로 신을 향한 봉사를 다짐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베네딕트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 도미니쿠스 수도회... 이들은 신을 향한 열정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던지고 그 이상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힘썼다. 하지만 그 이상이 지나칠 때 이단이 발생하였다. 중세만큼 이단이 성행한 시대도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수도원을 중심으로한 종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왜 실패하였을까. 종교를 부패하게 만든 것은 이단도 정치권력도 아니었다. 다만 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탐욕과 한조각의 황금이었던 것이다. 결국 종교의 부패는 중세를 분열시키고 근대를 여는 원인이 되었다.

중세는 빛을 너무도 과신하였는지도 모른다. 빛은 언제나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나고 있다. 그 빛을 맞이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판단의 몫이 되는 것이다. 만약 중세가 빛을 가리는 장막을 부수고 벽을 부수어 모든 곳에 빛이 스며들게 하였다면 새로운 중세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결코 근대는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세는 빛을 과신한 나머지 자신들이 움직이지 않고 아쉬운 자들이 그늘에서 양지로 걸어나오도록 기다렸던 것이다. 중세의 인간들은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늘도 깊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중세의 빛과 어둠은 서로의 영역과 접해있으면서도 융합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중세로부터 1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는 어찌보면 연장된 중세라고 불러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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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교류사
정수일 지음 / 사계절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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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 선생의 <두꺼운 책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이다. <씰크로드학>과 <문명 교류사>를 읽은 분들이라면 이 책의 내용이 더욱 가깝게 다가올 것이다. <씰크로드학>이 씰크로드 그 자체만을 크게 부각시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면 이 책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는 긴 과정을 교류라는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 교류에서 정수일 선생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나의 주목을 끌었던 것은 보석, 그 가운데서도 玉이었다. 그동안 이런 종류의 책을 꽤 읽었다고 생각한 내 자신도 보석玉의 교류를 통해서 인류의 문명사를 재구성하는 선생의 방식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고대 유물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이 曲玉이란 사실을 배웠으면서도 그 원류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나의 식견이 아직도 한참 부족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수일 선생은 이 책을 통해서 시종 차분하게 그리고 논증적으로 인류의 문명 교류를 조목 조목 설명해 나가고 있다. 이런 차분함과 세세함이  이 책의 설득력을 더욱 배가시켜 준다.

인류의 문명은 독자적이라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이며 협력적이라는 것은 이제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확정되었다. 다만 이 교류의 방향에 대해서만 설왕설래하고 있을 뿐이다.  서양의 사가들은 헬레니즘 문화라는 등식을 통해 서에서 동으로, 동양의 사가들은 비단길이란 통로를 통해서 동에서 서로의 이동을 주장하고 있다. 즉 하나의 같은 사실을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를 가지고 설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의 독불장군식의 주장과 동양의 아전인수식 주장에 대해 똑같이 반박하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문명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문명의 교류는 동.서양의 활발한 교류에 의해서 가능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저자는 역사적인 유물을 통해서 하나 하나 설명해 나가고 있다. 그 문명 교류의 통로가 바로 씰크로드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생각하는  씰크로드는 초원의 길을 통과하는 육지의 길과 광동- 말라카 해협 - 인도의 캘리컷 - 아라비아 반도의 아덴을 지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이어져 지중해를 거쳐 유럽의 내륙으로 퍼져 나가는 해상의 씰크로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씰크로드로 인한 문명의 교류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알고 있는 초원 유목민과 아랍제국의 문명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인도 문명권과의 교류도 매우 컸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문명의 교류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의 좁은 식견을 타파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 즉 씰크로드라고 할 때 우리는 이것을 말 그대로 <비단길>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명의 도로를 하나로 이해할 때 우리는 문명이 동에서 서로만 흘러갔다는 일방적인 주장에 파뭍힐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 길을 따라 서양-로마-의 문명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왔다는 사실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중국 고대의 기록에 보면 서쪽으로 가면 불을 뿜어대는 인간이 사는 곳이 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로마의 서커스단이 중국에 와서 불을 뿜는 묘기를 보여준 것을 기록한 것은 아닌지... 각설하고,  비단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대의 문명이 동에서 서쪽으로 일방적으로 흐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로마와 인도 그리고 중국이라는 고대의 가장 번성했던 국가들은 육지의 비단길과 해상의 비단길을 통해 서로 상호 교류를 하므로로서 자신들의 문명을 더욱더 풍요하게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의 문명을 다른 제국에게도 전해 줌으로서 문명상호간에 연관성을 갖는데 일조 하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우리의 일방적인 동양 우월주의와  서구의 주자인 선진 서양, 후진 동양이란 신화가 얼마나 허구적인 토대위에 구축되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낡은 토대를 허물고 새로운 토대를 쌓아올릴 때 이 책이 의도한 문명의 상호교류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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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형성 현대지성신서 16
R.W.서던 지음, 이길상 옮김 / 현대지성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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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의 중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선택의 다양함 속에는 중세라는 시대가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반증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보기에는 아주 단순하게 보이는 중세-신분제사회, 봉건제도-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그동안 많은 유럽의 학자들에 의해 중세의 다양한 면을 조명한 책을 통해 바라 볼 수 있었다. 주로 아날학파들의 진지한 노력 덕에 중세의 세세한 부분을 파악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 점이 중세의 전체를 바라보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는지.


이 책의 저자인 리차드 윌리엄 서던은 <중세의 형성>을 언어권에서부터 시작해 나간다. 즉 중세의 유럽의 공동체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라틴어권'과 '게르만어권'이 협력하여 하나의 유럽 공동체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 언어의 공동체가 북과 남으로 동과 서로 확장되면서 아랍과 슬라브세계, 무어족의 세계와 노르만의 세계를 점령 혹은 기독교화 시키면서 중세의 다양성에 큰 기여를 한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던은 이런 다양성의 혼합을 중세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중세가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무늬를 갖게되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는 약간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서던에 따르면 중세가 형성되면서 이미 다양한 무늬는 심어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양함이 어떻게 중세라는 세계 속에서 융합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원동력이  교회였던 것이다. 실제로 교회의 공식 언어였던 라틴어는 중세 전기간을 통해 외교의 언어이면서 학문의 언어였다. 중세시대 교회의 언어 라틴어를 안다는 사실은 종세가 확장되어간 모든 지역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이 결과 교회는 자신들의 언어와 종교로 중세의 후진적인 틀을 자신들의 세계관에 맞추어가면서 세련된 중세로 변모시켜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교회는 자신의 세계관을 유럽이란 땅에 구현시키기 위해 세속의 권력과 경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경쟁에서 교회가 우위를 점하게 되는 순간 중세는 정치. 사회. 종교가 결합되는 완벽한 중세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서던은 중세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972년부터 1204년에 걸쳐서 고찰하고 있다. 서던에게 이 두개의 연대는 중세가 형성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년도로 인식하고 있다. 젊은 학자인 게르베르투스가 무어인의 과학을 배우고 논리학을 연구하기 위해 랭스로 떠난 972년은 서던에 따르면 정신사적인 유럽이 형성되는 시작의 해였던 것이다. 이 시기 이후 유럽은 잊었던 그리스시대의 사상을 아랍세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의 철학을 자신들의 사상으로 소화시켜 중세의 신학과 철학을 완성시키게 되는 것이다. 즉 972년은 중세의 머리가 형성되는 시작의 해였던 것이다.  그리고 1204년은 경제사적인 유럽이 완성되는 해인 것이다. 즉 이 해에 콘스탄티노플이 4차십자군의 노략질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이를 통해 서방세계가 이미 점령하고 있던 팔레스티나의 해안지방과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이탈리아의 도시를 연결하는 지중해가 드디어 아랍의 손에서 유럽의 손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는 유럽이 앞으로 지중해 상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이는 그동안 아랍세계에 눌려있던 지중해에서 처음으로 유럽의 존재를 알린 사건으로 이후 지중해에서 유럽과 아랍이 해상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게 된다. 이 지중해를 다시 유럽이 일부나마 장악한 사건은 사상적인 사건보다 더 큰 의미를 갖게되는데 이는 지중해가 로마시대 <우리들의 바다>로 불린 이후 처음으로 서양이 동양으로부터 부분적으로나마 제해권을 되찾은 것이기 때문이다.


서던은 이 두사건을 통해 유럽의 중세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물론 서던은 정신사적인 유럽은 형성은 되었지만 그 완성을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서던은 그 중요성을 당대인들은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갔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은 유럽이라는 세계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정해놓은 중요한 사건이라고 보았다. 이제 유럽은 중세시대의 지도 속에서 거대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둘러싸인 고립된 땅이 아니라 당당한 자신감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자신들의 발걸음을 옮길 준비를 하게 된 당당한 한 대륙의 주인이 된 것이다.  중세 유럽을 형성하게 한 이 두 사건을 통해  유럽중세의 정치. 경제. 문화 전 방면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바로 그 시작을 우리에게 이 책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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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 황제 1
수에토니우스 / 풀빛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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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토니우스의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황제는 <풍속으로 본>이란 문장이 암시하듯 제정 초기의 로마의 뒷모습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특이하게 로마의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한  캐사르를 황제의 첫머리에 올려놓았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이후 네로까지 이어지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시조로 대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듯 이 책은 시작부터 모든 역사서의 규칙같은 것은 외면한다. 모두 2권으로 출간된 책의 1권에는 캐사르. 옥타비아누스. 티베리우스를 다루고 있다. 이들 3명의 지도자는 <대리석의 로마를 건설>하는데 초석을 다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3명은 인간적인 약점 또한 공유하고 있었다. 낭비벽이 심했던 캐사르, 만성 해소병에 의심많고 잔인했던 옥타비아누스, 냉혹하고 음란했던 티베리우스의 됨됨이를 보면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지도자의 취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캐사르는 자신의 낭비벽을 타인에 대한 베품으로 바꿔 후일 삼두체제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옥타비아누스의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함은 냉혹한 정치투쟁에서 자신의 야망을 감추는 무기가 됨으로서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 역시 두 선임자처럼 카프리섬으로 은둔을 택함으로서 제국의 모든 신민들에게 보이지 않는 권력의 두려움을 극대화하였다. 즉 황제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시켰던 것이다.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이 세사람의 특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형태를 보이게 된다. 다만 다른 점이라고는 이 세가지 형태의 여러가지 조합일 뿐이란 사실이다.  

로마인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은  그리스인 플루타르코스의 전기와는 약간 다른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리스인이었던 플루타르코스가 인물 개인의 역사와 그 인물의 삶이 형성된 시대의 역사와 관련하여 저술하고 있다면 수에토니우스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면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또 수에토니우스는 역사적 사건을 알 수 있는 날짜라든가 배경같은 것을 기술하지 않아 이를 역사적인 자료로 이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단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수에토니우스는  인물의 전기를 기술함에 있어 정해진 방식의 틀에 의거하여 기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가계-가문-혈통과 같은 조상의 이야기에서 왕이 되기까지의 이야기, 그 다음에는 왕이 된 이후의 이야기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모든 인물들에게 되풀이된다. 이런 방식의 특징은 국가적인 사건이 개인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고 마는 결점이 생겨난다. 한 예로 네로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이야기되는 로마의 방화사건은 당시의 여러 복합적인 사건이 얽히고 설킨 가운데 일어난 일이지만 수에토니우스는 이를 네로의 정신병적인 말한마디로 요약해 버림으로서 모든 역사적 책임을 네로에게 집중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수에토니우스의 전기에는 다른 역사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풍부한 사례들이 놀랄만큼 많이 들어있다. 수에토니우스는 정제되지 않은 일차적인 사료를 그의 저작에 무작위로 삽입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수에토니우스의 저술이 천대받으면서도 많이 읽힌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로마사의 가십성 이야기는 모두다 수에토니우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너무 과장이지만). 

수에토니우스의 인물전 기술작업을 살펴보면 마치 한 인물에 대하여 모든 언론매체의 기록과  그에 대한 소문을 보고 들은 그대로 메모하여 자신의 이야기 속에 집어 넣은 것처럼 보인다.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작품에는 역사가로서의 절대적인 조건인 엄정함이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역사가 아니라 소설의 범주로 취급되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사적 진실 위에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이 덧붙여질 때 더욱더 완벽한 역사적 입체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역사적 인물의 엄숙함에 수에토니우스가 묘사한 지도자의 인간적 천박함이나 경솔함이 접합되면 좀 더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완성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일정한 위치에서 자신의 가치를 뽐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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